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찹니다.
속이 따뜻해지는, 이른바 ‘국물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청양 고추로 간을 한 얼큰 순대국도 좋고, 뜨끈한 설렁탕 한 숟갈에 갓 담근 겉절이 한 조각 얹어 먹어도 좋습니다. 전주식으로 콩나물 해장국에 장조림을 얹어 먹는 맛도 일품입니다. 냄비로 끓여 먹는 국물 요리보다는 아무래도 뚝배기 쪽이 좀더 끌리는 계절입니다. 아무래도 이 계절에는 집에서 먹는 김치 찌개도 뚝배기로 끓여 먹어야…. 험험.


지난 주부터 아내가 갈치 타령을 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엔, 우리 동네에서 한 맛 한다는, 갈치 조림집을 찾아 식사를 했습니다. 전골 식으로 나옵니다. 냄비구요. 양념 간은 제 입맛에 맞긴 한데 뭔가 부족합니다. 갈치도 빈약하구요. 이인분에 만팔천원이니 값도 비쌉니다.NG입니다.)


- 좁은 입구를 지나면 갈치 조림집이 즐비하다.


남대문 시장에 갈치 조림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쇼핑도 아니고, 구경도 아니고, 오로지 갈치 조림 그것 하나만 먹으러 갑니다. 낮에는 우리 집에서 남대문 시장까지 승용차로 한 시간이 걸립니다. 만삭한 아내를 위해 운전대를 잡습니다. 바람이 찹니다.


저는 남대문 시장에 온 기억이 없습니다.
갈치 조림 골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낯을 가리는 저는, 상인들게 여쭤보는 것이 저어합니다.
길치인 저는, 발품을 팔아가며 갈치를 찾습니다.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그릇 가게, 옷 가게, 안경 가게, 카메라 가게 사이를 전전합니다. 아, 검색 능력의 부족입니다. 업그레이드 안 된 방향 감지 기능.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맘씨 좋아 보이는 청년께 길을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이리 쉬운 것을…. 제가 헤매던 바로 앞 골목입니다. 무안합니다. 아무런 간판 표시도 없으니 찾기 어렵습니다.



-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아르바이트했던 전주 식당. 유재석이 더 잘 보입니다.


갈치 조림 골목은 좁습니다.
좁고 정겨운 시장 골목을 들어서자 가게집들이 보입니다.
여러 갈치 조림 가게 중, 호남 식당을 찾아 들어갑니다. 정준하의 식신 원정대가 다녀간 곳입니다. 식신 원정대는 시청한 기억이 없지만, 전 정준하의 미감을 믿습니다.
명 쉐프와의 갈등으로 욕을 한 바가지 먹고 있는 정준하. 그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서 박제된 시간을 현재의 시간에 억지로 봉합하려 하면, 왜.곡.이 생긴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 왼쪽에 식신 원정대가 다녀간 흔적이 보인다. 이수근도 보인다.


가게에 들어서자 입구 통로 왼쪽으로 작은 두 개의 테이블이 있습니다.
정면으로 주방이 보이고 주방의 바로 옆, 2층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입구 통로 쪽의 테이블과 주방 사이 왼편으로 안쪽 홀이 있습니다. 아마 새로 확장한 듯 보입니다. 구조가 기하학적이군요.
 

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예쁜 언니가 안쪽 홀로 안내합니다. 홀엔 네 개의 테이블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데이트 중인 남녀 한 쌍이 식사를 하고 있고, 왼쪽에는 두툼한 점퍼를 입은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주문은 간단합니다. “(갈치 조림) 두 개 드려요?”
갈치 조림은 일인분에 육천 원입니다.


채 썬 단무지와 깍두기, 그리고 콩나물 무침이 밑반찬입니다.
밑반찬 맛은 평범합니다.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 갈치 조림이 나왔다. 국물에 밥을 비벼 먹기 좋도록 넓적한 밥그릇.


