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일곱 번째 시집『강 같은 세월』(창작과 비평, 1995) 읽다. 

남해에서 유학 온 Y 선배가 있었다. 선배네 자취방. 한 떼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가 그 선배네 집에서 취흥을 이어 나갔다. 밤이었고, 창으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Y 선배가 말했다. “야아, 책장 시집 란에 가 창․비 꽂혀 있는 쪽 찾아봐라. 거 말고, 그러치, 거거, 거 보면 40번 김용택이 있을 기다. 가아 섬진강 5 함 읽어봐라. 앞쪽에 있다.”  누군가 시집을 찾아 시를 읽었고, 나는 아무렇게나 벽에 기댔다. 동기 중 누군가는 담배를 태우려고 라이터를 당겼다. 치익-. “야야, 담배 피지 마라. 형님(Y 선배 본인)께서 시 감상하고 계시잖아.”

창으로 섬진강의 달빛이 비치고 있었고, 나는 그 밤의 서정어린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땅의 서정시 중「섬진강 5」만큼 빼어난 것이 또 있을까.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김용택 시의 모태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섬진강이다.

김용택에게 섬진강은 삶의 여정이요, 생활의 연장이요, 시의 어머니다. 삶과 생활과 시가 섬진강을 그 어미로 하나이니 김용택의 시에는 가식이 없다. 허위가 있을 리 없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섬진강처럼 김용택의 시편들 역시 길고 느리게 이어져 하나가 된다. 김용택의 시편들은 참으로 섬진강이 가진 연속성을 닮았다. 섬진강 연작시로 처음 시집을 선보인 그때부터 김용택은 늘 그 자리를 흐르는 섬진강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인용시 1 


새시대다
또 새시대여
또 새시대가 왔당게
또 새시대가 왔어
새시대가 와부렀당게
변화와 개혁을 앞세우고 성역 없이
혁명적으로

신시대가 와부렀당만

그것이 뭣이여
고것이 뭣이냐
긍게 아 그것이 뭣이간디
대처나 고 작것이 무신 잡것이간디
고것이 올 때마다
아무리 둘러보고 뛰어보아도
이 산 저 산 이 물 저 물 앞내 뒷내 다 들여다봐도
이 논 저 논 자갈논까지 다 파봐도
아무리 보리타작 콩타작을 혀봐도
아, 고 잡것이 대관절 어치게 생겼간디,
우리 동네엔 코빼기도 안 보인다냐 (하략)

-「또?」中 

 
시인이 바라보는 섬진강은 결코
맑고 잔잔한 은빛 물결만이 아니다.

김용택의 섬진강은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자연 속에서 음풍농월하는 은자(隱者)의 투명함이 아니다.

세진(世塵)의 언덕 너머 저 혼자서만 깨끗한, 저 혼자서만 영롱한 강물이 아니다.

김용택의 섬진강에는 팍팍한 삶의 더께가 가라 앉아 있으며, 섬진강 마을의 집들은 허물어진 뚤방과 돌쩌귀가 빠진 문짝과 부러진 서까래와 구멍이 숭숭 뚫린 흙벽이 있을 뿐이다. 그가 목격한 섬진강의 작은 마을은 ‘총가구수 23 총인구 54명 현재 40명’이 있을 뿐인 피폐한 농촌 공동체다. 한때는 다정하고 북적였을 공동체의 몰락.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용택의 시에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의분(義憤)과 냉소는 결코 뜬금없지 않다.

그러나 김용택의 시가 김용택만의 시일 수 있는 힘은 다른 데 있으니,


인용시 2

정말로 눈이 부시구나 

봄비 지나간 밤 사이에
풀들이 이렇게나 돋아났구나
논둑길로 집에 가다
쭈그려앉는다
아직 찬바람 찬 서리 남았는데
너는 쑥 아니냐
우리 민해 갓 태어났을 때 손같이 여리구나
민해는 이제 커서 전주에 갔단다
너는 자운영 아니냐
너도 크면 꽃피우겠지
너는 토끼풀 아니냐
너도 크면 푸르러지겠지
너는 띠풀
너는 냉이
너는 잔디
아이고, 너는 시루꽃나물 아니냐
다른 풀들은 아직 싹도 안 보이는데
너는 언제 나서 자라 벌써 이렇게
작고 이쁜 꽃을 피웠느냐
정말이지, 진짜로 눈이 부시구나
그래, 겨울은 을매나 춥고
땅속에 있는 것들은 다 잘 있더냐
나는 안다 봄을 가져온
이 작은 것들아
너희들의 아름다움, 너희들의 외로움을
해 따라 나온 너희들의 그리움을
나는
나는 안단다.


‘변화와 개혁의 새시대’가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버림받은 유배지에 시인은 서 있다. 퇴락한 마을, 그보다 더 슬픈 강변.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름 불리지 못하는 의미 없는 것들 -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시인은 쑥, 띠풀, 냉이, 잔디와 시루꽃나물의 이름을 부른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봄을 가져온 들풀의 외로움과 그리움에 손을 얹어 준다.

강변에 아무렇게나 돋아난 들풀과 야생화의 이름을 불러 주는 잔정. 잃어진 이름, 사라질 존재들은 시인의 명명 행위에 의해 위로 받는다. 주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슬픈 것들, 그것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응시. 그리고 슬픔으로 응결된 이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주는 살가움. 일체의 가식이 허락되지 않는 대지의 원형에서 소외받은 것들이 웃고 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당위적 귀소점, 섬진강.

섬진강변의 들풀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정겨운 시선에서 삶과 도시에서 버려진 우리들은 작은 위로 받을 것이리라. 구멍 뚫린 흑벽이 다시 메워지고, 허물어진 뚤방이 반듯하게 세워지며, 떠나간 사람들로 마을이 다시 북적이는, 그때가 되면 가문 섬진강도 되돌아온 은어떼와 함께 반짝일는지.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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