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 1998) 읽다.



현실의 부조리는 형식의 부조리를 낳는다

 

아껴 읽고 싶은 책이 있다.

가령 소주는 맥주에 비해 아껴 마셔야 하는 술이다. 맥주가 벌컥벌컥의 목 넘김이라면, 소주는 알싸한미각의 마취다. 맥주와 같은 술은 아껴 먹는 술이 아니다. 목울대를 통과하는 알코올의 볼록불룩한 움직임은 건강하며, 생동감 있다. 그것은 동적이며 속도를 수반한다. 맥주는 경쾌하며 청량하다. 반면 소주는 축축한 술이다. 소주는 그 농축된 밀도만큼 술잔을 비우는 주기가 길어야 한다. 소주 한잔과 한잔 사이의 인터벌은 호흡이 길며, 긴 호흡 사이에는 여백이 생긴다. 그 여백에서 의식은 즐거운 무장 해제를 당한다. (그러므로 소주를 맥주처럼 들이키는 자는 폭군이며, 맥주를 소주처럼 홀짝이는 자는 쫌생이다.)

소설이 맥주와 같다면 시는 소주다. 그렇다면 황지우는 소주와 같다. 아니다. 소주는 김사인이다. 황지우는 소주라기보다는 데낄라다. 이국적이며, 휘발하는 증류의 언어들은 마취적이며 몽환적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 무슨 비유가 필요하겠는가. 애초부터 황지우는 석고로 고착화된 상()이 아닌데. 모두 부질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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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의 해체시는 시대로부터 기인한다. 광폭한 시대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시의 해체를 선언한 시인은 현재, 혼란스럽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항전으로서의 시는 분노와 적개심을 동력으로 삼는다. 물론 이 분노라는 감정은 적들의 폭압에 비례하여 파생된다. 예를 들어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이육사)’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김수영)’나 그리고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전대협 진군가)는 모두 핍박과 압박으로부터 저항 의지와 혁명이 비롯함을 은유한다. 즉 적들의 핍박은 인간에게 현재 상태의 자각을 일깨우며, ‘분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하는데, 이 적개심이 활활 타오르면 혁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현실은 아직도 개좆같은 시대인데 그 보여야 할 적이 은폐, 엄폐, 복지부동해서 행방불명된 것이다. -. 재빠른 녀석들. 적들이 보여야 시비를 걸든,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애원을 하든, ‘쇼부를 치든 할 텐데 이 시대에는 적들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이는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할 만큼 아리송하기만했다고 지적한 최인훈의 오마주일까.

 

인간은 인과로 사유한다.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인과율에 따라 우리는 불평을 하든, 저항을 하든지 간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결과의 모순은 지금’,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결과의 원인을 찾기 힘든 시대에 인간의 의식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의식은 혼란스럽고 막연하다. 부조리한 현실은 형식의 부조리를 낳는다.

 

그러므로 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 석고 두개골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부조리극 형태의 시의 발생 근원은 모두 혼란스러운 시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에서 플롯이나 인과적 구성, 스토리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움 그 자체를 혼란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일지 않을까. 의식을 무장 해제시켜 무의식을 독백을 듣는 것 역시 하나의 힐링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

- 결국 이 말은, , 혼란스럽고, 뒤죽박, 죽인 이 감, 상문에 대한, 하나의 변, 명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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