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의 한가한 데이트 : 뉴요커의 브런치에서 대학로 연극까지

 

- 느리게 걷기 

나도 뉴요커가 될래.

아내가 말한다.

뉴요커라…. 아내가 말하는 뉴요커란 어떤 것일까.

늦은 아침에 일어나 선율이 무겁지 않은 음악을 듣는 뉴요커. 식사는 가벼운 브런치 Brunch로 대신하고 거꾸로 된 뉴욕 타임즈도 여유있게 읽을 수 있는 뉴요커. 뉴욕의 가을 햇살처럼 반짝이는 털을 가진, 잡종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뉴요커. 구수한 청국장조차 스트롱 꽂아 먹을 수 있는, 삭힌 된장의 진미를 도시적 감수성으로 음미할 수 있는, 그런 뉴요커가 되고 싶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아내는 “나도 뉴요커가 될래.”가 아닌, “나도 뉴요커가 될래.라고 혀꼬인 발음으로, 게다가 뉴요커에 강조점까지 찍고 발음한 것이 아닌가. 어쩐지 평소의 발음과 다르게, 색깔도 입혀진 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 아내와의 연애, 그리고 결혼까지 나는 아내에게 순대국과 내장탕, 뼈다귀 해장국과 삼겹살밖에 사주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 흔한 프로포즈도 못했고 녀석을 위해 풍선 한번 불어준 적, 초 한송이 켜본 적도 없다. 그래, 뉴요커. 고까이꺼 오빠가 함 만들어 주지, 뭐.

 

- 까페 Well paper의 전경

율동 공원으로 가는 길은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다.

단풍을 멀리서 보면 홍(紅), 그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홍(紅)만도 아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이 있고, 이를테면 단풍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각주:1]

율동 공원의 후문 쪽 <좋은 종이 Well paper>라는 카페로 방향을 잡는다. 밖에서 보니 이국적인 건물 외벽 앞으로 벌을 서듯 나목(裸木)들이 서 있다. 이 계절에 나목(裸木)과 고목(枯木)은 아직 식별이 가능하다.

주차를 한다. 시간은 대략 정오를 넘기고 있는데 주차장은 만차다. 건물 왼편의 오솔길을 돌면 테라스에 많은 뉴요커가 이국적인 표정으로 커피와 식사를 즐기고 있다. 우리 내외는 옷에 된장 찌개 국물이 튀지 않았는지, 밥풀이 묻지 않았는지 서로를 눈으로 훑어 주며 까페 안으로 들어 선다. 주문을 해야 한다.

 

- 뒤에 큰 칠판이 메뉴판. 앞쪽의 간이 메뉴엔 런치 세트가 있다.

이 이국적인 까페에서 오히려 더 이국적으로 보이는, 구수하게 생긴 까페 종업원 언니 뒤로 메뉴판이 보인다. 메뉴판의 값을 확인. 콧물이 나오려 한다. 비ㅡ싸ㅡ다ㅡ.

아내 역시 낭패라는 표정이다.

어쩔까, 조용히 뒷걸음질 쳐 살그머니 되돌아갈까. 뜨끈, 든든하게 순대국이나 먹자고 옆구리를 찌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뉴요커들은 닭털 날리는 촌닭 같은 우리 따위는 관심 없이 칼과 포크를 들고 얘기를 나누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저들은 아마 뉴욕의 날씨와 뉴욕의 인구 문제와 뉴욕의 교통 체증과 뉴욕의 야구 경기와 뉴욕의 보궐선거에 대해 말하고 있으리라. 순대국이나 머릿고기 얘기가 아닌, 뭔가 고답적인 제재를 말하고 있으리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무 비싸, 딴 데 가자, 말하려는 순간, 아내의 콧구멍이 벌름거려지는 것을 나는 목격한다. 그렇다. 아아, 녀석은 결심을 한 것이다. 진정한 뉴요커가 되기로. 햄 샌드위치 세트(커피 포함) 하나와 까페라떼 하나. 만 팔천 오백원. 두 명 분의 식사를 주문해야 옳으나 값이 값인지라 나눠 먹으려는 속셈이다.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미는 아내의 손이 순간 멈칫, 하는 것도 나는 목격한다. 나는 체념한다.

 

- 햄 샌드위치와 까페라떼. 커피가 하트다. 호오~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아내가 능숙하게 베이컨과 햄과 토스트를 자른다. 녀석의 어슷썰기는 삼겹살을 자르던 노련한 솜씨, 그대로다. 우린 이제 뉴요커가 된 것일까.

