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2002) 읽다.


늣늣하고 푸근한 아름다움

 

얼마 전, 성북동을 다녀왔다.

철거민들의 투쟁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비명을 지르며 서 있는 북정 마을은 쓸쓸했고, 좁고 퇴락한 골목 한 켠에 웅크리고 있는 심우장은 처연했다. 이태준 생가 수연산방에서 차를 마실까 고민하다 찾은 성북구립미술관 위대한 유산전은 졸작이었고, 서울돈까스는 명성만 못했다. 성북동 마실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최순우 옛집이었다. 최순우 옛집이 실망을 주었다는 게 아니라 12월 말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최순우 옛집이 그랬다. 수겸이에게 최순우 옛집 엽서를 보여 주며, 꼭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 읽은 이 책은 2007, 간송 미술관 관람 후에 찾은 최순우 옛집에서 구입한 것이다. 책장에 묵혀 두었다가 읽는 책은 은은한 풍미가 있다. 날 것과 새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책만은, 짚더미에서 썩지도 않고 부화하지도 않고 독특한 풍미를 내는 오리 알 피딴처럼, 충분히 익힌 것이 나는 좋다. 화려하게 채색된 페인트 냄새 단청보다는 빛 낡은 추녀의 기울어진 곡선이 좋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만큼 아름답다. 고졸(古拙)의 미()라고 할까.

 

혜곡 최순우의 이 책은 한국 고미술 산책 지도다.

건축과 불상석탑부터 자기와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대상은 넓지만, 결코 얕지 않다. 최순우가 말하는 한국적 미의 본질을 과문한 나로선 알지 못한다.

사실 한국적 미라는 것을 범주화하는 것은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다. 어떤 문화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한국적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미묘한 독창성과 주체성, 단일성과 폐쇄성이라는 특성은 폐기되어야 할 것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대개의 지역성을 갖는 문화란 유입된 선진 문화와 토착적 후진 문화와의 교점에서 성립(물론 엄밀히 말하면 문화는 다방향적 이동 경로를 갖고 있겠지만, 대체로 고대 문화의 큰 흐름은 낙수 효과가 맞을 게다)된 것일 테니까. 그러므로 한국적 미라는 것도 흘러 들어온 중국적 요소와 선주해 있던 한국적 요소의 화학적 결합에 의해 탄생된 것일 수밖에. 그렇다면 이 한국적 미라는 것의, 즉 우리 문화나 미술만의 본질은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흔히들 말한다. 한국적 미는 은근하며 푸근하고, 늣늣하며 소박한 것이다. 그렇다. 소박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소박하다는 표현 역시 무엇과의 대비에서 소박한 것이라는 비교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점, 한국미에 대한 개념 규정에서 중국의 그것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최순우의 이 책은 탁월한 문화 안내서다.

이 점에 이견 있을 순 없다.

깊이 있는 안목과 유려하고 전아한 문장을 끄덕끄덕 좇다 보면 아, 뭐랄까, 척박하고 탁했던 시야가 맑게 순치되는 듯하다. 건축에 관한 글보다 공예나 자기 등 미술 소품에 관한 글이 훨씬 좋다. 특히 마지막 회화를 소재로 한 일련의 글들은 탁월하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도 좋다.

 

지난 주 나는 강릉에 다녀왔는데 그 곳 강릉 관아의 뒤편, 객사로 들어가는 기둥은 배흘림기둥이었다. 불룩하니 배가 나온 그 배흘림기둥을 쓰다듬어 보며, 소백산 자락의 부석사를 떠올렸다. 그날 밤, 동해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최순우의 이 책을 꺼내 읽는다. 내가 마시는 이 술이 맥주가 아니라 맑은 청주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밤을 읽었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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