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980년대편)

 

 

 

 

 

1. 70년대 편을 읽고 바로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다. 권당 6,600원 꼴로. 싸다. 독서를 위해 책을 산 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3년? 5년? 내가 요새 읽고 있은 책은 모두 책장에 몇 년 동안 방치된 것들이었다. 택배 아저씨께 책을 받고 배시시 웃는다. 기분 좋다.

2. 1980년대 편은 4권이다. 1권은 1980년, 2권은 1981~1985년, 3권은 1986~1988년, 마지막 4권은 1989년이다.

3. 1권의 1980년대 편은 광주 민주 항쟁에 대한 기록이다. 감상문은 1권에 관한 것 하나, 2~4권에 관한 것 하나. 이렇게 둘로 나눈다. 이번 것은 1권에 관한 것이다.

4. 이 책 또한 공부를 위한 텍스트다. 주요 내용을 요약 및 인용하는 식으로 전개한다. 각주는 내 느낌을 덧붙인 것이고, 사진은 책에 실린 것과 다를 수 있다.

5. 지난 번 70년대 편을 정리할 때 썼던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은 지역주의, 언론, 무관심이다. 그 부분에 방점을 찍으며 읽었고, 여기에 기술한다.

6. 책의 부제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은 다음을 은유한다. 광주학살 : 군사독재, 인권, 지역주의 조장, 민주주의 억압, 언론의 직무 유기. 그리고 서울올림픽 : 외적 성장, 전시 효과, 애국주의, 우민화 정책.

7. 강준만은 이번 책의 머리말(머리말이 길다, 45쪽까지)에서 ‘위선과 기만의 수렁에 빠진 한국인’이라며 진실을 보지 않는, 보려고 하지 않는 국민에 대해 정면 비판한다. 강준만은 답답했던 것이다.

8. 역시 좀 길다. 호흡을 가다듬고...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1980)

 

- ‘인간 사냥’을 위한 ‘화려한 휴가’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16일의 횃불시위를 마치고 학교에 계속 나와 정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학생들이 습격을 받아 가혹한 구타를 당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본부건물에 감금되었으며, 운이 좋았던 몇몇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과 변소로 기어올라 파이프를 타고 내려와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와 관련, 김정남은 이렇게 말한다.

"5.18 반란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전두환 등은 구차하게 변명하기를, 광주민주화운동은 시위와 진압이 예상외로 악화되어 발생한 것일 뿐, 미리 강경진압을 공모, 계획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판과정을 통하여, 전두환 신군부는 5월초, 시국수습 방안을 모색할 당시부터 이미 국민들이 크게 반발, 저항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탄압'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을 계획하였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에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였음이 밝혀졌다. 17일 밤에 이미 특전사 7공수여단 소속 장교 94명, 사병 680명이 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 당시 학교 잔류 학생들에 대한 구타행위를 자행하였다. 더구나 지역정서상 커다란 반발이 예상되는 김대중을 계엄확대와 동시에 체포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이들은 처음부터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있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계엄군의 조기투입과 강경진압을 획책하였음이 명백한 것이다.[각주:1] (1권, 121쪽)

 

 

"공수대원들은 서너 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공을 차듯이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시위 군중은 불과 십여 분도 못되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공수대원들은 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주변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나서 손목을 뒤로하여 포승으로 묶고는 차에 던져 올렸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고 골목마다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어떤 경우는 터미널 뒤편의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워 몸으로 가리면서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고 쫓겼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각주:2]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미움받는 백성, 한 많은 백성 전라도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개, 돼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망가는 사람의 등뒤에서 착검한 총을 휘둘렀고 잡은 사람을 때릴 때도 얼굴이나 머리를 주로 때렸다." (123~125쪽)

            

 

황석영의 기록이다.

