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메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메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메라

- 월산대군, [청구영언]

 

늦가을, 인적 드문 강. 고고한 달빛 한 장 물에 젖어 있습니다. 적요.

물결이 숨죽이니 바람조차 한 점 없군요. 드리워진 긴 낚시대. 어찌된 것일까요. 낚시줄의 끝엔 미끼도 바늘도 없습니다. 달빛 한 장과 이따금 서걱이며 굴러다니는 가랑잎이 있을 뿐입니다. 월산대군. 그가 낚으려 했던 것은 고기였을까요, 달빛이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낚싯줄이 만월을 따라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듯 합니다. 물고기 아닌, 달빛을 가득 실은 빈 배는 빈 배일까요. 빈 배가 아닐까요. 비어 있는 배와 욕심 없는 달빛. 안빈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니 락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사진으로 보니 도궁(都宮)이네요.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퍼옴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가 이 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1593년)합니다. 1611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식으로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됩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광장 일부와 조선일보사 건물, 옆의 구세군 교회 및 미국대사관저 모두 경운궁에 속했으니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대한제국 말,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아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새로 즉위한 순종만 창덕궁으로 이어시키죠. 고종의 정치적 영향력이 순종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억류되다시피 남은 경운궁에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내려졌습니다. 물론 일제에 의해서요(덕수궁 안내 책자 참고).

 

덕수궁 돌담길은 걸어 보았습니다. 대한문 앞도 기억나는군요. 여기서 사람을 기다리거나 시간을 기다리거나 줄을 기다리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덕수궁 궐내 구경은 처음입니다.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위성 도시 거주의 귀차니스트는 오늘 처음 덕수궁 산책을 합니다. 서울 성내를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하게 흥분됩니다. 언제부턴가 제 손가락이 코를 파고 있습니다. 긴장되면 코를 후비는 버릇이 도집니다. 구세군 교회 뒤쪽에 임시 주차를 하고 조선일보사 앞쪽으로 천천히 걷습니다. 와이프는 무좀 걸린 곰처럼 자방자방 걸어옵니다. 그 모습이 귀엽습니다. 오랜만에 손을 잡아 줍니다. 무좀 걸린 곰은 방싯방싯 웃습니다.

 

대한문 옆 요금소에서 입장권을 삽니다. 성인은 일인당 천 원이라네요. 앞으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보이고, 그들을 인솔하는 가이드가 찡끗쨍끗 거리고 있습니다. 대한문 앞으로는 덕수궁 수문장들이 보이네요. 칼을 차고 창을 들고, 형형색색의 오색 빛이 화려합니다. 대한문 안쪽, 그러니까 덕수궁 궐내의 금천교 옆으로 근무 교대해 줄 수문장들도 보입니다. 관광객들은 그런 수문장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행인들은 땅에 고개를 박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아까의 그 가이드가 농을 건넸는지 일본 관광객들이 함박웃음이 터집니다. 바람이 불어 옵니다. 수문장의 얼굴 표정은 굳어 있습니다. 겨울의 초입입니다.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다고 합니다.

‘크게 편안하다’는 뜻의 대안문이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크게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대안문, 이 덕수궁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대한문의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입니다. 한양이 창대해지길 바라는 대한문의 염원을 저버리고, 1910년 기어이 대한제국은 간판을 내리고 일제 치하에 들어갑니다. 이쯤 되면 명명 행위는 상징적이라기보다는 반어에 가깝습니다. 반어적 명명법입니까. 안타깝습니다.

 

 

- 대한문.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퍼옴.

 

잠시 되돌아가 보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도․보호․관리․감독의 권리를 승인 받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운궁 안팎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고 당시 고종과 대신들에게 보호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합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고종과 대신들이 조인을 거부하자, 이토는 찬성하는 대신들[을사오적 -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만 데리고 조약을 체결합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고, 국내는 반일 열기로 고조되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사람들의 분노의 불길이 덕수궁을 휘감을 듯 합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일본인 관리를 여러 부처에 임명하죠. 형체만 남은 대한제국은 1910년 결국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구요.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과, 대한문을 둘러싼 분노의 격분, 시대를 뛰어넘어 대한문 앞에서의 촛불과 노제까지. 파란만장한 덕수궁입니다.

 

금천교를 지나 왼쪽의 산책로를 걷습니다. 세종대왕의 동상이 보입니다.

