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라도 죽이기』(개마고원, 1995) 읽다.

 

‘적의 창출’을 통한 지배 전략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대중 죽이기』 후속편. 15년의 시간차를 넘어 읽는다.

 

이강백의 우화극 『파수꾼』 내용은 이렇다.

마을의 파수꾼들은 망루에 올라가 이리 떼의 습격을 예의 주시한다. 파수꾼들이 양철북을 두드리며 “이리 떼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마을 사람들은 안전 지대로 대피하는 것이다. 새로 파견된 파수꾼 ‘다’는 이리 떼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도 이리 떼의 습격 경고를 알리는 파수꾼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파수꾼 ‘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촌장이 나타나 파수꾼 ‘다’를 설득한다.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단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이리에게 물리지 않았단다. 마을은 늘 안전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거야. 네가 진실을 말한다면 마을의 질서는 무너져 버린다. 얘야, 넌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파수꾼 ‘다’는 망루에서 양철북 두드리는 일을 계속 한다.

 

물론 『파수꾼』의 우화는 1970년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다. 우화의 풍자성이 시․공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단결과 질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적의 창출’의 개념이다.

 

‘적의’란 ‘적대적인 마음’이며, ‘창출’이란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생각하여 지어내거나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적의 창출’이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적대적인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특정한 목적이 정치적 목적성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적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집단의 결속력도 공동의 적이 나타났을 때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적의 실체가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될 필요는 없다. 적은 오히려 그 실체가 모호하거나 애매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이 어려울 때 대중에게 더욱 큰 공포감을 가져다 준다. 적에 대한 집착은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극도로 제약하기 때문에 지배집단의 대중 조작은 훨씬 더 쉬워진다. 적이 없으면 통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미국 역사에선 영국 - 멕시코 - 스페인 - 독일 - 일본 - 러시아 - 북한 - 쿠바 - 베트남 - 이라크 - 북한 -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적이 계속 존재했다. 적이 있을 때마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진다. (70쪽 부분 인용)

 

강준만의 『전라도 죽이기』는 살풀이다.

강준만에 의하면, 그동안 역대 정권은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적의 창출’을 통한 분할지배 전략을 사용했으며, (일부) 영남인들은 ‘창조된 지역 감정’과 ‘기득권 수호 의식’의 합으로 ‘전라도 죽이기’를 실천했다.

이른바 ‘지역 감정’은 적어도 1971년 대선전까지는 ‘없던’ 개념이었다. 1971년 대선, 신민당의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석패했던 것은 영․호남의 지역적 표쏠림 현상(지역 감정이든, 지역 패권주의든) 때문이 아니라 불법 부정 선거 때문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참고 : 70년대를 돌아보다] 동력을 상실해 가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바통을 이어 받아 등장한 몬스터 ‘지역 감정’은 요 좁디좁은 한반도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TK - PK - TK - PK 패권주의를 만들었다.

사실 ‘지역 감정의 조장’은 역대 정권의 매우 중요한 국책 사업이었다. 정권의 지상 과제가 무엇인가. 그들의 지향점이 ‘국민 복지’와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순진한 소리다. 정권은 오직 정권 재집권을 그 사명으로 한다(물론 정권 재연장이 ‘전략’인가 ‘전술’인가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정권에 의해 창출된 지역 감정 : 전라도 죽이기 : 김대중 죽이기는 그동안 자기 몫(?)을 톡톡히 했다.

파수꾼을 설득하는 촌장의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냐?”라는 대사는 실체 없는 지역 감정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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