“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했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전의 다리를 흔들어대는 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132쪽)[각주:3]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잔인한 전쟁에서도 '상부'는 적의 살해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 법이다. 광주에서 저질러진 만행은 적어도 정황상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두환 일당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광주학살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간에 걸쳐 자행되었는데, 신군부 우두머리들이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걸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그게 실질적인 지시가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아들이 쏜 총에 어린애가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술만 취하면 광주에서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죄를 받고 있다며 울지요."

80년 5.18 당시 '진압군'에 참여했던 과거로 인해 지금까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이성우의 어머니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95년에 한 말이다.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나 할 수 있겠지만, 붙잡혀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①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②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③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④ 사람이 가득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⑤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⑥ 며칠째 물 한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⑦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⑧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⑨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⑩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128쪽)

대검만으론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노동청 쪽에서 계엄군의 탱크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면서 시민들을 깔아뭉개기 시작하였다. 모여 있던 시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탱크에 처절한 비명을 울리며 골목과 담을 넘어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탱크에 으깨어지고 말았다. 탱크가 지나간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산산이 으깨어지고, 부상당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133쪽)[각주:4]

 

- ‘해방 광주’의 고통과 절규

               

                  

 

21일 저녁 버스 두 대가 송암동 앞 도로상에 나타나자 인근 야산에서 불을 뿜어내는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먼저 온 차량은 완전히 전복하고 말았다. 그 안에 몇명의 청년들이 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비명소리가 주택가까지 들렸다. 이어서 전복된 차량보다 조금 더 앞선 위치에서 또 한 대의 버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맞고 전복했다. 밤새 이런 상황은 계속 벌어졌고 우리는 총소리만 나면 으례히 돌아오는 차량이 총에 맞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지점에 조심스레 나가 보았다. 도로 양쪽에 있는 논에 20대 청년들로 보이는 시체 9구가 있었다. 전복된 차량은 버스 두 대였으며 그 시체는 이 버스를 타고 광주에 들어오던 청년들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계엄군의 차량 한 대가 이 9구의 시체를 모두 싣고 군용담요를 덮어 은폐한 뒤 산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계엄군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자 모두 몸을 피했는데 담요를 덮은 그 차가 지나간 후에 나와보니 논에 있던 시체 9구가 모두 없어졌다. 아마 그 9구의 시체는 헬기로 어디론가 실려간 것 같다. 송암동 뒷산에서는 계속 헬기가 이착륙하고 있었고 9구의 시체를 실은 차도 그 방향으로 향했다. 이밖에도 많은 수의 청년들이 밤중에 들어오다가 이 도로 위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밤새 이착륙을 계속하던 헬기가 실어간 것 같다." (142쪽)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공수부대는 가축들에게도 총질을 하여 철수 중 인근 마을의 가축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한선웅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147쪽)

                 

 

“뭇자리에서 피사리하는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칠면조 우리에 총을 쏘아 2백여 마리나 죽였으며 젖소를 쏘아 죽이기도 했다. 이것이 송암동 한 부락에서만 있었던 살육이었다. 그것도 전투중에 전투의 흥분으로 한 것이 아니다. 22일 시외곽으로 퇴각해서 이틀 동안이나 쉰 다음 24일 부대이동을 하면서 한 짓이다. 국민이 나라를 지키라고 세금을 내어 월급 주고 그 세금으로 사준 총으로 적이 아니라 제국민을, 더구나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까지 이토록 잔인무도하게 죽였다. 적진에서도 이럴 수가 없는 일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그 무자비한 살육의 공포로 국민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으므로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자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그런 인간이 아닌 짓을 했던 것이다.”[각주:5] (149쪽)

 

- 144명, 832명, 2000명?

