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오전 7시. 산책

 

아침, 눈을 뜬다.

7시에 울리도록 알람을 맞춰놨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6시 30분.

별로 그럴 일은 없긴 하지만 간혹 알람 보다 일찍 일어나면 뿌듯하다.

게으르게 뭉그적댄다. 이 나른함이 나는 좋다.

 

간간이 새 소리가 들린다.

창밖으로 안개가 산을 타고 넘는 게 보인다.

비는 이미 멎어 있었다.

고적하다.

 

추리닝을 입고 등산 재킷을 걸친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책을 한다. 산책하며 태우는 담배가 참 맛있다.

커피 한잔 마신다. 벽소샘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 세수 한다.

시원하다. 힘껏 호흡을 들이마시니, 간장(肝腸)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각주:1]

 

원래의 일정은 세석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하는 것이었는데 계획과 많이 어긋났다. 조정이 필요하다.

벽소령부터 세석까지의 거리는 2시간. 출발 시각의 차이 3시간. 당초 계획보다 5시간이 늦어졌다.

열심히 걸어 천왕봉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대원사로의 하산은 무리일 것이다.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스틱을 바투 쥔다.

시각은 오전 9시 10분.

 

오전 10시. 선비샘에서

    

걸음을 재게 걷는다. 잘 몰랐는데 벽소령에서 선비샘까지 걷는 처음 30분은 힘들다.

숨이 깔딱깔딱 한다. 안경에 김이 서린다. 안경원숭이는 음정으로 편히 내려갈 걸, 후회도 조금 한다.

걷는다, 깔딱깔딱. 걷는다, 깔딱깔딱.

 

이 길도 곳곳에 곰 출현 주의 경고문이 걸려 있다.

비는 이미 완전히 멎어 있다. 안개가 자욱하다.

이런 날이 산행하기엔 가장 좋은 날씨이리라. 완만한 오름길에 들어서니 땀도 별로 안 난다. 머리 나쁜 벌새처럼 나는 기분이 좋다.

나뭇가지를 살짝 건드릴 때마다 나뭇잎에 고인 빗물과 이슬이 떨어진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스틱을 들어 나뭇가지를 톡톡 건드리며 걷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지리산의 이슬, 촉촉한, 아침의, 이슬.

이거, 괜찮다. 이런 경험을 해본 산님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 하니 비밀 하나를 얻은 듯 뿌듯하다.

 

이 길은 분명 내가 첫 손님일 것이다. 오늘만은 내가 지리산 처녀림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설령 곰이 나타난다 해도 어찌어찌 될 것 같다. 안경원숭이는 곰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선비샘 도착.

어제 노고단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았고, 임걸령의 흙물은 한 모금 마시고 버렸다.

연하천과 벽소령의 샘터는 비 때문에 샘물이 넘쳐 샘물이라기보다는 아예 빗물에 가까웠다.

산 정상에서만 마실 수 있는,

지리산의,

땀 흘린 후 마시는,

그 청량함. 나는 반쯤 황홀하다.

 

지도를 꺼낸다.

세석을 들렀다 갈 것인가 지나치고 갈 것인가 결정을 해야 한다.

세석 산장의 샘물은 밑으로 한참 내려가야 되고,

조금 지친 나는 담배를 태우고 싶을 테고,

담배를 피우면 커피도 마셔야 하고,

그러자면 짐을 풀어야 하고,

결국 시간이 상당히 지체될 것이다.

세석은 담배와 커피로 날 유혹했지만 나는 냉철한 안경원숭이라 이를 무시하기로 한다. 꺅꺅-. 나는 때로 냉철하며 비정하다.

 

장터목까지는 최소 3시간 30분 이상이 걸릴테니 식수를 넉넉히 떠야 한다.

가지고 있는 물통을 다 꺼내 물을 받는다. 안경에 묻은 땀을 닦는다.

 

오전 11시 40분.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

 

- 칠선봉 전의 봉우리, 덕평봉(?)

맑은 날엔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까지 '폴짝' 뛰어 넘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오늘 같은 날은 '풀쩍' 뛰어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안개가 많거나 비 오는 날은 봉우리 사이로 뛰는 것을 조심하라는 산행 세칙을 본 적이 있다.

 

이번 산행에 첫 산님을 만난다.

