제카리아 시친,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AK, 이근영 역, 2009) 읽다.

 

위대한 소재, 거침없는 스토리, 그리고 느닷없는 결말

 

나는 음모론자다.

피라미드, 나스카, 초고대문명 등의 말을 들으면 심박수가 빨라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하지만 UFO, 지구 공동설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감히 말한다. 나는 급진적 음모론자가 아닌, 합리적 음모론자다.

일전에 읽은 헨콕의 책은, 어려웠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남아메리카의 아즈텍 문명과 나일강의 이집트 문명,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르게 독립적으로 발전한 이 두 문명의 연결 고리를, 헨콕은, 집요하게 파헤쳤다.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의 각도는 4파이(원주율)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2파이의 정확히 두 배다. 그 당시의 기술력으로 이런 건축물을 구현할 수 있는가는 문제는 별개로, 이와 같은 정확한 피라미드의 각도 시현, 그리고 상호 교섭이 없던 두 문명의 건축문화적 교집합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편 제카리아 시친의 이 책은 시친의 지구연대기시리즈 중 첫 번째인데, 양장본으로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중간 중간 삽입된 그림도 많고 내용도 흥미로워 가독성이 좋다.

 

내용을 들여다 보자.

원시 인류라 할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는 2백만 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음에도 그들의 외모나 습성에는 별 차이가 없다. 같은 진화의 공식으로 대입한다면 네안데르탈인 이후의 크로마뇽인은 비슷한 시간 간격의 차이를 두고 진화를 해야 옳다. 그러나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크로마뇽인은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3십만 년 이후, 지금으로부터 약 35천 년 전에 급작스럽게 출현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명은 이전의 원시 인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수준이다. 즉 진화의 흐름상 이는 매우 급진적이며 격변적이며 이례적이다.

저자의 의문은 이것만이 아니다.

 

지구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서 가장 오래됐다는 수메르 문명.

그들은 기원전 3,000년 경에 급작스럽게 예고 없이 등장해 거대한 문명 국가를 건설했다. 이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신전을 세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들이 완벽한 문자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자는 모양이 쐐기를 닮았다 하여 설형문자로도 불리는데,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는 점토판에 새겨진 형태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발명품이자 상징 체계이다. 단순한 그림 문자가 아닌, 문장을 기록하고 읽을 정도의 문자 체계는, 당연한 추론이겠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의 적층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완벽한 문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 단군신화에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로 변신하기도 전에, 아니, 환웅이 홍익인간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단수로 내려오기도 한참 전에 그들은 문자를 사용했다.

 

저자는 수메르인들이 기록한 옛 기록을 토대로 지구의 시작과 인류의 탄생을 재구한다.

태초의 태양계에 화성과 목성 사이에 행성(이것, 파토의 글에 나오는 행성 X. 보데의 법칙에 의해 이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은 과연 의문이긴 하다)이 있었다. 이 행성과 마르둑이라는 불리는 행성이 충돌해 원래 있던 행성은 일부 파괴되고(그 행성의 잔재가 현재 화성과 목성 사이에 파편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일부 튕겨져 나와 지구가 되었다. 마르둑은 3,600년을 주기로 태양의 근일점에 도달하는데, 마르둑의 외계인들은 지구보다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네필림(던져진 자, 지구로 내려온 자)이다. 네필림은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초원 지대에 착륙했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도시를 건설하고, 인간을 만들었다. ?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서. 네필림들은 인간 여자를 임신시켰고, 이런 타락한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네필림의 지도자들은 지구를 버리기로 한다. 지구에 대홍수가 났을 때(행성 마르둑이 지구에 근접했을 때), 네필림은 지구를 떠난다. 그런데 네필림의 지도자 중, 인간을 만든 엔키는 우트나피시팀(성경에서의 노아)에게 홍수를 예언하고, 인류는 극소수나마 살아 남게 되었다. 폐허가 된 지구를 보며 네필림은 안타까워했고, 살아 남은 인류에게 네필림의 문명을 전수해 주었다. 이것이 최초의 문명, 곧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어를 해독할 수 있는 몇 안 된다는 석학 중의 한 사람, 시친이 왜 이런 식의 황당무계한 소설을 썼는지는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문제가 많다.

 

전제가 옳지 않다.

저자는 진화를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해, 크로마뇽인의 출현이 앞선 진화의 흐름과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진화론에서 격변설과 자연 선택은 가장 기초적 전제다. 마치 물이 끓기 전의 99와 끓기 시작하는 100가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것처럼. 진화는 제한된 짧은 순간에도 조건에 의해 성립할 수 있다.

 

삽화의 캡션 처리는 직관적 판단의 오류를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헬멧과 보안경을 쓴 인물상’, ‘불꽃으로 추진되어 날아가는 로켓등의 식으로 삽화에 인용구를 달았다. 그러나 이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그림에 저자의 의도를 주입한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화의 해석도 마찬가지. 답을 정해 놓고, 근거를 찾는 식으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본다. 유하는 말했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이라고.

 

비교 신화학자 막스 뮐러가 주장한 언어 질병설은 다음과 같다.

원시 언어에서는 단어가 많지 않아 은유에 의존해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일출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밤이 아름다운 아이를 출산한다.’의 식으로 표현했다. 이후 언어가 발달하며 단어의 개수도 많아진 후대인들이 은유적인 원시 언어의 의미를 신화적으로 해석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해석했다.

수메르 언어에서 의미가 밝혀진 것은 고작 2,000개 정도의 단어라고 한다. 동화책 수준의 단어 양인 것이다. , 수메르 신화에 쓰인 단어는 선택 가능한 다양한 언어들 중 엄선된 것이라기보다는 제한된 단어에서 쓰임이 강제된 것들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고대에 초기 문명 기록자들이 적을 것이라곤, 하늘태양바람홍수 등의 자연에 대한 기록이 어쩌면 전부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자면 수메르의 신화 등은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 및 이에 대한 특이 사항에 대한 기록, 양보한다 하더라도 자연으로 형상화된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뜬금 없는 우주 기지설이나 외계인의 인간 주조설 따위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의 상관성, 수메르 신화와 성경과의 관련성, 그리고 각 문화 및 신화의 전승 관계 및 동질성이질성에 대한 탐구였으면 어땠을까.
아쉬움 남기며 책을 덮는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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