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집『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 지성, 2003)

 8개의 단편이 있다.

 

1

1.「낭만적 사랑과 사회」: 레이스가 달린 팬티를 입지 않는 ‘나’는 여러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지만 아직 순결만은 지키고 있다. 드디어 부유한 집 막내아들을 만나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첫날밤 ‘십계명’의 절차에 따라 그와 잔다. 아프다. 혈흔을 확인하려 이불을 들춘다. 혈흔이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뇐다.

2.「트렁크」: 성공한 커리어 우먼인 그녀는 자신의 소나타 승용차 트렁크에 아르바이트생 선미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한때 권이사의 정부였는데, 지금은 사장인 브랜든과 연애를 하고 있다. 그녀는 권이사를 불러, 시체를 함께 묻자고 말한다. 그는 그녀를 강간하고, 그녀가 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를 죽인다.

3.「소녀 시대」: 16살의 소녀인 ‘나’. 집은 강남. 아버지는 지방의 대학 교수. 공부는 반에서 4~5등. 아버지의 내연녀(그녀는 20살이다)를 만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부탁한다. 아버지의 아이를 떼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포르노 잡지의 사진을 찍거나, 유괴 사건을 모의하기도 한다.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4.「순수」: ‘나’의 첫번째 남편은 사고로 죽었다. 두 번째 남편은 중국계 혼혈이었는데 나는 나의 운전기사와 연애를 했고, 운전기사는 두 번째 남편을 죽였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배려심이 좋은, 세 번째 남편은 대학 교수였는데 벌거벗은 채로 그녀 딸에 의해 죽었다. 나는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가고 싶고, 뜨겁게 데운 코코아를 마시고 푹 자고 싶다.

5.「무궁화」: ‘너’와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며칠 째 연락이 없고, ‘너’의 생리는 거의 끝나간다.

6.「홈드라마」: 프롤로그 - 어느날 남자와 여자는 성병이 생긴 걸 발견한다. 홈드라마 - 그들은 5년 연애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기 위해 상견례를 했으고, 결혼식장을 잡고, 예단 준비를 한다. 그들은 신혼집 문제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남자는 북창동에 가고, 여자는 첫사랑을 만난다. 그들은 화해를 하고 결혼을 한다. 에필로그 - 그들은 각자에게 생긴 성병의 병명을 각자의 의사에게 전해 듣고 묵묵히 치료를 받았다. 영원히 혼자 간직할 비밀 하나쯤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7.「신식 키친」: 구청에서 일하며 여권 발매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다이어트를 시도하나 쉽지 않다. 동거를 하던 그가 떠나고, 그녀는 이사를 간다.

8.「이십세기 모단 걸 - 신 김연실전」: 우리나라 최초의 모단걸 김연실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의 호기심은 본능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버릇, 습관, 행동, 생각을

알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관음증, 훔쳐보기의 욕망은 모든 인간에 내재된 본능이다. 경우에 따라 그 본능은 과잉되어 표출되기도 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성에 의해 억눌리기도 한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마이클 잭슨 아동 성추행 사건에 대한 호기심도 훔쳐보기 욕망의 한 양태일 수 있다.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훔쳐보기 욕망도 위의 전제로 본다면 온당한 것이다. 사춘기 시절에 그 욕망은 주로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여성의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이 확대된다.[각주:1]

 

훔쳐보기 하나.

 

[각주:2]가 그녀의 틈새를 향해 입김을 불자, 그녀도 너의 틈새에 따뜻한 숨을 후욱, 불어넣어주었다. 너와 그녀의 몸은 거꾸로, 부드럽게 얽혀 있었다. … 너는 입술을 오므리고, 까슬까슬한 음모(陰毛)에 턱을 비비댔다. 너는 그녀가 서서히 부풀어오르고 있다는 걸 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다리 사이로 가져간다. 툭, 금방 세상 밖으로 빠져나온 필름은 새카맣다. 그 빳빳한 종이를 너는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 모로 누운 연갈색 거웃들과 그 속에 돋아난 작고 붉은 살덩어리들, 너의 극지(極地). 공중변소 앞의 꽃나무처럼 무심히 시든 그것을 너는 냉장고 한가운데, 그녀의 얼굴 옆에 붙인다. -「무궁화」中

 

훔쳐보기 둘.

