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열림원, 김난주 역, 1996) 읽다.


글쓰기란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다

 

하루키의 처녀작.

대한민국에서 팬덤이 형성된 몇 안 되는 외국 작가, 하루키. 웹을 보면 하루키 마니아들이 은근히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야 상실의 시대를 두 번 읽은 정도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등장 인물이나 배경, 줄거리가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1984는 몰라도 1Q84를 재밌게 읽는 고등학생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문장을 쓰는 작업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다.”

- 데릭 하트필드

 

서른 후반의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하루키의 첫 번째 소설집, 이 글의 주제는 사실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다. 소설은 1부터 40까지 일련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1에서 데릭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의 문장론을 소개하는 것과 40번에서 하트필드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루키의 치밀한 배치며, 상징이다. 하트필드는 하루키의 페르소나며, 하루키는 하트필드의 오마주인 셈. 말하자면 하루키는 하트필드라는 작가를 통해 자신이 쓰는, , 써야 할 문장에 대해 제시하였다.

그런데 왜 하루키는 글쓰기에 대해 주제소재라는 내용적 범주가 아니라 문장이라는 형식에 천착했을까. 이 부분, 하루키가 등단한 70년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탐구하면 좋겠으나 귀찮으니 패스. 다만 하트필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불모하다는 것은 결국 그런 뜻’(14)의 구절이 적절한 추론의 단서가 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계는 변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와 구성 질료들도 변한다. 내가 하루하루 싸우고 있는 이 세계는 한시도 제자리에서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싸우는 대상은 불모한 것이다. 하물며 소련의 해체(하트필드가 히틀러-제국주의-의 초상화를 들고 자살) 이후 세기말의 극심한 혼동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흔들림의 상황에서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랴. 그러므로 소설을 쓰의 출발점은 존재가 불확실한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얽는 형식에서부터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곧 문장 쓰기이며, 소설쓰기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내용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88일부터 시작해서 그해 826일에 끝나는 이야기든, 1224일에 일어나는 이야기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카페에서 와 마신 술이 맥주든, 소주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새로운 형식을 제시할 것. ‘---의 소설적 문법이 아니라, 갈등의 증폭과 해소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설령 언어 안에 갑작스레 만화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장에 대한 담론에서 새로운 것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의미 있으리라.

 

. 지금 출판되는 책은 문학사상에서 나온 양장본이나, 내가 읽은 책은 열림원에서 나온 5,000원짜리 96년 초판 1쇄라 이에 해당하는 책 표지 사진이 없어 아이폰으로 찍어 올림.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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