이 분은 어제 장터목 대피소에서 주무시고 새벽 일찍 출발하셨다 한다. 장터목은 워낙 사람이 많이 오가는 산장이니 대피소 측에서 하산 종용이 어려웠을 법도 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장터목 거쳐 천왕봉 보고 내려갈 것이라 하니, 그 분 말씀이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라며 천천히 걸어도 된단다.[각주:2] 그리고선 뒤에 아줌마 네 분이 오실 테니 안부를 전해 달라 하신다.

미소로 답하고 능선을 오른다.

 

때론 숨이 벅차다, 깔딱깔딱. 때론 걸음이 경쾌하다, 경쾌경쾌.

 

- 안개 낀, 기암괴석, 칠선봉.

 

오랜만에 폭삭폭삭한 흙길을 걷는다. 어제 종일 비가 내렸는데도 신기하게 바닥은 폭삭하다. 지리산은 종주 구간 내내 돌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흙길을 걷는 것보다 힘든 게 사실이다. 가끔 만나는 소담한 흙길은 정겹다.

 

칠선봉에서 두 번째 산님을 만난다.

땀을 무척 많이 흘리시는 이 분, 새벽 3시 30분에 백무동에서, 혼자 올라오셨다 한다. 시간을 짐작해 보니 한신 계곡이 아니라 장터목 쪽으로 올라와 세석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배낭을 메니 아주머니 네 분이 오신다.

장터목 대피소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길잡이를 하고 아주머니 네 분이 뒤를 따르신다.

안부를 전해 드리니, 잘생긴, 젊은이, 멋있는 등의 덕담을 해주신다.

 

- 영신봉. 완만한 능선이다.

 

젊고 잘생긴데다 멋있기까지 한 나는 영신봉에 도착한다.

여기는 봉이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다. 평범한 산길에 영신봉이라는 표지판이 있어 여기가 영신봉인지 짐작할 뿐이다.

 

밑으로 세석 대피소가 보인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내가 잤어야 할 곳.

 

오후 12시 20분. 촛대봉

 

세석을 지난다.

이태의『남부군』에서 이태는 세석평전을 잔돌고원이라 부른다.

 

이번 산행은 여러 모로 미흡한 것이 많았다.

나는 장갑 및 시계[각주:3]도 준비 못했고, 방울 토마토며 어슨썰기한 오이, 연양갱과 계란 등속도 냉장고에 넣어둔 채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과도한 흡연과 음주로 몸 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으며, 무릎과 허벅지도 정상은 아니었다.

산에서 곰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도 준비 못한 것도, 이미 반성했지만, 내 불찰이다.

 

다만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마음만은 다잡고 왔는데 그 중 이태의『남부군』은 도움이 됐다.

어제,

종일 비를 맞고 걷는 와중에도 낙관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빨치산에 비해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죽지 않아, 나는 죽지 않아.

스파르타-. 니노 막시무스 카이저 쏘제 쏘냐도르 앤 스파르타-.

 

촛대봉을 오른다.

예상 외로 힘들다.

산을 많이 오르진 않아 잘 모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상식대로라면 위를 쳐다보지 않고 걸어야 지치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다.

목표를 확인하면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얼마쯤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보고 또 걸어야 할 봉우리를 쳐다보면 금방 지친다.

나는 이게 은유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살면서 너무 자주 뒤를 돌아보거나 시선을 놓쳐 넘어지기 일쑤였다.

 

촛대봉에서 점심 식사로 미니 초코바와 소시지를 먹는다.

남은 식량은 햇반 1/2개, 즉석 육개장, 누룽지 조금과 즉석 카레, 그리고 다량의 물.

시간이 된다면 장터목에서 누룽지를 넣고 즉석 육개장을 끓여 먹으면 된다.

 

인적은 없고, 바람을 따라 안개가 산을 넘어간다.

 

오후 1시. 연하봉을 지나며

 

 

 - 연하봉 가는 길, 이국적이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한 세트같다.

 

지리산 종주의 가장 큰 매력은 봉우리 정상에서 보는 조망이 아닐까.

맑은 날,

숨소리를 거칠게 해서 올라간 그곳에 쾌한 바람이 불고, 거기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장관이다.

무척 힘든 산행에도 그 맛은 별미다.

그래서 지리산은 봉우리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경으로 기억된다.

 

이번 산행의 날씨는 무척 안 좋았기 때문에 산을 조망할 기회가 단 한번도 없었다.

지금,

연하봉 가는 길,

처음으로 바라본 원경(遠景).

말을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다.

언어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흥준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 지리산. 아아, 지리산. 아, 지리산. 아아….