이윽고 갈치 조림이 나옵니다. 보글보글.
뚝배기는 큰 것으로, 뚝배기의 테두리는 벌겋게 달아 올랐습니다. 테두리에는 끓다 넘친 양념의 흔적들이 보입니다. 깨끗하지 않다거나, 비위생적이다, 라는 생각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좋게 생각하면 세상이 편합니다.
넓적하게 잘려진 조선 무와 두툼한 갈치의 살이 빨간 고춧가루에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붉은 요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색감이 식욕을 자극합니다. 제 입안은 벌써부터 얼얼합니다. 보글보글.


잘 익은 무를 숟가락으로 조금 잘라 먹어 봅니다. 역시 맵습니다. 그런데 그냥 맵지만은 않습니다.
좀 자세히 말하면 ㅡ
매콤하며, 달달하며, 매콤하며, 간간짭짤하고,
매콤하며, 알근알근하고, 매콤하며, 부드럽고,
매콤하며, 달착지근하고, 매콤하며, 얼큰하고,
매콤하며, 컬컬하며, 매콤합니다.
대략 이런 정도의 맛입니다.

맛의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름입니다.
조린 국물을 한 술 떠 무와 함께 밥에 썩썩 비벼 먹습니다. 이거, 맛.있.습.니.다!


- 서비스로 나온 계란찜. 가격표를 보니 계란찜은 오천원.
2인 이상 주문 시 계란찜이 서비스로 나오는가 보다.


갈치를 먹어봐야겠지요.
갈치 한 조각을 앞 접시에 담습니다. 먼저 갈치의 옆 테두리 가시를 발라냅니다. 젓가락으로 테두리 가시만 살살 발라 한쪽으로 치웁니다.
젓가락을 입에 대봅니다. 감칠맛 납니다. 몸이 달아 오릅니다.
공을 들여 갈치의 양쪽 테두리 가시를 정성껏 발라냅니다.


테두리 가시를 모두 골라 내면 이제부터는 쉬습니다.
가운데 가시 살을 중심으로 도톰하게 오른 갈치의 살을 젓가락으로 조금씩 떼어 먹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갈치 살의 속까지 양념이 잘 베어서 텁텁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은 갈치 살은 밥 공기에 놓습니다. 이건 나중에 갈치 조림 국물에 무를 넣어 함께 비벼 먹을 겁니다.
다 발라진 갈치 뼈에 붙은 약간의 살점은 젓가락으론 힘듭니다. 입에 넣어 혀로 살살 발라 먹거나 쪽쪽 빨아 삼킵니다.
음식 앞에선 겸손해져야 합니다. 앙~ 맛.있.습.니.다!


- 체험 삶의 현장에서 박현빈군이 아르바이트했던 호남 식당. 외부 입간판.


밥이 약간 모자랍니다. 한 공기만 더 달라 할까, 하다 참습니다. 남은 국물을 수저로 떠 먹습니다.

맘씨 좋은 사장님(위 사진 가운데), 모자르지 않으세요, 하고 물어봅니다.
“우리 집은 밥이랑 갈치 조림 리필이 돼요. 더 줄게요. 드세요.” 합니다. 사양하지 않습니다.
밥을 더 주십니다. 넉넉도 하셔라, 밥이 고봉입니다. 무를 넣어 끓여 주신 갈치 조림도 도착합니다. 보글보글. (아쉽지만, 갈치는 리필이 안 됩니다.)
갈치 조림의 국물맛이 일품입니다. 맵고, 칼칼한 것에 입안의 모든 감각이 마비됩니다.
이거, 중독입니다. 보글보글.


서비스로 주신, 갈치 튀김도 먹어 봅니다.
갈치 꼬리 부분이라 갈치의 살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림용으론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요. 글쎄요…. 여기의 갈치 튀김에 있는 살만으로도 밥 한 공기는 뚝딱! 해치울 것 같습니다. 과장하자면, 서비스로 나온 갈치 튀김의 살(양)은 웬만한 갈치 조림집의 갈치 양과 비슷합니다. 훌륭합니다.
 

