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한 꽃송이』(문학과 지성, 1992) 읽다. 

한 사람을 특징짓는 것은 찰나의 단면으로부터다. 사람의 눈은 두 개고, 시야에 감지되는 것은 대개 다각도의 입체가 아닌 일방향의 단면이다. 편향된 일방향의 시선 덕분에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같은 인물에게서 다른 일면을 보게 된다.
내게 정현종은 황혼 직전의 붉은 빛으로 기억된다. 정오의 태양을 기준으로 60도 가량 서쪽으로 치우쳐진 발그레한 녀석.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오후의 느즈막에서 나는 정현종을 탐닉했었다 -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이렇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면 낮술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지구라는 천체 위에서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살아간다. 생명체는 지구의 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바꾸며 역동적 상호 관계를 꾸려 나간다. 분리된 타자가 아닌, 하나의 전체이다. 불교에서의 일체동근(一切同根). 지구의 생태계와 대기권, 바다, 토양 모든 것은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름을 딴 가이아(Gaia) 이론의 핵심이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한 숟가락 흙 속에」전문(全文)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출판된 정현종의 다섯 번째 시집『한 꽃송이』는 하늘의 순리가 담긴 물심일여(物心一如)의 현대 버전이다. 나무와 메뚜기와 지렁이와 흙과 장수하늘소와 바보 만복이와 보살 이유미가 함께 숨쉬는 이 대지는 그에게 ‘충일’의 세계며, 충만한 ‘만월(滿月)’과 같다. 그곳은 ‘누설된 신비(神秘)’이며, ‘세계들과 이어진 탯줄’이기 때문에 시인은 ‘발정’해 있는 ‘성욕’으로라도 그곳에 이르고 싶지만, ‘가뭇없’는 그곳을 이르는 길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시인은 ‘그저 그놈을 만져보고 싶고 / 그놈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을 뿐인데,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고 ‘놀다가 그냥 물고기가 되구’싶을 뿐인데 세상은 대지를 가만 두지 않는다.


지구의 숨 쉬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없이 관대했던 시인은, 생명과 대척점에 있는 ‘것’들에 대한 분노는 여과가 없다. 사랑의 정량이 시인에게 양극이었다면, ‘전쟁광’과 ‘미사일’ 등은 음극의 좌표에 놓여진다. 시인은 ‘쇠붙이’ 등속에 대해선 적나라할 정도로 가열차게 비판하는데, 이는 뭐라 판단하기 좀 애매하다. (가령 이 시집 전체에서 유일한 음영 표시가 되어 있는 이런 구절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중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와 같은 표현은, 죄송하지만, 좀 불편하다.)

 
기억으로 정현종의 시는 무척 난해했었다. 그의 어떤 시집은 몇 주에 걸쳐 읽어야 했던 것도 있었다. 대개 몇 개의 시가 발목을 잡는 것이다. 한편 이번 시집은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치은과 기형도에 꽉 막혀 한 달 반이 넘게 고생해서 약간 겁도 났었는데, 다행이다.

 

지리산 근처의
구름 보셨어요?
(그 아래 질주하는
자동차도 보셨지요?
경주가 안 되지 않아요?)
하여간 그 아래서 나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면서
큰산들에 둘러싸여 행복하여
버스는 오든지 말든지
그냥 거기 공기로 섞여 어정거리며,
여러 해 전 세재 골짜기에서
구워먹은 구름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 골짜기에서
돌 위에 고기를 구우면서
내가 창자를 다해 구워먹은 건 실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구름이었습니다.
「구름」전문(全文)


덧> 정현종에 관해 인터넷을 뒤적이다 좋은 기사를 발견해 링크 건다. 신동아에서 정현종에 대해 기획 인터뷰를 한 것이다. 근래의 정현종 사진과 노시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詩 완벽주의자' 정현종 클릭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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