 

- 연하봉 가는 길, 여길 지나는 산님들이라면 누구나 찍는 고사목을 나도 찍는다.

 

연하봉, 안개가 사는 봉우리란 뜻인가.

연하봉 가는 길은 안개가 덜해 눈이 즐겁다. 사진을 찍는 여유도 부린다.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에 가는 내내 나는 변명거리를 생각해야 했다.

남은 시간과 내 체력에 비춰볼 때 천왕봉에 오르는 것은 힘들 것이다, 여행에 꼭 마침표를 찍어야 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천왕봉은 이미 두 번 올랐으니 가서 사진 한 장 찍는다고 무에 새로울 것이 있겠는가, 괜히 무리하게 산행을 하진 말자, 나는 극기훈련 온 것이 아니잖은가,

요수(樂水)하는 산님들은 말하지 않던가 - 산은 즐기기 위한 것이지, 깃발을 꽂아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고.

 

눈치챘겠지만 변명과 아집과 얍삽과 자기 합리화는 내 특기다.

그렇다. 나는 장터목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천왕봉에 오르길 포기하고 있었다.

첫 번째 탈출로, 벽소령에서 음정.

두 번째 탈출로, 세석에서 거림.

세 번째 탈출로, 장터목에서 중산리.

나는 이미 세 번째 탈출로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장터목으로 걷고 있었다.

 

오후 2시. 장터목.

 

- 장터목 대피소, 역시 사람이 없다.

겨울이라면 모를까, 사람이 북적대지 않는 장터목ㅡ 나는 처음 봤다.

 

장터목 도착. 역시 한산하다.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있으니 4명의 산님이 내려오신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오르고 내려오는 길이라 한다.

 

젊은, 이 4명의 청년들의 웃음 소리는 숨김 없다.

이들은 어제 새벽 5시에 산행을 시작하려 했는데, 중산리에서 산행 통제, 민박으로 1박을 했다 한다.

노고단에서부터 비 맞고 걸어왔다 하니 활짝 웃어주며 대단하다 한다.

이 웃음에 거짓이 없음을 나는 안다.

 

이들은 칼바위 근처에서 곰을 봤다고, 산길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약 5m 거리 오른편으로, 시커먼, 커다란 짐승이 보여 도망쳐 올랐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들은 그게 곰이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곰 대처법을 숙지하고 산에 올랐으리라. 나도 어제의 음산한 숲길이 생각나 등골이 오싹, 하산길을 걱정하고 있는데, 듣고 있던 장터목 직원분께서 말씀하신다. 그거 멧돼지예요, 지리산 동쪽 방면은 곰이 잘 나타나지 않아요.

처음 만난 우리는 모두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웃으며 나는 안심한다.

멧돼지 정도면….

훗훗.

 

장터목에서의 하산길은 크게 세 갈래다.

천왕봉을 거쳐 하산하는 첫 번째 길은 시간상으로 무리다. 오전에 너무 늦게 출발한 까닭이다.

백무동 쪽으로 내려가면 동서울 터미널까지 바로 가는 차가 늦은 6시 30분까지 있을 테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두루치기에 소주 한 잔할 여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무동 하산길은 이미 두 번 해봤기 때문에 중산리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첫 종주 때 중산리 쪽으로 하산하며 계곡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돗자리 깔고 누워 잔 적이 있다.

나는 중산리 방향을 눈으로 짐작해 본다. 안개 때문에 산 밑은 잘 보이지 않는다.

 

중산리 하산길은 2시간 반 정도면 충분하다고 대피소 직원분께서 말씀해주신다.

빨리 걸으면 1시간 반. 보통이면 2시간. 천천히 걸으면 2시간 반이라 한다.[각주:4] 지금 시각은 2시 정각. 누룽지를 넣은 즉석 육개장은 10분이면 끓여 먹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아주 애매하게 부족하다. 진주에서 서울의 위성 도시인 우리 집까지 가는 버스가 6시 30분에 있다. 그 버스를 타려면 최소 5시 정도에는 중산리에 도착해야 한다. 잘만 내려가면 지리산 자락에서 늦은 점심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등산화의 끈을 단단히 묶고 마지막 식수를 채운다.

중산리에서 올라오는 산님들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이제, 하산, 하산이다.

 

오후 4시 30분. 하산, 산채 비빔밥과 막걸리.

 

- 중산리 하산길, 1/3 지점의 유림 폭포.

