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1984(박경서 역, 열린책들, 2007) 읽다.

 

파놉티콘, 디스토피아의 다른 이름

 

18세기 영국에 한 야심가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최소의 감시로 최대의 통제를 하기 위한 감옥, 그 감옥의 청사진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까지 감옥의 구조는 학교나 공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즉 당시의 감옥은 감시에 최적화된 구조가 아니었다. 그 야심가의 구상은 이랬다. 일단 돔형의 원형 건물로 외형을 만든다. 감옥 둘레로 4(혹은 6)의 죄수를 수감할 방을 촘촘히 배치한다. 죄수의 방은 건물의 안을 향해 있다. 그리고 건물의 가장 중앙에 높은 탑을 올린다. 그 탑에서는 감옥의 내벽에 사열한 모든 죄수의 방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이 끝났으면 조명을 설치한다. 감시자가 있는 탑에는 죄수의 방 구석구석을 비출 수 있도록 조명이 있다. 반면 수감자가 있는 쪽은 외부의 빛으로부터 차단돼 있다. 이 모든 준비 과정이 끝났으면 이 감옥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감옥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에 수감된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감시의 개연성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정신적이기까지 하다. 조명은 24시간 죄수를 비춘다. 그럼으로써 죄수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 자기 검열의 단계는 죄수의 온전한 통제를 의미한다. 파놉티콘에서 수감자는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스스로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이 파놉티콘을 제안했던 야심가는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다. 최소의 효율로 최대의 이익을 환수하길 원하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파놉티콘은 비인간적이라는 질타를 받을지언정, 이상적인 감옥 모델이다.

 


원형 감옥, 파놉티콘의 설계도

 

굳이 미셀 푸코의 진단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는 이미 거대한 파놉티콘이다.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능케 하고 있다. 휴대폰 위치 추적, GPS를 통한 내비게이션이나 신용카드 등은 효율적이나 억압적이다. 개인에게 편리한 삶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며, 그 기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이제 권력-그것이 정치자본의 거대 권력이든, 생활 주변의 소소한 미시권력이든-은 모든 개인의 정보를 소유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화, 현대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한국에서 이 경향은 좀더 노골적이며, 제도화되었다. 출생 신고와 더불어 갖게 되는 고유의 주민등록번호와 주민등록증 발급 시 찍혀 저장되는 지문은 국민을 보호관리의 대상으로 확인하는 날인임과 동시에 국민을 잠재적 범법자로 통제관리하려는 주홍글씨에 다름 아니다. (더불어 이에 대한 개인들의 불감증은 심화된다)

 

윈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1984년의 오세아니아 역시 파놉티콘이다. 텔레스크린과 곳곳에 설치된 마이크, 그리고 사상 경찰 헬기가 시민을 감시하는 거대한 원형 감옥. 다만 조지 오웰이 폭로한 영사(영국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의 변종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신자본주의(신자유주의)일 뿐-사실 이 시대는 자본 자체가 권력이므로 자본과 권력의 결탁이란 표현이 적절한지 나로선 의문이다.

한편 1984의 디스토피아가 지금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왜냐하면 오세아니아의 프롤에게 현재에 대한 자각과 개혁에 대한 뜨거운 가슴이 없듯이 또 다른 오세아니아에 사는 우리 프롤들에게 과연 그것이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본 질서가 고착심화되는 이 불균형의 시대에 우리 프롤의 자각은 어떤 형상인가. 허균식으로 표현하자면 현대는 호민은 없고 원민항민이 원자화되어 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조지 오웰이 그린 디스토피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도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바로 그것일지도.

 

책 속의 책 <과두 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와 부록 <신어의 원리>는 이 소설의 이론적 토대다. 전자는 권력 투쟁과 계급으로 역사와 지배층의 통제 원리 조망하며, 후자는 언어와 사고의 간섭 작용에 대해 생각거리를 준다. 매우 재미있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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