 

 

 

5.18의 사망자 수는 과연 몇명이었을까?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다쳤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광주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그걸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겨웠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조아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가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 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당목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후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사망자 수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는 2천 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처음부터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 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목사인 아놀드 A. 피터슨은 사망자 수를 8백여 명으로 추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와 내가 최근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그 항쟁 동안 광주에 거주했던 한국군에서 일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 따르면 조사당국자들은 사망자 수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다시 회고해보면 그 수는 통계적으로도 내 추측과 일치한다.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만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천명이었다. 이들 2천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두 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0명 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아니므로,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 수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사망자 수 이전에 학살 자체를 바라보는 신군부의 시각이었다. 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생각했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기자 회견에서 광주에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2명 등 모두 189명이 사망했다고 밝히면서, "광주사태는 다른 나라에서 보면 자그마한 사건, 즉 '마이애미 폭동' 정도일 것이다.... 일부 종교인들은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그들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159쪽)[각주:6]

  

- 호남인들의 한(恨)에 대한 모멸과 박해

 

 

 

박현채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의 정치정세를 "보수 제세력간의 격렬한 정치투쟁에서 비록 확연한 우세를 견지하고는 있지 않았지만 군부에 강력히 저항하는 김대중계와 재야세력의 연합이 강력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적 반동에의 길은 광주에서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곳 어디에서든지 일어나게 되어 있었"지만, "박정희체제의 후계를 노리는 군부의 작은 고양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승부처를 "끈덕진 저항의 역사를 가지면서 경제력에서 약하고 역사적 투쟁에서 싸움의 좌절과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에서 선택"하였다고 보았다.

 

 

설마! 그러나 이후 운동권을 제외한 일부 비호남지역 사람들의 호남인들의 한에 대한 모진 모멸과 박해는 박현채의 주장이 타당함을 입증해주었다. 광주시민들은 동료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대검과 총탄에 무참히 쓰러져갈 때에 "전두환을 갈갈이 찢어 죽이자"고 외쳤지만, 내내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호남인들이 아니라면 결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력감에 빠진 호남인들은 오직 말 없이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하였지만, 인정머리 없고 광주학살에 대해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 대해서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일부 정신 나간 한국인들은 전두환 일당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이후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161쪽)[각주:7]

- ‘관객의 부재’를 넘어선 언론의 왜곡

 

 

 

<조선일보>는 1980년 5월 25일자 사설에서 광주항쟁 세력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몰아붙이고는 "57년 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며 마치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한 일본인 폭도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5.18 민중항쟁 서울경기 동지회 사무국장인 임종일은 "조선일보는 24일부터 보도태도가 동아, 중앙과는 달랐는데 이는 신군부에게 조기진압 명분을 주려한 듯하다"고 지적했는데,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27일 새벽 계엄군 투입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자 <조선일보>는 28일자 사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거짓말까지 동원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 지금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172쪽)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 확대 조치의 배경을 설명하고 언론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사태 보도의 실질적 책임자인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백만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 일간지의 부장급 월급이 45만원 내외였으므로 1백만원은 촌지의 수준을 넘는 거금이었다. (174쪽)

 

- 은폐된 5.18의 진실

 

 

광주학살은 이후의 한국정치를 규정한 최대요인이었다. 극심한 지역주의 정치에서 호남의 생각과 선택은 과연 제대로 이해를 받았던가? 오히려 광주학살 이후에 견고해진 지역주의 구도가 군사독재자들의 피난처를 제공하진 않았던가?

광주의 진실은 악의적 모략뿐만 아니라 당위적 선언성 발언에 의해서도 계속 은폐되었다. 광주학살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신군부가 노렸던 이른바 ‘적(敵)의 창출’ 효과다. 호남을 악용한 ‘적의 창출’ 효과와 관련된 최장집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지역감정은 한마디로 호남배제감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전라도 감정, 충청도감정, 경상도 감정이 아니라 호남지방 배제의 감정을 핵심으로 한다는 거지요. 배제당하는 호남지방과 배제하는 비호남 지방의 감정의 대립이며, 지역감정이란 이 두 감정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왜 호남을 배제하는가의 요인은 광주항쟁으로부터 심화되어 왔는데 이런 차별적 감정을 조작함으로써 일종의 역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봅니다. 즉 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사람들에게 통합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통합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까지는 반공을 동원해서 통합을 유지하려 했고 지금은 그것이 약화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통합의 기제가 필요하게 되는데, 국민 가운데 어떤 지역 또는 집단을 가상적 심리적인 적으로 상정할 때 반사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통합성이 생기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나치즘을 통해 독일인을 동원할 때도 반유태주의라는 보조적인 감정을 이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186쪽)[각주:8]