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여기 갈치 조림집 맛은 거의 비슷하다 합니다.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맛이라고 합니다. 저는 다른 가게의 갈치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유명한, 유명해진 곳만 선택하면 갈치 조림 골목은 사라질 것입니다. 종 다양성은 이처럼 음식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가장 허름해 보이는 갈치 조림 집에 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저는 여기 찾느라 한참 애먹었습니다. 아래는 갈치 조림집 찾는 방법입니다.

- 지도에 표시된 곳이 정확한 지점.
대중 교통 이용시,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시장 방면으로 직진해서 찾아가면 될 듯.
숭례문쪽에서 찾을 때는 아래처럼 찾아가면 좋습니.


- 대로변에서는 숭례문에서 한국은행 사이에 있는 기업은행을 찾습니다.
기업 은행 앞 가판 호떡집이 말 그대로 문전성시입니다. 줄이 한참이죠.
들으니, TV에도 출연한 유명한 거리 맛집이라 합니다.


- 기업은행을 오른쪽에 끼고 시장으로 진입.


- 첫 블록을 지나면 오른쪽 모서리에 서울상회가 보입니다.
이 블록 안쪽이 남대문 갈치 조림집. 처음 오는 분들은 장님 문고리 찾기입니다.
여기서 ① 직진하면


- ① 20초만 직진하면 안경백화점이 보입니다. 바로 이 골목.


- ② 아까의 서울상회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선일 이벤트가 보입다.
골목 안으로 갈치 조림집.


길치인 저는, 여기,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촌놈에다 숫기까지 없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왔으면 편했을텐데, 배부른 아내를 보니 선뜻 용기 나지 않습니다. 승용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한국 은행 맞은 편 쪽, 주차장에 주차합니다. 30분에 삼천 원. 이후 10분에 천 원(무슨 차이?). 
주간에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해 보이나,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회현 역 쪽의 유료 주차장이 좀더 싸 보입니다. 그쪽은 기본 30분에 이천 원, 이후 10분에 천 원이었습니다.
남대문 지하 상가 대로 변 공영 주차장이 있긴 하나, 여긴 상인들 차량이 워낙 많아 복잡합니다.


... 흑.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대중 교통 쪽이 낫겠네요.  
저흰 갈치 조림 먹는 데 만 이천 원을 썼고, 주차 요금으로 팔천원 을 썼으니 도합 이만 원입니다. 왕복 기름값을 합하면!
밤이나 새벽이면 주차도 쉽고 좋겠지만, 아쉽게도 갈치 조림 가게는 밤 9시까지만 영업한다고 하네요.
역시... 대중 교통 쪽입니다. 
암튼, 추운 계절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뜨끈 알싸한 갈치 조림 한 숟갈?


덧. 갈치의 어원에 대해.
칼(刀)의 고어는 갈이다. 갈치는 칼(갈)과 모양이 비슷하다 해서 갈치라 명명되었다. 즉 예전에는 칼은 갈이었고, 갈치는 갈치였다.
갈이었던 칼이 표준어 규정의 변화로 칼이 된다. 갈치 역시 칼치로 바뀐다. 어렸을 때는 칼치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언중들의 내재된 의식엔 갈치가 있다. 규정을 바꿨는데도 자꾸만 갈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표준어는 여기에 따를 수밖에. 갈치 > 칼치 > 갈치. 이런 과정을 통해 갈치는 갈치다.
따지고 보면 표준어라는 것은 제 멋대로다. 어떤 것은 어법에 따라 표준어가 되고, 어떤 것은 언중들의 사용 여부에 의해 표준어가 결정되기도 한다.
왜 자장면은 짜장면이 되면 안되는가. 난 오뎅 국물에 소주 한잔은 좋지만, 어묵 국물에 먹는 소주는 왠지 맛이 떨어질 것 같다. 먹거리는 왜 안되고, 먹을거리만 허용되는가. 덮밥은 왜 되고 덮은 밥은 왜 안되는가. 어떤 것은 조어법의 잘못이고, 어떤 것은 비통사적 합성법인가. 
뭐. 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규정대로 하려니, 언중이 울고. 언중을 따르자니, 한글은 망가질테다.
하지만, 역시, 난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더 좋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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