 

나는 미리 준비한 말을 열 번도 넘게 연습했다. 지금 댁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뭔지 알아요? 괜히 더 큰 망신당하기 전에 우리 아빠를 돌려줘요. 아빠를 돌려줘요, 끝 부분에선 감정에 겨운 듯 살짝 파르르 떨어도 괜찮을 거 같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약속 장소인 카페의 문을 열었다. -「소녀시대」中

 

첫 번째 레퍼토리를 사용할 시점이 예상보다 빨리 온 것이 아쉬웠으나,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오늘은 안 돼. 우린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거잖아.” 단어의 갈피갈피마다 머뭇거리며 “아직은, 아직은, 서로를 자알 모르잖아.” 길고 미지근한 여운을 남겨야 한다. 상우는 곧 자신의 조급함을 사과하고 내 어깨에 얌전히 팔을 둘렀다. 이만하면 매너도, 머리 회전도 괜찮은 녀석이었다. 나는 살며시 그 애의 팔에 머리를 기대주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中

 

이건 재밌다. <훔쳐보기 하나>는 동성애의 한 장면이고, 뭐 그렇다치고 <훔쳐보기 둘>은 아주 묘하다. 정이현 소설 속의 여자들은 감정을 콘트롤, 아니 치밀한 연기로 시의적절하게 감정을 연출할 수 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섬세하고, 주변 상황에 영민하게 반응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고, 극단적 경우엔 최후의 무기인 ‘눈물’까지 흘릴 수도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배팅을 위해서라면 컵셉트를 ‘창조’까지 해낼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겸비하고 있다. 이것 참 괘씸하지 않은가! 좀 더 보자. 

 

처음 만난 날, 그는 나더러 은방울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인터넷 검색 엔진에 들어가 ‘은방울꽃’을 찾아보았다. 1,650개의 웹 문서가 검색되었다. 백합과의 꽃, 향기롭다, 유럽에서는 천사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등등의 문장이 반복되는 걸로 보아 청초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나의 컵셉트는 청순함이었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흰색이나 파스텔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정성껏 드라이하여 어깨쯤에서 찰랑이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 되었다. 스킨십에 있어서도 조신하려고 애썼다. 그렇다.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中

 

물론 정이현[각주:3] 소설의 여자들을 모든 여성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다. 그러나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끄덕여 보았다. 개연성의 퍼센트가 올라갈수록 괘씸하고, 귀엽고, 막 그렇다.  

각설.

그렇다면 왜 그녀들은 이런 위장술을 갖게 되었는가. 정이현은 항변한다, 이 위장술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라고. 소설집의 제목은 그 이유를 은유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도식화와 분석은 내 특기이므로 이를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위장술’)을 통한 ‘사회’로의 진입.「낭만적 사랑과 사회」,「순수」,「트렁크」에서 그녀들은 탁월한 위장술로 사회에의 진입을 꾀한다. 인지하든 아니든 이 사회의 ‘유리천장’은 분명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녀들의 위장술이 ‘유리천장’을 깨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매력적인, 혹은 유일한 수단임은 자명하다. 이것은 90년대의 신경숙류의 이른바 고백체 읊조림과는 분명 다르다. 조금 더 적나라하고, 솔직하다.

 

여러 개의 단편집이 하나로 묶이는 것은 그들 사이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단편들은 형식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단편 자체가 매우 짧은데, 그 짧은 단편들은 모두 몇 개의 짧은 소제목으로 나눠져 전개된다. 즉 짧은 소제목의 여러 이야기가 묶여 하나의 단편이 되고, 여러 단편이 묶여 하나의 소설집을 이룬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짧은 이야기는 하나의 픽셀로서 독립적이며 동시에 연속적이다. 화소는 매우 짧아 어떤 경우는 한 쪽, 길어도 대여섯 쪽을 넘기지 않는다.

 

가령「홈드라마」는 아래와 같은 화소를 지닌다.

<등장 인물 - 프롤로그 -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 - 에필로그>

 

그리고「신식 키친」은 의 화소가 묶여 있다.

<뱀 - 할리 퀸 - 혀 - 마늘 - 열쇠 - 번지 - 사고 - 여권 - 나비>

 

파편적이며 독립적인 이야기가 묶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구조가 구성 요소가 되며, 동시에 구성 요소는 구조가 된다. 짧은 이야기는 가독성이 좋기 때문에 속도감을 수반한다. 가볍지만, 경쾌하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문학의 맥과 상통한다. 잘 알지 못하는 포트스모더니즘의 개념을 굳이 언급해 내 무식을 폭로할 필요도 없이, 이는 가벼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에 대한 편의이며 동시에 파편적인 삶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 글쓰기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해설이 있었으면 좀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잠시 한다.





  1. 확대된다, 라는 표현을 썼다. 이 말은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핫팬츠를 입고 지나가는 여성의 보폭에 따라 남자들의 시선이 함께 이동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본능이다. 그러니 너무 뭐라 욕하진 마시라. 변태라고 하지 마시라. 나도 이러는 내가 죄스럽다. [본문으로]
  2. 이 소설은 2인칭 시점이다. 2인칭 시점은 소설 이론에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이론이 실제는 아니잖은가. 작가들은 2인칭 시점을 종종 실험적 형태로 쓰곤 한다. 내가 읽어 본 2인칭 시점의 소설은 하일지의『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이다. 줄거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 [본문으로]
  3. 정이현. 혹시… 했는데 검색해 보니 맞다. 최강희 주연의 드라마로도 방영된『달콤한 나의 도시』의 원작을 쓴 작가다. 최강희.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 내 사랑, 이라는 흥행 실패 영화도 있었구. 나는 이 책도, 드라마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분명 재밌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가림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