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 『만화를 위한 책』(교보문고, 1997) 읽다.

 

동묘 앞 헌책방에서 사다. 강준만의 것과 이 책 두 권에 오천 원.

만화를 위한 책이라니. 가벼운 제목, 내 삶처럼. 페이지를 슬쩍 넘겨 보니, 책 곳곳에 만화책의 한 부분씩이 발췌되어 있다. 책장 넘기는 재미가 쏠쏠해 보인다. 박재동 화백(전 한겨레 신문 만평 연재. 현 한.예.종 교수)의 『만화! 내 사랑』처럼.

 그러나 박재동의 책과 박인하의 것은 다르다. 만화가인 박재동과 만화 평론가인 박인하의 글이 같을 순 없다. 박재동은 『만화! 내 사랑』에서 만화가로서의 박재동에게 영향을 줬던, 한국 현대 만화를 스케치하듯 그렸다. 반면 박인하는 만화의 갈래를 구분부터 만화의 미적 특성과 한국 현대 만화의 변천사를 소개한다. 즉 만화를 학문적 탐구 대상으로서 파악한다. 그러니 이 책은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은, 가볍지 않은 책이다. 엑ㅡ. 속았다.


 

글이 약간 어렵긴 하지만, 보석처럼 숨겨진 만화가들의 이름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허영만(「각시탈」, 「무당 거미」, 「변칙 복서」)과

 

이현세(「공포의 외인 구단」,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남벌」),

그리고 고우영(「수호지」, 「삼국지」)은 말할 것도 없고,

김수정(「아기 공룡 둘리」, 「일곱 개의 숟가락」, 「날자! 고도리」),

배금택(「영심이」, 「변금련뎐」),

한희작(「서울 손자병법」),

박수동(「고인돌」 - 무려 18년동안 썬데이 서울에 연재되었다고 한다.),

이두호(「임꺽정」),

강철수(「사랑의 낙서」, 「발바리의 추억」),

그리고 양영순(「누들누드」)과 양재현․전극진(「열혈강호」)까지.


(나는 잘 모르지만,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희재의 「악동이」, 오세영의 「고샅을 지키는 아이」, 길창덕의 「꺼벙이」, 황미나의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등도 한 컷씩 만화가 실려 있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었던 대본소 만화는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 중 「대대로 재수 없는 불청객」, 「지옥에 간 불청객」 등이었는데, 이 책에는 고행석이 없다(흑, 아쉽..). 그러고 보니 박봉성의 기업 만화, 독고탁 시리즈, 권투 만화 스콜피온 시리즈(작가가 기억 안 난다) 등도 있었고,. 또 뭐가 있었더라….

 

      문득.

    낡은 만화방의

     허름한 의자.

    삐걱이는 문.

미닫이문.

문틈 새로

 불어오는 바람.

  연탄 난로.

    연탄 난로 위에서

     물 끓던 

    양은 물 주전자.

  주전자의 구멍으로 

올라오던 김.

탁하고 

 매캐한 공기.

  때묻은 소파.

   사선의 햇살.

    불규칙한 먼지.

      철 지난 달력.

    달력 옆 벽 시계.

   흘낏흘낏  

  분침을

가늠하며 

아껴 넘기던

  만화책.

  300원에 여섯 권.

 읽은 만화책은

   안 읽은 것과

  슬쩍 바꿔치기도

 했던,

문득.

           

 

 

한편,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만화의 프레임과 말풍선, 대사 등의 형식을 미학적으로 탐구한 곳. 이 부분을 잠시 살펴 보면,

만화는 만화만의 특별한 예술적 감흥이 있다. 왜냐하면 만화는 다른 예술과 달리 직관적 형상과 비직관적 형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직관이라 함은 언어라는 추상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감상을 직접 접하는 것일테고, 비직관이라 함은 추상화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사유․상상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청각에 의한 직접 체험이 직관, 언어의 사고 과정을 통한 간접 체험이 비직관이라는 얘기. 서울 성곽의 유장한 이어짐을 시각적으로 인지하고 감탄하는 것은 직관. 성석제를 읽으며 낄낄 거리는 것은 비직관.

