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츠나가 노부흐미, 작은 소리로 아들을 위대하게 키우는 법(이수경 역, 21세기북스, 2007) 읽다.

 


고추 만능론께 부친다

 

고추 있는 작가가

고추 없는 엄마에게

고추 있는 아들들의 특성을 열거한다.

역시 고추가 있는 나는

고추 있는 작가의 충고를 의심한다.

 

왜냐하면 고추 있는 작가는

고추 있는 아들들의 근원은

고추의 힘이며

고추 있는 아들들은

이 고추의 힘으로 재미를 찾고, 추구하며, 발견하며,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므로 고추는

고추 있는 아들들의 창조적 근원이라며

고추 만능론을 펴는데,

고추 있는 내가 생각했을 때

재미를 찾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얻고,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것은

고추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추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추가 재미를 찾을 수는 없다.

 

고추 있는 작가의 논리라면

고추 없는 여자 아이들은

고추가 없기 때문에

재미 찾는 데 서투르며, 그 재미를 추구하거나 발견하는 데

고추 있는 남자 아이들보다 더 힘들어 하며

그러므로 따분하고 건조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인가.

고추 없는 엄마와

고추 없는 여자 아이들이 분통하다.

, 주여, 제게도 고추를, 제게도 자비를자비를자비를.

고추 없는 엄마와 여자 아이들은

정화수를 떠 놓고 간절히 기구하며

고추 없이 태어난 자신들의 숙명적 원죄에 대해

탄식하고, 반성하며, 원통하고, 절망해야 할 것인가.

과연 고추는 그렇게나 위대한 것인가.

, 나의 고추님이시여.

 

되려 고추 있는 작가는 분개한다.

고추 없는 엄마들이

고추 있는 아들들의

고추의 힘을 잘 알지 못하므로

이 고추의 힘을 산만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매도하는 데

이는 매우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산만한 고추 있는 아들은

아니 고추 있는 산만한 아들은

고추가 있기 때문에 산만한 것이므로

고추 있는 아이들을 산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위대한 고추의 힘을 잘 모르는 매우 어리석은 육아이므로

오히려 고추 있는 아들들의 산만한 태도를

건강하고 남자답다고 기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쯤에서 고추 없는 여자 아이들은

고추가 없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은 것이므로

고추 없는 것에 신께 감사와 축원의 제를 올려야 할 것이다)

덧붙여

고추 있는 작가는 말한다.

화장실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 고추 있는

아들들에게

좌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라고 하는 것은 고추 있는

아들들의

호기심과 창조성의 원천을 제어하는 매우 큰 실수라고.

(이쯤에서 나는

좌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는 고추 있는 나는 반성한다)

고추 있는 작가는 눈물로 호소한다.

고추 있는 아들들이 갖고 있는

고추의 힘을 자라게 해 달라고.

고추 없는 엄마들과 여선생들은 각성해야 한다고.

고추의 힘,

그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를 지켜줘야 한다고.

, 아멘.

젠장.

 

 

분할의 오류는 전제(집단 값)가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부분 값)이 참이 아닐 수 있음을 무시해서 발생한 오류다. 예를 들어, ‘<무한도전>이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므로 <무한도전>의 유닛들 역시 최고의 예능인이다라는 명제는 분할의 오류다. 이 명제는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얼개와 짜임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평균으로서의 성차다. 그러므로 한 개체를 대할 때 우리는 그를 평균으로서의 남성(혹은 여성)과 개별체로서의 대상을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이라거나(이 말도 안 되는 혈액형 성격법이 맞다고 하더라도), 성별에 따른 특성 구별 짓기는 분할의 오류가 잠입해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이다.

육아가 아닌 교육에 관해 필자의 의견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단기 성적에 급급해하지 않을 것, 학원을 맹신하지 말 것, 모국어 실력을 먼저 키울 것 등은 지각 있는 부모라면 대체로 동의할 만 하다. 유통 기한 지난 라디오 뉴스처럼 특별하지 않아서 지루하긴 하지만. 그러나 제1내 아들의 고추의 힘을 살려라편은 곤혹, 아니 곤욕스럽다. 파격적이나 기준이 없다. 거칠고 편협하다. 순환 논증의 딜레마에 빠진 다람쥐처럼 어설프며, 한편으론 애잔하다.

 

국어는 조사와 보조동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글맛이 조금씩 달라진다(107).’는 문장은 잘못이다. 국어의 보조동사는 본동사를 통해서만 존립하는 기생체다. 책에 쓰인 예문에는 보조동사가 없다. 본동사만 존재한다. 예문을 통해 추론하건대 이 문장은 국어는 격조사와 보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글맛이 조금씩 달라진다로 수정해야 옳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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