마지막으로 뜻 있는 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 대개 광주 항쟁을 말할 때 과잉진압이니 하는 따위의 ‘진압’이라는 말을 쓴다. 현장에서 겪어본 나는 ‘진압’이라는 말의 허구를 지적한다. 그건 진압이 아니다. 무엇을 진압한다는 말인가. 오월의 햇살을? 한가로이 오가는 선남선녀를? 그들은 그냥 평화로운 광주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 군화발을 들여놨다. 학원도, 독서실도, 가정집도, 그때 광주엔 진압을 할 만한 일이 없었다. - 1995년『김대중 죽이기』를 읽고 보내준 독자의 편지 (189쪽)[각주:9]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요술방망이를 가진 것과 같았다. 무엇이든 소설을 마음대로 쓰면 그게 사실로 둔갑하여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가 발표한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도 바로 그런 픽션이었다. 그러나 그 픽션은 잔인했다. 픽션을 사실로 둔갑시키기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에게 인간적 모욕과 모진 고문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구속자 가족들이 나중에 작성한 <우리가 당했고, 당하고 있는 부당불법 잔혹한 처우>라는 자료는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대중 - 한줄기 햇빛도 없는 지하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으며 몇차례나 옷을 발가젖힌 채 ‘고문하겠다’는 협박을 당했음. 문익환 - 날조된 혐의 사실을 시인하지 않자 ‘젊은 군인들에게 넘기겠다’며 옆방의 참혹한 고문 소리를 들려주었음. 이문영 - 군침대 각목으로 무수히 맞았으며 그 여파로 1심판결 때까지 왼쪽 팔을 들지 못했음. 예춘호 - 고문 때문에 음성이 변했음. … 이호철 - 심한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한동안 수사관에게 ‘엄마’라고 불렀음.” (201쪽)

80년 9월 17일 1심 군사재판은 이미 짜여진 각본에 따라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미국은 김대중이 체포된 다음날 항의성명을 발표하는 등 김대중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다. 재판이 끝난 후, 미국무부는 공식적으로 김대중의 혐의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요컨대, 김대중은 학생선동 → 대중규합 → 민중봉기 → 정부전복을 목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합법적 투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그 구체적인 사례로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조종하여 학원사태의 과열과 악화를 꽤했으며,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계엄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을 주장케 하여, 사실상 관주사태를 배후에 조종하였으며, 또 광주사태 당시 무기반납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등 황당한 내용을 열거하였다. 광주항쟁 이전에 이미 검거된 상태에서 광주항쟁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억지였지만, 신군부는 그런 억지에 개의치 않았다. (203쪽)

그런 각본에 의해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무렵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김대중을 세 번이나 찾아와 김대중의 구명을 조건으로 신군부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지만 김대중은 그걸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각주:10]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정권이 조작해낸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는 완전한 뼈대를 갖게 되어 이후에도 수많은 국민들이 김대중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마저 갖게 되었다. 당시 언론이 권력이 탄압에 못 이겨 조작된 사실이나마 ‘사실’보도에만 임했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돼 있었다.