촌닭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커피 잔은 이렇게 드는 것이 맞을까. 포크를 쥐는 손의 각도가 약간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나. 웨이터는 뭐라고 하며 불러야 할까.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살풋 미소를 지어보여야 하나. 커피는 리필이 되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이 흘러 나오는 까페에서 커피잔을 들고 한껏 기분을 내자니 어쩐지 우리가 샤방샤방해 보인다. 샤방샤방한 뉴요커. 샤방샤방한 촌닭들. 코를 파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우린 제법 재기발랄한 대화도 나눈다.

 

- 까페 정원에 있는 카누. 유선형의 매끈한 조형물.
저 배는 단 한순간이라도 배로서의 기능을 한 적이 있을까.

이게 브런치야? 응.

브런치 이거 별거 아니네. 응.

이 베이컨, 신혼여행 때 먹던 거랑 비슷한 맛이 나. 응.

진정한 뉴요커도 별거 아니겠지? 응.

뉴요크 가보고 싶다. 응.

가스 벨브 잠갔니. 응

일주일에 하루씩 쉬니까 좋다. 응.

순대국 먹고 싶지 않니. 응.

 

- Well paper에서 보이는 저수지. 서현 저수지라 한다.


밖으로 나와 저수지의 뚝방길을 따라 산책한다. 까페에서 서른 걸음 쯤을 걸으면 서현 저수지라는 작은 소(沼)가 나온다. 2층 테라스에서 이 저수지가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흐르는 물은 그 나름대로, 고여 있는 물은 또 그대로 좋다. 여기, 저수지의 물은 비록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성찰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수평의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하기에 손색 없다. 뒤로 보이는 이국적 건물의 이국적 사람들과 여기는 서른 걸음 차이. 서른 걸음을 걸으면 서른 걸음만큼 저수지와 가까워지고, 서른 걸음만큼 까페에서 멀어진다. 이 단순․명쾌한 사실.

 


- 서현역에 있는 AK 백화점의 1층. 매장 앞.

백화점에도 간다.

평일 오후의 한가한 시간에도 이곳은 한가하지 않다.

백화점은 물질적 욕망의 집결지다. 욕망을 팔아 먹는 자와 욕망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이자, 실체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LOUIS VUITON> 앞에서 사진도 찍고 신기해 한다. 한달 월급을 에누리 없이 통째로 바쳐야 살 수 있는 저 욕망의 현신. 대체 어떤 녀석들이 이런 데서 물건을 사는 거야, 독백하는 순간,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예쁜 언니 하나 매장으로 들어간다.

파레토의 말대로라면 이 백화점의 이윤 대부분은, 내가 아닌, 저 예쁜 언니들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밝은 형광빛으로 채색된, 아찔한 수직의 공간 - 이 이질적이고 투명한 촉감은 우리 촌닭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다. 결국 백화점의 입장에선 대부분의 우린 겉절이며 잉여적 존재이다.

백화점을 나와 뒷골목 분식점에 간다. 서로의 지갑을 탈탈 털어 확인해 보니 오천 오백원.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고, 후식으로 음료수까지 마시고 나온다. 이제 어디로 가나. 예매해 놓은 연극 공연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다.

 

- 탄천길. 자전거 도로를 따라 억새가 제법 자랐다.

- 얼핏 보면 약간 탁해 보이나, 자세히 보면 좀더  탁하다

탄천에 간다.

평소 한적한 탄천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하고 경찰들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서울 에어쇼 행사가 진행중(10/20-25)이라 한다. 며칠째 비행기 날아다니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이 에어쇼 때문이었구나. 에어쇼를 구경하러 온 님들에겐 굉음을 내며 묘기를 부리는 쌕쌕이가 흥미롭겠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요 비행기 소리는 골칫덩이다. 공군에서 비행 연습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나 가끔 쌕쌕이의 저공 비행이 있을라치면 그 굉음에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온다. 대체 누가 이따위 행사를 기획한 걸까. 왜 도시의 하늘 위로 전투기 패거리가 불량스럽게 떼 지어 다니며, 왜 성남에 있는 서울 공항은 서울 공항인가. 제 2 롯데월드는 시공은 어떻게 되는 거냐. 망할. 짜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 소래포구 축제장에서 보았던, 현수막의 글귀가 떠오른다. “주민 기본 생존권 침해하는 서울 에어쇼 폐막하라!”라고 대자보라도 붙여야 하나.

