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신문 읽기의 혁명』(개마고원, 2003 개정판) 읽다.


“먼저 사실을 붙잡으라. 그리고 마음대로 곡해하라.” - M.트웨인


신문은 과연 객관적 사실(fact)인가. 명민한 작가 손석춘에 의하면 대답은 No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신문에 실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다양한 현실의 사건 모두가 신문에 실리는 것이 아니다. 취재 기자의 가치 판단에 의해 절취된 사건이 신문의 기사가 된다. 첫 번째 주관의 개입이다.

② 취재 기자가 송고한 기사는 각 부의 취재 부장에 의해 굴절된다. 오랜 취재 기자 생활을 경험한 취재 부장은 날카로운 현실 감각과 판단력으로 취재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옥석을 고른다. 취재 부장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버려질 기사가 있을테고, 부각되야 할 사건도 있을 것이다.

③ 다음은 편집 기자다. 각 부의 편집 기자가 해당 부서의 기사들을 편집함으로써 사건들은 중요도의 위상을 가진다. 항공 노조의 파업과 가뭄난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이라는 두 개의 사건 가운데 어떤 기사가 중요한 기사인가. 이는 편집 기자가 어떤 기사를 머릿기사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④ 편집 기자의 손을 거친 기사는 편집 부장, 그 위 편집 국장의 가치 판단에 의해 또다시 굴절된다. 여기서 신문 기사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표제가 탄생한다. 표제는 취재 기자가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편집 국장 및 주필의 가치 판단에 의해 표제가 음각되는 것이다. 표제-기사-사진의 편집이 완료되면 기사는 윤전기로 넘어감으로써 비로소 신문이 인쇄된다. 여기까지가 신문 기사가 굴절되는 내적 요인이다.

그런데 기사에 작용하는 이 내적 매커니즘 외에도 외부에서 작용하는 유 ․ 무형의 힘이 존재하니 이것이 신문의 왜곡 보도의 외적 요인이다. 그것들로는 신문사 사주(社主), 권력 기관, 광고주(재벌)를 꼽을 수 있다.

⑤ 아무리 중요하고 큰 사건이라도 신문의 절대 지분을 갖고 있는 신문사 사주에 관계된 기사라면 이 기사는 요절한다. 불편부당의 띠를 머리에 두른 언론이라 하더라도, 사익과 직 ․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을 활자화할 도덕적인 사주는 대한민국에 없다. 삼성중공업의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 때의 <중앙일보>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사주는 자신의 기호에 알맞은 주필과 편집 국장을 내정할 테고, 주필과 편집 국장 역시 자기의 지시에 따라 견마지로(犬馬之勞)할 수 있는 부하 직원들을 중용할 것이 뻔하다. 신문사의 지분권이 사주와 그 일가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 구조 상 신문의 논조는 신문사주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권력 기관의 개입은 박정희 정권 때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동아일보>의 기자들 전원이 해직된 사건을 떠올리거나,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생각하면 좋다.

⑦ 마지막으로 광고주(재벌)다. 신문의 절반 정도 분량을 광고가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신문 지면 구조상 광고주에게 불리한 기사가 작성될 리 만무하다. 실제로 신문사는 판매 수익이 아닌, 광고 수익을 통해 이익을 창출한다. 대략 비율은 3 (판매 수익) : 7 (광고 수익) 정도. 발행 면수가 많은 신문은 신문지가 아니라 광고지다. 결국 영리단체인 신문사의 입장에서 광고주를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노사가 대립하는 노동쟁의의 경우, 신문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겠는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신문이 결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보(私報)라고 하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내적(①②③④) ․ 외적(⑤⑥⑦) 개입에 의해 현실은 비틀어지고 굴절된다. 손석춘은 이를 신문과 독자의 피라미드 구조라 한다. 글쓴이는 이 피라미드를 뒤집어 역피라미드 구조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흠…. 신문과 편집은 세계를 보는 창(窓)이며, 만약 그 창이 더러워 이물질이 끼어 있다면 창을 닦든 깨부숴야 한다. 스스로 깨어 있는 독자가 되야 한다.

 

뱀발 1.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명하거나 깨어 있는 신문 독자가 아니다. 나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신문을 끊었다. 몇 년째 <한겨레>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세상이 싫어졌다. 세상 읽기가 싫어졌다. 나는 요즘, 의식적으로 신문을 안 읽는다. 나는 신문 독자가 아니다.

 

뱀발 2.

지난 anti 조선 운동

과 지금의 언론 소비자 주권 운동의 핵심 강령은 족벌 언론에 대한 심판이다. 무릇 바른 저널리즘이란 사실 보도를 근간으로 하되 객관성, 공정성의 잣대로 이를 활자화해야 한다. 허나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라 할 수 있는 언론의 행태는 왜곡과 편파를 마치 ‘보도 지침’으로 삼는 듯하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한 괴벨스의 현신인가. 그러나 조․중․동의 파렴치한 닭짓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위 신문들이 여전히 신문 판매 1 ․ 2 ․ 3위에 랭크되어 있다는 사실. 지난 10년간 탈각의 행동하는 양심들이 “anti 조선”을 외친 결과가 뭔가. 그들은 광고주 협박 전화 및 조선일보 광고사 제품 구매 안하기 운동을 했다. 조선일보 방○○ 사장님의 섹스 스캔들 캐기, 조선일보의 친일 매국 기사를 인터넷에서 퍼 날랐다. 한겨레 ․ 경향 사보기 운동을 했고, 지하철에서 이른바 정론지를 무상 배포했다. 조선일보 사옥에 쓰레기 갖다 버렸고,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그러나

녀석들은 어떠한가. 미디어법, 헌법재판소의 해괴한 판시는 녀석들의 건재함을 방증한다. 녀석들은 눈하나 깜짝 안 한다. 정말 안타깝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조선일보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정치와 언론의 수준은 행동하는 양심이 아닌, 다수의 시민 의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방울씩의 낙숫물이 과연 바위를 뚫을 수 있을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은가.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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