허접하게 찍혔다. 실제로 보면 굉장히 예쁘다. 자비를…, 자비를.

 

하산이다.

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발 밑으로 물이 흐른다. 조심해야 한다.

스틱을 꾹꾹 눌러 발 디딜 곳을 확인한다. 넘어지면 낭패다. 스틱을 이용해 계곡을 내려오니 흡사 내가 영화에 나오는 네 발 거미로봇같다. 어쨌든 나는 꽤 열심히 걷는다. 등에 땀이 촉촉이 밴다.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시간이 부족한 나는 무시하고 걷는다. 어쩐지 좀 미안하다. 멧돼지인지, 곰인지, 그는 무안했으리라.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놀라며, 무서워해주기로, 악악, 소리지르며, 도망가야지 생각한다. 

 

무릎이 많이 아플까 걱정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없다. 산행 시작, 휴식 중간 마다 뿌린 스프레이 물파스 덕분이리라. 무릎 보호대 덕분이리라. 스틱 덕분이리라.

오히려 무릎 보다는 등산화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벽소령에서 확인했을 때 등산화 밑바닥이 거의 너덜너덜해진 걸 봤다. 내려갈 때까지 등산화가 버텨주길 빈다.[각주:5]

 

안경에 습기가 찬다.

몸에서 나는 열과 찬 공기의 온도 차, 그리고 계곡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뒤섞여 안경이 뽀얗다.

안경을 닦으니 한결 낫다. 담고 싶은 풍경이 여러 곳 있었지만 애써 무시한다.

나는 걷는다. 네 발 거미로봇은 꽤 빠르다. 척, 척, 척, 척. 나는 걷는다.

 

산을 내려오니 4시 30분. 2시간 30분 만에 도착했다.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장하다, 거미로봇.

버스는 5시 5분에 있다 한다. 식당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도보로 15분이라 한다. 20분의 시간이 있다.

 

   

 - 막걸리, 그리고 산채 비빔밥. 

 

등산로 바로 밑 식당에 들어가 산채 비빔밥과 막걸리 반 되를 주문한다.

옆 식당에도 몇 명의 산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건배를 외치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원래 막걸리를 마시지 않지만 산에서는 예외다. 산을 내려와 막걸리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털 벗은 원숭이[각주:6] 같다. 나는 사람으로 환생했다.

행복하다. 이렇듯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사람이 분명하다.

깍두기와 물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신다.

지리산은 지척이다.

담배를 태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아득하다.

지리산은 지척이다.

   

나오며

 

식사를 한 곳에서 중산리 버스 정류장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라 한다.

내념(內念)에 빠르게 걸으면 10분이면 도착하리라, 4시 52분, 출발. 5시 5분까지는 13분이 남았다.

빠르게 걷는다.

신발끈이 말썽이다.

산을 내려와 긴장을 풀 겸 좀 헐겁게 맸더니 자꾸만 풀린다. 인가의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경계하며 바라본다.

 

마음은 조급하고 몸은 굼뜬다.

농가의 닭들이 한가하게 모이를 먹고 있다.

 

두 굽이 밑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진주행으로 짐작되는 버스가 들어온다. 뛴다. 한 굽이. 학학. 뛴다. 두 굽이. 헉헉.

출발하려는 버스를 세운다. 세이프.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 5시 20분.

고속버스 터미널이 어디냐 묻자 택시를 타야 한단다. 택시를 탄다. 5분 거리, 삼천원.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표를 구하고 화장실에서 바지를 갈아 입는다.

편의점에서 신문 하나와 옥수수 음료를 산다.

6시 30분. 세이프.

 

출발 - 2009.07.06. 늦은 9:00 

등산 -              07. 이른 5:00 

하산 -              08. 늦은 4:30

도착 -              08. 늦은 10:30

비. 산행 통제. 3끼의 식사. 두 팩의 소주. 담배 한 갑. 산행 길이 33.4km. 

주의 - 지리산엔 곰이 많으니 곰 대처법을 숙지할 필요 있음. <끝>



  

  1. [/footnote]

     

    이른 아침 산장을 거닐다 보니

    맑은 것은 맑고,

    푸른 것은 푸르고,

    고요한 것은 고요하고,

    깨끗한 것은 깨끗하다.

     

     

     - 산책하며 찍은 벽소령의 아침.

    들어보면 새 소리가 들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계곡물 소리도 들린다.