방향을 바꿔 반대편으로 걷는다.

이쪽은 사람이 없다. 천변을 따라 한층 웃자란 가을 억새가 제법 운치 있다. 강아지풀도 보인다. 천(川)에는 어림 짐작으로도 한 자가 넘어 보이는 물고기가 꽤 있다. 녀석들의 한가한 유영이 이곳의 한가한 풍경과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 대학로. 마로니에 옆 오아시스 극장이다.

연극 공연을 예매했다.

연중 행사 중 하나인 연극 관람. 바로 오늘이다.

우리 내외만 즐기기 죄송스러워 어머니와 이모님도 모신다. 두 분께는 <친정 엄마와 2박 3일>을 보여 드리기로 한다. 동국대 이해랑 극장에 두 분을 모셔 드리고, 티케팅을 해드리고, 우린 대학로고 gO gO.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아시스 극장을 찾는다.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사서 빨아 먹으며, 걷는 길이 신난다. 대학생이 아닌 내가 대학로를 걷는 것도 즐겁다. 평일에 쉬고 있는 내가 신난다.

 

 - 옷이 많다. 내가 본 연극 중 가장 실감나는 무대 장치였다.

 

예매한 연극은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

대학로의 소극장이 대개 그러하듯 자리가 협소하고, 의자는 불편하다. 운 좋게 오른쪽 맨 앞석에 자리 잡았다. 무대 배경은 실감난다. 족히 몇 백벌은 되어 보이는 옷이 무대 전면에 가득 걸려 있다. 무대에 빽빽이 걸린 옷들이 외치고 있다. “여긴 세탁소야, 여긴 세탁소야.” 공연이 시작되고 간간이 웃음이 터진다. 뒤로는 고등학생 친구들이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인데, 내 바로 뒤 녀석의 웃음에 자꾸만 내 목덜미가 뜨겁다. 콧바람이 센 녀석이다. 후드티를 머리까지 쓰고 연극을 본다.

…. 잠깐 졸았다. 발단-전개가 너무 길고 지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다시 집중해서 연극을 본다. 내용은 이렇다.

각박해지는 도시, 그리고 어느 허름한 세탁소. 아버지께 가업을 물려받은 세탁소 주인은 50년 동안 가게를 지킨다. 세탁소 주인은 돈을 많이 벌진 못하더라도 불평하거나 투정하지 않는다. 그는 손님들의 주름진 옷을 다리며, 사람들의 마음에 얼룩진 상처와 아픔까지 다리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명의 경우 없는 사람들이 오아시스 세탁소를 습격한다. 임종 직전인 그들의 어머니께서 여기 세탁소에 유산을 맡겨 두었으니 찾아야겠다는 거다. 자기 어머니의 이름조차 모르는, 오로지 물욕(物慾)으로 똘똘 무장한 그들을 보며 세탁소 주인은 절망한다. 결국 오아시스 세탁소(주인)는 그들의 검은 마음을 세탁하기로 결심하는데….

연극 관람 평을 써볼까도 생각했는데 포기한다.

① 도입부의 늑장 전개 : 대체 도입부가 한 시간 동안 전개되는 연극이 어디 있는가. ② 극명한 선악의 대립 구도 : 어린이 만화 영화를 보면 인물의 얼굴만 보고도 착한 놈, 나쁜 놈을 구별할 수 있다. 단순하다는 거다. 반전이 없다면, 웃음 코드라도 있어야 하지 않았나. ③ 나열된 에피소드의 식상함과 어설픈 세태 비판 : 효경(梟獍)들의 배금주의(拜金主義), 효(孝) 의식 상실, 중․고생 해외 유학 문제, 이웃간의 소통 부족. ④ 빤한 상징적 장치 : 고양이의 울음(탐욕) vs 세탁기의 비누 거품(순결).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②③④의 부정적 평가는 ①에서 파생한 거다. 마음을 후하게 갖고 ①만 빼고 본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연극이라 할 수도 있다. 흠….


연극이 끝나고 동국대로 가서 어머니와 이모님, 사이 좋은 두 자매분을 모신다.

동호대교를 건너면 왼․오른쪽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인다. 강변을 지나거나 서울의 다리를 건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강변의 야경은 훌륭하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친정엄마와 2박 3일>의 줄거리를 말씀해 주신다. 많이 우셨다고 하신다. 좋았다 말씀하신다. 연극 때문에 약간 불쾌했던 기분이 진정된다.

다음 주엔 광릉 수목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1. 정비석, 산정무한.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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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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