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일빛, 2004) 읽다.

사료적 의미로서의 텍스트(문학 텍스트 역시 마찬가지겠지)는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란 지면에 제시된 사실적 선후 관계의 파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확인 및 정보의 수렴은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다. 텍스트의 바른 이해는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독해의 재료가 되는 텍스트에 대한 사실 관계 확인을 근간으로 하되, 여기에 독자의 해석과 가치 평가를 담아야 한다. 이 해석과 평가의 잣대가 되는 것이 관점(史觀)이다. 복잡다단해 보이는 사건사의 심층에 깔린 근원적인 움직임과 체계를 관점이라는 준거의 틀로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개 우리의 시선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이 남루해서 투시는 커녕, 응시도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문가(책)의 눈을 빌려 텍스트를 읽는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누리집이 ‘사람사는 세상’(인본주의)이었다면, 노회찬이 대표로 있는 <진보신당>의 강령은 ‘평등․생태․평화․연대’(생태주의)이다. 지향해야 할 가치의 범주로만 본다면 진보신당 쪽이 더 근원적이며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개념 옹골찬 노회찬의 시선으로 투시된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색깔의 조형물인가. ‘진보’라는 준거의 틀로 바라본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떤 방향성이 담겨 있는가. 단편적 사건 기저에 숨겨진 국면(정치․경제․사회․국방․외교․문화․풍습 등)에 대한 노회찬식 성찰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가령, ‘위화도 회군’이라는 사건은 이성계의 역성(易姓) 혁명에의 욕망 외에 중국과의 관계(원-명 교체기), 권력 집단간의 대립(신진 사대부 vs 권문세족), 고려 왕권의 진공 상태(공민왕의 개혁 정치 실패 이후의 우왕) 등 고찰해봐야 많은 제반 여건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역사 읽기’로서의 바람직한 책이란, 개별 사건사 밑바닥에 깔린 심층적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기존 세계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며, 낡은 패러다임의 모순점을 지적, 이를 혁파할 수 있는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블랙박스를 열겠다는 이 책은, 아쉽게도, 역사적 진실로서의 블랙박스가 아닌, 흥미유발 궁중 야사(野史)로서의 블랙박스를 열었다. 각종 성(性) 스캔들과, 가십 거리의 궁정 생활이 씌어져 있다. 위에서 제시한 진보 지식인의 역사책 읽기의 방향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깊지 않다는 거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빼고 읽었다면, killing time 용으로 적절했을 책.

Posted by 가림토..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