다른 지역사람들은 신군부의 무수히 많은 거짓말들을 그대로 믿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광주학살을 겪은 호남인들은 신군부의 그런 일련의 조작에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최장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주민중항쟁이 김대중에 의해 계획된 반국가적 폭동으로 규정되었을 때 호남지방민들에게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그들의 집단적 수난을 상징하는 인물로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고, 그들의 수난과 그의 수난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 전라도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김대중과 그의 후광을 입은 후보들에게 몰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런 ‘감정의 끈’이 없는 다른 지역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210쪽)

  - 한국인은 들쥐떼인가? : 조선일보의 활약

 

<조선일보> 8월 23일자 3면 톱기사는 ‘소설’을 써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 그의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방법을 3분의 1만 흉내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내의 통설로 되어 있다.”[각주:11] (230쪽)

 

- 삼청교육대

 

 

 

80년대에 저질러진 야만적 행위 가운데 광주학살 다음으로 잔인했던 건 아마도 삼청교육대에 의한 인권유린이었을 것이다. 삼청교육은 80년 8월 4일에 발표된 계엄포고 제13호(불량배 일제 검거)를 근거로 한 것이었는데, … 국보위는 표면적으론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지만, 확실한 정권장악을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정치적 보복의 목적이 더 컸다.

<중앙일보>는 “낮에는 고행하는 승려처럼 육체적 훈련을 받고 밤에는 자아발견의 시간을 갖게 돼 정말 다행이다”라고 기사를 썼다.

<동아일보>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선량한 시민들을 못살게 군 흔적을 온몸의 문신과 칼자국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참회의 눈물과 땀방울에서 이 같은 흉터는 조금씩 씻겨져 나가는 것 같다. … 특히 4백여 명의 지도요원들이 자신들의 개과천선을 돕고 있는 데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라고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왜곡하였다.[각주:12][각주:13] (214쪽)

 

                    

 

- 언론통폐합

 

1980년 11월 14일 신군부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에 강요한 ‘건전언론 육성과 창당을 위한 결의문’을 빙자하여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언론통폐합의 주요 내용은 방송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경영금지, 신문통폐합,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 철수, 지방지의 1도 1사제, 통신사통폐합으로 대형 단일 통신사(연합통신) 설립 등이었다.

신군부의 입장에서 언론통폐합은 여러 효과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잠시 ‘서울의 봄’을 맞아 자유화의 기대에 부풀었던 언론의 기를 꺾어놓음으로써 언론의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해내는 것이었다. 정통성이 전혀 없는 신군부로서는 언론이 단지 굴종하는 것만으론 모자랐다. 언론의 적극적인 정권홍보가 필요했던 것이다.[각주:14] (263쪽)

- 조선일보의 태평성대

 

다른 신문사들이 언론통폐합의 폭격 또는 파편을 맞아 경제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중에도 이 신문만은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나갔으니 그게 과연 천재적인 경영술 때문이었을까? 조선일보사가 발행한 <조선일보 칠십년사>에 기록돼 있는 몇 가지 사실만 소개하겠다.

80년 4월 10일 사장 방우영은 "4월부터 모든 사원의 봉급을 평균 33% 인상하고, 보너스는 연 800% 이상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격동기에 성장한다. 발행부수 신장률이 높은 기간은 언제나 격동기이다. 6월 21에 나온 사보 제437호는 1980년 5월 18일자로 조선일보 발행부수가 120만부를 돌파했다고 밝힌다."

"조선일보는 격동기에 성장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으로 대변되는 격변기는 한국현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언론기능이 완전히 죽어버린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 와중에 조선일보가 성장, 그것도 급성장했다는 건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291쪽)

'정치권력'의 권력행사 방식과 '언론권력'의 권력행사 방식은 다르다. '언론권력'은 기본적으로 '시장권력'이기 때문에 권력행사 방식이 부드럽다. 또 인간은 아무리 억압적인 체제하에서 살더라도 자신의 주체성을 믿고 싶어하는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는 동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평화로운 심리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해, 여론조작이 광범위하게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일지라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여론조작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머릿속에 조작된 사실이 주업되었다는 걸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강렬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상 1권, 294쪽)

 

 

 








