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공경희 역, 민음사, 2001) 읽다.



퇴행하는 성장통

 

인간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사고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인데, 세계를 조망하고 채집하는 인식과 경험의 렌즈는 저마다 다르게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각각의 이 렌즈들의 수만큼 미분화되어 있는데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성인과 미성인의 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겨 먹은 대로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성인이 아닐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여 바들바들 떨고 있을 희미한 초상화를 생각한다.

 

물론 내게도 그 시기가 있었다.

혹자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하고, 2의 반항기라고도 하는 그 통과점의 시기. 세상은 부조리한 미로, 나는 그 미로에 갇힌 인신공희의 제물. 미로의 어딘가에서 벽을 부수려 주먹질을 하기도 했고, 나를 잡아먹으러 올 가상의 미노타우로스를 두려워하며 바들바들 떨거나, 미로의 암호문을 해독하려 골몰하거나, 더러운 길에 훌쩍이며 울기도 했다. 세상을 원망했고, 나를 세상에 투기해버린 부모님을 원망했으며, 매일매일 끔찍한 상상을 하는 지독히 위선적이거나 또는 위악적인 나를 원망했다.

이제는 성장통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통과점들. 부끄럽고 불쌍한 내 통과점들. 주인공 홀든의 위선과 위악은 그래서 나와 닮았다. 아니 그 통과점을 지나친 우리 모두와 닮았을 수도 있겠지.

 

홀든의 퇴학이나 친구들과의 불화나 공원의 오리에 대한 뜬금없는 집착은 모두 유아적 퇴행 증상이다.

그는 소년과 성인의 중간계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편입될 수 없는 방향상실 진행중이다.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 제인과 호텔의 창녀는 각각 소년계와 성인계를 상징하는 데, 홀든은 제인에게 전화를 걸 수도, 창녀를 취하지도 못한다. 이 중간계에서 홀든은 줄곧 담배를 피워대거나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구순(口脣)적 집착이다. 결국 홀든은 자신의 유일한 대화 상대인 여동생 피비를 찾는다. 피비는 홀든이 퇴행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피비는 홀든의 투사물이리라.

그러므로 파수꾼우화에서 홀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파수꾼이 아니라 호밑밭에서 마음껏 뛰노는 어린이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선생님도, 부모님도 홀든에겐 파수꾼이 되어 주지 못했다. 파수꾼이 부재한 현실의 홀든은 스스로 파수꾼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아니 피비는 이미 홀든의 투사이므로 피비를 지켜주는 것이 곧 홀든 자신의 내밀한 자아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 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린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229~230)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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