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세계사, 1992) 읽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적 우산은 방대해서 그 발원과 범위군에 들어가는 양태를 서술하기 힘들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학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 그것은 인문 과학과 사회 과학, 언어학과 철학 등의 순수 학문 전반에 포진된 개념이라는 것. 영화나 드라마, 음악과 회화, 조형 예술 등 모든 예술 영역군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의 첫단추가 되는,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나로선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 및 배경에 대한 공부가 어려워 포기한다. 여기선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양상과 특징에 대한 언급을 하나만 하자.

 


인용시 1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인용시 2

주기도문, 빌어먹을

  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하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인용시 3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오규원

 

1.`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4. →

5. →를 따라
한 모서리를 돌면
빙그레―가 없다
다른 세계이다

6. ↑ 따르는 곳을 따르지 않고
거부한다

다른 모서리로 내 다리를
내가 놓는 오월의 음지를
내가 앉는 의자의
모형을 조금씩 더
옮긴다……이 지상(地上)
이 지상(地上)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기초가 되는 특징 중 하나는 ‘상호 텍스트성’이다.

문학은 작가와 독자 및 창작품과 다른 작품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에 따라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로 나뉜다. 여기서 수평적 관계란 작품을 두고 작가와 독자가 맺는 관계이며, 수직적 관계란 작품과 그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과 맺는 관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상호텍스트성’이란 바로 작품의 수직적 관계를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이미 씌워진 텍스트를 다시 배열하고 결합해놓은 것 - TV 드라마를 보라. 신델레라 화소, 바보 온달 화소, 콩쥐팥쥐 화소가 뒤죽박죽 되어 있지 않는가. - 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낭만주의나 모더니즘 전통에 속하는 작가들처럼 그들의 작품에서 독창성이나 창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선배 작가들이나 동료 작가들의 작품에 자유롭게 기대어 작품을 쓰는 것을 창작적 원리로 삼고 있다.
물론 그들이 인용하는 것의 대상은 작품만이 아니다. 소설이 시를 변용한다든가, 시가 불경을 변주한다든가, 찻집의 메뉴판을 패러디한다든가, 광고를 인용하는 등의 형태로 상호텍스트성은 표현된다 - 이를 ‘탈장르화’ 및 ‘장르 확산’이라 한다. 위 인용문 1은 김춘수의「꽃」을 변형한 현대인의 인스턴트식 사랑에 대한 문화 비판시이며, 인용문 2는 문학 외 텍스트(성경)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패러디시이다. 인용문 3은 텍스트가 아닌, 광고를 패러디한 키치 형태의 시. 이 상호텍스트성은 패러디나 패스티시로 세분화할 수 있다.

한편 ‘메타픽션’이란 개념은 실재의 세계가 예술 창조 행위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을 반영한 개념이다.
메타픽션이란 자기 반영적 글쓰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작품의 창작 과정 그 자체가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타픽션은 어느 한 문학 텍스트가 텍스트 밖에 존재해 있는 다른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의 매커니즘을 반영하는 것이다. 메타픽션은 실재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실재하는 것이냐는 철학적 탐색을 근원으로 한다. 위 인용시 4는 메타픽션에 해당하는 시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소설로 들어가 보자.

1992년에 발표된 이인화의 첫 장편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1990년대 소설 장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작품에 해당한다. 90년대 우리 문학에서 표절 시비로 한동안 시끄러웠던 작품, 바로 요놈이다. 이 글을 포스팅하며 찾아보니 박일문의『살아남은 자의 슬픔』역시 요놈과 함께 표절 여부 때문에 말이 많았나 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내용이 아니다. 그 형식적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 형식의 왜곡과 변형을 통해 세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담론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형식적 특징이 어떤 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과 일치하는지 각해 본다.


먼저 살펴볼 것은 메타픽션의 서술 기법.
작품은 주인공 은우가 첫 장편 소설을 창작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결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은우는 일주일 여를 고민하다 결국 주인공의 허망한 죽음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이를 두고 소설가 은우와 평론가 박문도 사이에 설전을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 이인화가 쓴 실체로서의 ‘소설’과 소설 속 주인공인 은우가 쓴 허구로서의 ‘소설’은 서로 일치한다. 이는 실재와 허구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완벽한 모순 덩어리다. 실재와 허구가 전도된 뫼비우스의 띠. 자기 표절 혹은 자기 모방으로서의 소설 형식적 기법 - 메타픽션.

이 소설은 전체 18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 이상의「날개」의 집이 기억나는가. 18가구이다. - 각 장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형식이다. 그런데 각 장의 1인칭에 해당하는 인물이 장별로 바뀐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소설가 은우의 시점이었다가, 은우의 여자 친구이자 레지던트 2년차인 의사 윤희의 시점이기도 하고, 문학 평론가 박문도의 시점이 나오기도 하며, 6살 때 부모를 잃고 이제는 할머니조차 잃은 정임의 시점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물론 시점의 다변화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조세희의 연작 소설『난․쏘․공』중 단편「난․쏘․공」도 1인칭 시점 ‘나’의 주체가 ‘영수’에서 ‘영호’로, ‘영호’에서 ‘영희’로 바뀐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위 분석의 메타픽션과 더불어 이런 시점의 다변화를 통해 작가 이인화가 의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국 작가는 기존의 소설의 기본 골격을 의도적으로 뒤틀고, 플롯의 공식을 파괴하며, 또한 시점의 다중적 변화라는 실험적 형식을 통해 기존 문학 작품에 대한 항변과 거부를 말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제 1회 작가세계 문학상으로 당선된 후, 이 작품은 표절 시비가 붙었다. 작품의 상당 부분이 하루키와 공지영의 소설 구절과 비슷하거나 같다는 것이었다. 즉 여러 작품들의 여러 문장을 절취해 필요에 따라 작품 곳곳에 삽입했다는 것. 저명한 평론가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은 이인화와 이인화를 옹호하는 일군의 평론가 집단의 대응은 간결했다. 패스티쉬! 이른바 혼성모방으로 원작과 모방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글쓰기 기법.

한편 소설의 화두인 제목을 풀이해 보면 이렇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는 자아의 본질 찾기라는 구태의연한, 어찌 보면 케케묵은 물음이다. 하지만 이인화의 자아 찾기는 기존의 자아 찾기와 다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아 탐색에 대한 열망도, 자아 찾기의 여하한 욕망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찾아야 할 자아란 것이 과연 실재하겠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한다. 아래의 작품 인용 구절은 이 의문의 답을 은유하므로 읽어 볼만 하다.

시뮬레이션(simulation) 이론을 요약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미친 놈 모습을 기가 막히게 연출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미친 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흉내와 실재 사이에 아무런 차별성도 없단 말인가? <사회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교수의 대답이었다. 흉내(simulant)와 실재(reality) 사이에서 사회는 언제나 실재를 선택한다. 실제로 미친 놈은 사회의 자기 동일성에 아무런 위협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부적응만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미친 것에 가깝게 미친 시늉을 하는 놈은 아주 위험하다. 그런 흉내는 <정신병>이라는 실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이성적인 인간과 미친 사람을 구별하는 질서와 법 자체가 흉내, 그러니까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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