  1. 이 작전명을 영화화한 김지훈 감독의 영화가 있다. 지나치게 감성 코드로만 접근해서 좀 밋밋했던 기억이 난다. [본문으로]
  2. 오월의 노래. 선율이 가벼워서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민중 가요. 좀더 무거웠다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곡조와 가사가 불협화음. [본문으로]
  3. 역사는 반복한다, 지금도. 쌍용자동차 노조는 생명을 걸고 오늘도 싸우고 있고, MB 악법 결사 반대를 외치며 시민들은 분노하지만, 보라! 인기 검색어순위를. 우리는 이렇다. 관심 없고 지루한 얘기는 Out!. [본문으로]
  4. 80년대 판 써든 어택. 군인들에겐 게임이 필요했을까. [본문으로]
  5. 큰 그림을 그려 보자. 개별적 사건 하나 하나는 모두 큰 계획 속의 절차일 뿐이다. 광주였던 까닭? 굳이 그렇게 잔혹하게 죽인 까닭? 모두 계획 속의 절차였던 것이다. 계획 속의 절차. 우린 장기판의 말이었다. [본문으로]
  6. 최민수, 고현정 주연의 모래시계란 드라마가 있었다. 최민수는 80년 5월 우연히 광주에 갔다가 광주 민중 항쟁을 겪는다. 도청 사수의 그 마지막 날. 광주의 어머니는 최민수에게 말한다. 당신은, 타지(他地) 사람이니까, 도망가라고, 가서 꼭 살라고, 꼭 살아서, 지금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달라고, 우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는지, 꼭 살아서 말해주라고, 우리 광주 사람이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까, 타지 사람인 당신이, 당신이 우리의 얘기를 말해 달라고, 더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당신이 본 그대로만 말해주라고. - 당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7. [/footnote][footnote]역시 강풀이 그린 만화다.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그렸다. 링크 건다. http://siyurin.tistory.com/100?srchid=BR1http%3A%2F%2Fsiyurin.tistory.com%2F100 [본문으로]
  8. 난, 전라도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 정말 불쌍하다. 1997년 대선. 나 - 첫 투표권. 개표 방송. 김대중 대통령 당선 확정, 그 때. 혹시라도 전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크면 타 지역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김대중을 마음껏 연호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또 떨어질까봐,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 전라도 빨갱이 소리 묵묵히 참아내며, 못 들은 척, 못 들은 척. 당선 확정의 순간. 금남로에 나와서 꽹과리 치며, 북 치며, 춤 추며, 울며, 밤새 기뻐했던. 그때... [본문으로]
  9. 나도 몰랐었다. 광주에 대해, 5.18에 대해 남보다 조금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난 잘 몰랐다. 시민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그들은 광주에 온 게 아니었다. ‘인간 사냥’을 하기 위해 왔고, 시민들의 시위를 유도했다. 난 잘 몰랐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본문으로]
  10. 김대중, 머리로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 부디 쾌유하시길. [본문으로]
  11. 조선일보는 멋지다. 일관성. 진심이다. 반명 변듣보잡은 멋지지 않다. 일관성이 없다. 일관성이 있든 없든, 조선일보와 변듣보잡은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본문으로]
  12. 수고했다. 하지만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에 감히 당할 수 없다. 나름 애썼지만 2권부터 소개되는 조선일보의 내공 9갑자 수준의 신기(神技)의 무공(武功)에는 아직 깜이 안 된다. [본문으로]
  13. 드라마 모래시계 를 보면 최민수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겁나 고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현대사는 최민수가 썼다. 왕건, 대조영, 장보고, 숙종 등 고려 말의 주인공이 최수종이었다면, 80년대의 주인공은 최민수다. [본문으로]
  14. 재밌지 않은가? 80년대 군사독재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신문과 방송의 경영을 금지하는 법(法)을 만들었다면, 2009년의 또 다른 독재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신문과 방송의 경영 금지를 해제하는 법(法)을 만들려고 한다. 패러독스. 에헤라디야~. [본문으로]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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