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 2001) 읽다.

술 마시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술집 다음 코스인 노래방은 달갑지 않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것도 한 이유겠으나, 그보다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노래책을 뒤져 부를 수 있는 최신곡을 찾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노래방은 안 간다. 하지만, 아주 가끔 오랜 지기와 술을 마셔 흥에 취하면 나도 노래방에 간다. 그때마다 꼭 부르는 이 노래, 귀뚜라미 - 하덕규의 가시나무, 안치환의 직녀에게 모두 좋은 노래다. 귀뚜라미는 나희덕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였다.

좋은 노래말이란 이런 것이다. 서정이란 이런 것이다.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누군가 말했다. 시란 시적인 상태의 포착이라고. 이는 시의 진술이 시적인 정황, 시적인 상황의 찰나를 감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속된다. 그렇다면 시의 정수란 생경하고 낯선 비유로 시적 긴장감이 팽팽해진 것만도 아니요, 잠언적 경구로 무장한 경세가도 아닐 것이며, 내밀한 비밀의 감정을 개인어로 읊조리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나희덕은 어디를 펴도 좋다.

나희덕을 읽다 보면 ‘섬세함’, ‘감수성’ 요런 단어가 떠오른다. 그녀는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있는 ‘수천의 빛깔’을 볼 수 있으며, 기러기떼가 하늘에서 노를 젓는 ‘삐걱삐걱의 날개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나희덕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 - 그녀는 애써 과장하려 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포착, 이를 조형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시보다 더 시 같은 우리네 삶을 차분하고 정갈한 그물로 채집한다. 통증과 비애의 그 순간을 그녀는 기억하며, 기다린다. 이런 의미에서 나희덕의 시는 삶, 그 시적인 것의 응집이다.

한편 시인이 응시하는 것은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 부유하는 것들이다. 삶, 그 쓸쓸한 이름을 한걸음 뒤에서 지켜볼 때,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섦’을 느낄 때, 때로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을 때 그녀는 시의 잉크에 펜촉을 적신다. 쓸쓸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쓸쓸한 것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녀는 버려진 연탄재에서 ‘소신공양을 끝내고 막 돋아나는 그 살빛’을 목격할 수 있는 것. 나희덕이란 렌즈로 포착된 삶이란 슬픈 것이며, 그 슬픔의 언저리에는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따뜻함)’이 내재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희덕의 시를 ‘모성적 따뜻함’이라 말하는가 보다. 좋다.

기러기떼

羊이 큰 것을 美라 하지만
저는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겠습니다 

철원 들판을 건너는 기러기떼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잔물결 같고
그 물결 거슬러 떠가는 나룻배들 같습니다
바위 끝에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삐걱삐걱, 낡은 노를 젓는 날개소리 들립니다
어찌 들어보면 퍼걱퍼걱, 무언가
헛것을 퍼내는 삽질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도
내 몸 속의 찬 강물 줄어들지 않습니다
흘려 보내도 흘려 보내도 다시 밀려오는
저 아스라한 새들은
작은 밥상에 놓인 너무 많은 젓가락들 같고
삐걱삐걱 노 젓는 날개소리는
한 접시 위에서 젓가락들이 맞부비는 소리 같습니다
그 서러운 젓가락들이
한쪽 모서리가 부러진 밥상을 끌고
오늘 저녁 어느 하늘을 지나고 있는지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고 나니
새들은 자꾸 날아와 저문 하늘을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이제 노 젓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다

 

뱀발 : 시「거미에 씌다」를 보면 ‘웅큼’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는 ‘움큼’의 잘못이다. 이런 것도 시적 허용에 포함될 수 있을까. 재미난 사실 하나. 황지우의 대표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보면 5행에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룩하다’란 성과를 만들다 정도의 뜻이므로, 여기에선 땅에서 떠오른다는 뜻의 ‘이륙’이 옳다. 아는 분이 황지우 시인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여쭤봤단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시인 왈, 그래요? 그거 오타겠죠. ㅋㅋ. 내가 가진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문학과 지성 : 1995년 재판 21쇄판인데, 혹시 최근 시집을 가지고 있으신 분은 확인해 보시길. 아직도 ‘이룩하는’이란 오타가 실려 있는지. ^^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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