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1985, 재판 1995) 읽다.


출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중고 시절에 공부하는 문학 교육이 되려 반문학적이 아닌가 하는.

이 땅의 문학 교육은 작품을 감상하거나 음미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정형화유형화시켜 틀 속에 우겨 넣는다. 규격화시키고 치수를 재며 마름질하여 암기한다.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작가의 작품 경향, 소재의 상징적 의미, 배경의 기능, 문체상 특징을 알고 있다. 읽지 않고도 아는 작품 경향, 갈등과 아이러니, 문체와 주제. , 편리한 글 읽기여. 아멘.

나 역시 주입식 교육의 사생아로서 유치환 = 생명파, 김상용 = 전원파, 이상화 = 백조의 등식을 머릿속 폴더에 저장해 놓고 있지만,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분류해서 암기하고, 재단해서 암기한다. 까닭은 우리가 객관식 선택지에 맞춤식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내 서평이 상당히 도식적인 이유가 제도권 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런 풍토에서 자란 아이가 자발적능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한다고? 글쎄, 요원한 꿈이 아닐까. 5지 선다의 객관식 문항으로 평가하는 대입 정책이 아닌, 독서와 논술로 수학 능력을 판단하는 입시 정책을 바라는 이유다.

이는 서정시로 시종(始終)한 문학 교과서를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제도권 내의 문학 교육이 갖는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의 다양한 스팩트럼을 제시하지 못한, 곧 구습에 젖은 문학 교과서는 21세기에는 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無等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 산, 사랑의 산, 침묵의

, 함성의 산, 증인의 산, 죽음의 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황지우의 초기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시집은 사실 두벌읽기다. 시집 읽는 척 재려고 가방에 넣고 다니다 술강아지가 돼서 잃어버렸다. 장정일의 것과 함께. 그러던 것을 몇 해 전 게 눈 속의 연꽃을 읽다 궁금해져서, 아니 어떤 의무감으로, 다시 구입한 것을 지금 읽는다.

이 시집은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게 눈 속의 연꽃의 가교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서시라 할 수 있는 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와 마지막 시 출가하는 새는 각각 그 앞 시집과 뒷 시집의 서사와 연계된다. 말하자면 앞의 것이 해체시의 연속이라면, 뒤는 견성(見性)의 출발을 알리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위 인용한 시는 황지우의 해체시적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황지우의 말을 빌리자면 시는 가 아니라 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여기서 란 기존 시의 문법 질서를 말한다. 절제하고 시어를 조탁하며 함축하며 수사적 기교로 무장한 단단한 언어들. 그 언어가 빚은 고상순결순수한 것들이 기존 시를 이루는 늙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황지우는 이런 시의 정형화된 질서 체계를 비튼다. 욕설을 지껄이거나, 음표를 따오거나, 벽보나 벽지에 담긴 광고문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신문 기사의 내용을 오려 붙이는 시작법이 바로 그것이다. 예의 90년대 전염병처럼 창궐한 해체주의, 그 시초가 바로 황지우의 이런 탈 장르화된 전위적 시 형식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위 인용시 無等은 황지우의 창조라기보다는 한시 기법을 차용한 것에 가깝다. 얼마 전에 알게 됐는데, 1자에서 10자까지 한자의 글자수를 늘려가는 보탑시(寶塔詩)라는 한시의 한 형태가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황지우는 이 한시의 형식을 패러디한 것이다)

 

나의, 문학, 행위는 답이 아니라, 물음이, .

, 없는 질문이, 며 덧없는, , 문이, .

, 없는 의혹이, 며 회의이며…… 끝없는의혹이며회의일까?

- 버라이어티 쇼, 1984

 

어쨌든 독자는 호강이다. 상호텍스트성이나 혼성모방 따위의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를 모른다 해도 이게 시야?’라는 호기심을 졸졸 따라가다 보면,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미는 있다. 페이지를 차곡차곡 넘기면서, 최초의 의문(시의 가능성 여부)왜 시를 이렇게 쓰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변성한다. 그 질문은 독자에게 시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이것은 의도적인 시작법이다.

마치 현대 연극 흐름이 관객의 몰입을 중시하는 사실주의 극에서 비판적 거리두기를 핵심으로 하는 서사극으로 바뀌었듯이, 황지우 등의 초기 포스트모더니즘 시인들의 시작법도 독자의 비판적 거리두기를 중요한 기저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시인의 의도적 장광설은 독자에게 탈서정과 비판적 조망을 요구한다. 다분히 위악적으로 보이는 이런 불친절하고, 생소한 시들은 독자에게 답이 아니라 물음을 재기하며, ‘의혹이며 회의를 강제한다.

 

이젠 굶는 사람은 없잖아요. 외채는 할 수 없어요. 1인당 70만 원이라메요. 몇 사람이라도 집중적으로 배부르게 해야죠. 그게 성장의 총량을 명시적으로 늘리는 방법이죠. 그리고 1천불 소득의 연자매를 끝없이 돌게 해요. 미래에의 환상은 현재의 환멸을 상쇄하죠. 잔뜩 불어넣으세요.

- , 이게 뭐냐구요

이번 대형금융부정사건은 정부 고위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검찰총장이 발표한 이상, 이번 대형금융부정사건은 정부 고위층과 아무런 관련이 없

?

이런 부호 하나 찍을 줄 모르는 신문이 新聞이냐? 官報?

- 버라이어티 쇼, 1984

 

이와 같은 해체시의 특징들이 세기말적 불안감에서 비롯했는지, 아니면 80년대 군사 독재라는 엄혹한 시대 현실에서 촉발됐는지 그 이유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이유야 어쨌든 황지우의 문학적 시사점은 언론마저 군사정권의 나팔수가 된 그 엄동혹한의 시절에 김지하나 김남주, 박노해의 치떨림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형식을 제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출가하러 떠났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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