응? 세종대왕의 동상이라뇨? 네. 분명 세종대왕의 동상입니다. 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집이었고, 세종의 생전에 덕수궁은 존재하지 않았습죠. 세종이 제아무리 성군이었다 하더라도 증증손자의 집터까지 점지하신 것은 아닐 테니, 덕수궁의 세종상은 엉뚱해 보입니다. 세종대왕의 릉은 여주에 고이 단장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덕수궁은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 해봅니다. 덕수궁에서 을사늑약을 반면교사하며, 세종상을 보며 선군 정치의 전범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이거 코미디더군요. 충무로엔 이순신 동상이 없고, 세종로엔 세종대왕 동상이 (얼마전까지) 없었습니다(뉴스 하나 링크 겁니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과 관련한 블랙 코미디 가 잘 정리 되어 있습니다).

 


 

- 중화전. 외국인 관광객들이 중화전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뒤로 중화전이 보입니다.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덕수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전입니다. 중화문과 중화전 사이로 품석들이 있습니다. 당시 대신들은 허리에 패옥(호패 정도의 개념)을 차고, 중화전 앞 품석 뒤에 앉아 임금께 항복무강 인사를 드리거나, 머리를 찧거나 했겠지요.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곳에도 패옥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몰랐던 사실 하나.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조선 궁궐의 정전 중 유일하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는 모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중화전은 대한제국 출범 후 지어진 건물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거라 합니다.

대한제국…. 대한민국…. 대한국민….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단어들이군요.

 

 

- 덕수궁 미술관. 사진전 중이고, 입장료는 육천 원입니다.

 

중화전을 뒤로 하고 석조전으로 향합니다.

석조전 옆, 덕수궁 미술관에는 사진전이 있습니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개인전입니다. 지난 여름, 오바마 취임 후 열린 첫 한미 정상 회담에서 2MB 가카께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배병우의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선물했다 합니다. 배병우의 사진 주제는 제주와 나무,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네요. 김용갑과 어떻게 다를까요. 미술관 표는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석조전을 봅니다.

공사가 한창인 석조전 전경에 분수가 있습니다. 동양의 정원 개념은 건물 뒤의 후원으로 배치하는 게 관례입니다. 오솔길을 만들거나 정자를 짓죠. 재력가인 경우에 후원에 폭포를 꾸미기도 합니다. 담양의 소쇄원이 대표적인 경우죠. 그런데 석조전은 서구형으로 건물 앞에 공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분수가 있네요.

물의 속성은 흐른다는 것이고, 흐르는 물은 중력에 지배받습니다. 자연의 순리인 거죠. 물은 스스로 흘러야 합니다. 물을 가두면 탈이 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발달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보든 댐이든. 한편 인공으로 만든 분수는 중력에 도전합니다. 다분히 서양적 사고의 문화적 형질입니다. 석조전의 분수를 어떻게 감상해야할까, 동도서기라고 해야 하나요, 서도서기라고 해야 할까요, 갸웃갸웃. 헷갈립니다. 안내 책자에 의지하니,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 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네요. 그렇군요. 우리의 근대화는 역시 서구화였군요. 쓴물 같은.

 

 

- 정관헌입니다. 무한도전에서 봤습니다.

 

공사 중인 석조전 뒤, 아담한 후원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준명당, 즉조당 뒤의 후원을 천천히 걸으면,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이 나온다고 하지만, 함녕전도 현재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습니다. 다 공사 중입니다.

함녕전 뒤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라는 뜻의 정관헌(靜觀軒)이 나타납니다. 정관헌은 그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합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았는데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 즐겼습니다. 지난 무한도전을 보니 고종은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라 했다 합니다. 서양에서 건너온 끓인 국물이란 뜻일까요. 정관헌에서 양탕국을 마시는 고종을 그려보니 좀 우습고 재미납니다. 어묵 국물보다 오뎅 국물이 시원하듯 커피보단 양탕국이 좀더 구수할 것 같지 않나요.

  

후원을 산책합니다.

저 같은 까막눈이 궁을 완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릅니다. 이럴 때 즈나나 바피(제 선배, 지식의 샘의 새 별명입니다)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생각합니다. 궁의 성립과 역사적 상흔, 전(殿)의 위치와 배열, 들보의 종류와 추녀의 각도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벌일 텐데 말입니다. 일천한 지식으로 궁을 보자니 안 보이고, 마른 감수성으로 궁을 느끼자니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너무 강하군요. 벽 곳곳에 덕지덕지 처바른 시멘트가 눈에 밟히구요.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심안이 없는 저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 후원의 소나무. 그리고 하늘.

 

해가 지려는군요. 되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어느 날 고궁을 걸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궁에서 본 것은 서걱이는 시간과 위치를 잘못 잡으신 세종, 그리고 지나치게 선명한 단청의 나무 들보.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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