 

이를 예술에 적용하자면 그림, 조각, 공예, 건축 등과 같은 조형 예술이나 연극, 영화 등의 시각예술은 수용자의 시각이나 청각에 의해 직접적으로 감각되어지므로 직관적인 예술이다. 그리고 문학은 시각에 의해 예술을 수용한 후 이를 상상의 과정을 통해 느낌이 형성되므로 비직관적인 예술이 된다.

 

그렇다면 만화는?

만화는 그림과 글씨의 조화다. 그림(회화)이라는 직관적 경험과 글씨(언어)라는 비직관적 반응을 통해 독자는 만화를 만난다. 그러므로 만화는 직관적인 동시에 비직관적인 예술이다. 다음을 보자.

 

하나의 칸은 작가에게 혹은 독자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다. 일차적으로 칸은 칸들의 연속을 통해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주제를 전달하고 혹은 이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하나의 칸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고 독자는 그곳에서 미의식과 주제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단 하나의 칸 속에서!).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서의 칸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연속된 프레임의 흐름을 통해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의미를 만들어가지만 작가는 하나의 칸을 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보통 프레임을 통한 내러티브 전개와 함께 칸의 미장센 연출은 보완적으로 사용된다. (본책 인용 141쪽)

 

인용문은 칸(프레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설명이다.

위 설명대로 만화에서의 칸은 독립적이며 연속적이다. 상술하자면 하나의 칸은 하나의 완결된 그림으로써 독립적이며, 칸의 미장센(배열, 배치)을 통해 내러티브(사건, 이야기)가 전개되므로 칸은 연속적이란 얘기다. 앞서 말한 직관과 비직관을 이에 적용하면, 독립적 단위로서의 칸은 그림이라는 직관적 요소와 대사라는 비직관적 요소를 담지한다. 그러므로 만화는 직과․비직관적 예술이라는 거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칸의 배치에 의해 생기는 여백을 통해 내러티브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옳지!

우리는 독립된 두 개의 칸의 여백을 통해 사건의 인과를 추론하고 인물의 감정 변화를 감지한다.

그렇다면 칸의 빈 공간에서 사유가 깃들고 상상력의 똬리가 출발한다는 말씀일텐데, 그것이 바로 비직관적 예술로서의 만화의 미학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만화라는 형식은 칸과 그림, 말풍선으로서의 대사 및 나레이션의 종합을 통해 예술적 미의 총합을 완성한다는? 호오~

 

칸의 미학적 특성에 관한 서술은 재밌고, 실제 유효해 보인다.

그러나 만화만이 직관과 비직관의 예술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른 예술 장르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까(역지사지). 예술 - 가령, 회화에서 수용자의 감상 과정은

① 액자 및 그림의 틀의 인지

② 작품에 대한 시각적 수용

③ 찰나적이며 직접적인 감각 반응 [직관적]

④ 선의 형태 및 구도의 조형성, 색감에 대한 분석과 수용

⑤ ④를 사유하고 언어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는 감상 반응 [비직관적].

: 내가 보기엔 그럴 듯 하다.

 

만화를 예술의 치부이자 문화의 서자(庶子)쯤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만화를 저급 예술로 보는 것은 당연히 만화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의 결과다. 이는 박인하의 지적대로 만화에 대한 화인(火印), 즉 주홍글씨일 수 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애정의 과잉에서 오는, (그럴 리는 결코 없겠지만) 만화만의 예술적 고고함에 대한 용비어천가 타령도 곤란하다 생각한다.

 

+ 만화(漫畵) :

 ‘만화(漫畵)’라는 용어는 식민지시대 일본의 망가가 우리 나라에 도입, 이것이 굳어진 것이라 한다. 근대만화 도입 초기에 삽화(揷畵), 해화(諧畵), 그림이야기, 철필사진(鐵筆寫眞) 등의 이름과 혼재되어 사용되던 ‘만화’라는 이름은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을 펴면서부터 만화로 통일되었다. 만화라는 용어부터 일본의 의도대로 이식되고 정착되어서일까. 작가에 의하면 우리 나라 만화책의 90% 이상이 일본 만화의 변종이라 한다. 몰랐던 사실이다.

친일 인명 사전까지 편찬된 이 때, 관습적으로 사용했던 언어의 올가미도 제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화인들의 관심과 일반인들의 애정이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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