    소머즈의 귀로 들으면 꽃 피는 소리조차 들린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 벽소령에서 놀다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오늘도 산님들이 적을 테니 여기 지리산은 한가할 것이다. 벽소령 책방에서 책을 읽거나 살쾡이처럼 계곡으로 산보를 가거나.

    굳이 종주해야 할 이유는 없다.

    뭔가를 성취하겠다는 것 자체가 집착 아니겠는가.

    사진을 찍거나 기록하지 않으면 추억(혹은 기억하고 싶은 그 무엇)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우린 맹목적으로 무엇인가로 흔적을 남기려고만 하지 않는가.

    색즉시공(色卽是空), 어디선가 부처의 온화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다.

    똑, 똑, 똑, 똑, 또르르르륵-. 목탁 두드리는 소리도 들린다.

    목어(木魚)는 언제쯤 헤엄칠 수 있을까.

    집착을 버려야 한다, 고 생각하며 나는 값이 싼, 질 안 좋은 사진이 나오는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리고 있다. 야옹. 야옹.

     

    벽소령 관리 직원분께 여쭈니 산행 통제가 해제되었다는 얘기는 아직 없다 한다. 라면과 밥을 먹는다. 어제 아껴둔 소주를 마저 마셔 버린다.

     

    벽소령 갈림길에 나는 서 있다.

    결정 내려야 한다. 내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등 뒤로 서(西)쪽은 연하천, 어제 빗길을 뚫고 지나온 곳. 나는 이미 이곳은 등지고 서 있다.

    눈 앞으로 보이는, 세석 가는 길의 동(東)쪽은 어제 새벽 5시 이후로 봉인되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오른쪽으로는 계곡길이다. 한 시간 반 정도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나올 것이고 그 길은 의신 마을로 통한다. 기억이 맞다면 의신은 남부군 총수 이현상이 사살된 곳이다. 좀더 내려가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에 있는 화개장터가 나온다. 예전에 한번 이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기 때문에 이 길 역시 제외다.

    사방위 중 마지막 북(北)쪽은 음정으로의 하산길이다. 애초 산행 계획을 잡을 때 첫 번째 탈출로로 생각한 곳이다. 가장 쉬운 하산길이고 아직 걷지 않은 길이다. 

    는 결정을 내린다,

    쉼표를 찍은 것 뿐이라고.

     

    오전 9시. 세석으로.

       

    - 봉인 풀린, 세석 가는 길

     

    대피소에 들어가니 웬걸 산행 통제가 해제되었다 한다.

    이 말은 세석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HA! 비장했던 나는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며 들떠 있다.

    산책이나 하며 놀자는 아까의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 먹고, 짐을 꾸리는 손이 분주하다.

    날렵한 바다거북이처럼 나는 분주하다. 바다거북이, 나는 의외로 날렵하다. 의외로 날렵한 나는, 내가 날렵한 바다거북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 젖었던 옷이 뽀송뽀송, 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말랐다.

    새 양말을 꺼내 신고 손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 맨다. 모자를 쓰고 스틱을 쥔다. 등산화가 아직 축축했으나 이 정도면 황송하다. 직원분께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나선다.[footnote]원래는 등산객에게 모포 두 장을 제공하는데, 어제 이 분은 모포를 넉 장이나 주셨다. 모포 부자인 나는 두 장은 겹쳐서 베개로 쓰고 한 장은 요로, 한 장은 이불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먹을 게 좀 있었으면 나눠주고 싶었으나 고작 육포 한 봉지밖에 못 드려서 죄송하다. 게다가 맛있는 코주부 육포도 아니고, 홈플러스 pb 상품, 한 봉지 2,900원 짜리. 죄송하다. 넙죽, 넙죽, 자비를…. [본문으로]

  2.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나의 느린 걸음으로 이 시간에, 천왕봉을 거쳐, 5시까지, 중산리로 하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천천히 경치 구경하며 걸었다면 나는 지리산의 원귀(寃鬼)가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누르면 빛이 나와 시간을 알 수 있는, 그리고 방수까지 되는 시계가 산행엔 필요하다. [본문으로]
  4. 대피소 직원분의 말씀은 틀렸다. 길이 미끄러워 조심하느라 늦기도 했겠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내려왔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내 걸음이 그리 느리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1시간 30분? 그게 사실이라면 직원분은 스파이더 맨일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5. 결국 집에 도착해 이 등산화는 폐기처분했다. 보급형 저가 등산화. 4년 신었으면 오래 신은 것이다. [본문으로]
  6.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 제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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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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