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기 (2009.07.07~08)

 

 

 

 - 느리게 걷기.

 

들어가며

 

영등포역에서 밤 10시 58분에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선다. 9시 50분, 버스를 탔다.  강남 근처에 들어서니 차가 막힌다. 10시 20분, 뱅뱅사거리. 이대론 늦겠다 싶어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탄다. 코레일에 전화를 해보니 이번 열차를 놓치면 내일 오전 6시 30분에 떠나는 첫차를 탈 수 있단다.

 

마음은 조급하고, 택시는 굼뜬다.

 

10시 56분, 영등포역에 도착.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 뜀박질을 실컷해 매표소에 도착하니 11시.

늦었다.

여행 끝 - 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리는 안내 방송. - 여수행 열차 탈선 사고로 열차 시간 지연! HA!

11시 10분에 부산행 열차를 탄 후 수원역에서 하차 후 여수행 열차로 갈아타란다.

6년 만에 가는 혼자 여행, 이렇게 끝날 뻔 했다. [각주:1]에서 500원을 넣고 인터넷 검색. 날씨를 확인. 오늘(7일)의 강우량은 어제 발표와 같이 50~100mm. 다행히 내일(8일)은 지리산 동부 방면으로 1~5mm. 다시 맥주를 하나 사서 마셔 보지만 말똥말똥. 오랜 기간의 야행성 습관이 몸에 배어 그렇다. 나는 감기 걸린 박쥐마냥 쭈뼛쭈뼛하고 있다. 익산, 전주를 지난다 - 상념.

 

남원 부근부터는 차창에 빗줄기가 스치고 조금 뒤 비 내리는 구례구역사로 나는 들어선다.

원래는 새벽 3시 30분에 구례구역에 도착해야 했으나, 열차 탈선 사고로 시각은 예정보다 늦은, 4시에가까워지고 있었다.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해야 할 테니 밤에 잠을 좀 자뒀어야 옳았었다. 마음에 걸린다.

 

열차에서 내리니 등산 배낭을 맨 사람이 몇 명 보여 안심이 된다. 적어도 나 혼자는 아니구나. 발정난 나방처럼 지리산으로 이렇게 찾아들었다. 우리는 아마 이틀 동안 앞서거니 뒷서거니 비슷한 산행을 할 것이다. 혼자 멋쩍게 웃어 본다.

 

구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성삼재로 가는 버스는 4시에 출발한다. 현재 시각이 4시니 물리적으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이동할 수 없다. 역전에서 택시 기사님이 가격 흥정을 하고 있다.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둘은 화엄사로 가는 택시를 탔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는 얍삽한 성삼재행. 비 오는 오늘, 그 부자(父子)는 화엄사[각주:2]를 오를 수 있을까.  

 

혹시 이 정도 비면 입산 통제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지리산 베테랑 택시 기사님은 어림없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가격 합의를 본다. 두당 만원. 나쁘지 않다. 빗방울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성삼재행 도로를 택시가 구불구불 오른다.[각주:3]

 

1일차

 

오전 5시. 성삼재.

 

성삼재부터 등산을 시작하는 살쾡이 같은 우리 넷은 성삼재 화장실에서 산행 채비를 갖춘다. 나는 나대로 스틱 길이를 조절하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우의도 입고 분주하다. 손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 매고 헤드 랜턴까지 쓰니 완전 무장한 전사 같아 우쭐해지며 기분이 좋다. 야옹.

 

같이 택시를 타고 온 일행 중 한 분[각주:4]이 우비가 없다 해서 여분의 우비를 준다. 어떤 분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셔 이를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우리는 별 말이 없다. 발디딤이 제법 경쾌하다.  시각은 5시. 보슬비가 기분 좋다.

 

오전 5시 30분. 노고단 대피소.

 

대피소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우리가 첫 등산객이다. 취사장 불을 켜고 짐을 다시 정비한다. 구례구역부터 여기까지 동행한 들뜬 살쾡이들, 오늘의 행선지를 확인해 보니 둘은 연하천, 나는 세석, 또 한 분은 장터목까지다. 여기서 연하천은 천천히 가도 6시간. 연하천에서 세석까지의 거리는 3시간. 세석부터 장터목까지의 거리가 또 2시간 정도이니 각자 마다 걷는 분량이 꽤 차이 난다. 

 

연하천까지 가실 분들은 시간 여유도 많으니 식사를 하고 가시겠다며 물을 끓인다. 보글보글 라면이 끓자 노고단 산장 전체가 아늑해지는 기분이다. 기념으로 같이 친한 척 사진도 찍고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나는 내놓을 간식이 없어 미니 초코바를 두 개씩 나눠 드렸다.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우리 넷은 왠지 더 친숙해진 것 같다. 야옹.

 

밖에 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노라니 산님들이 속속 도착하신다. 산님들의 표정이 밝지 않은데, 들으니 밑에서 입산통제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한다. 입산통제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장터목까지 가실 분은 화장실에 가셨는지 보이질 않고 나는 혼자 조급해 서둘러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산행을 시작한 것은 과욕이었다. 대피소에 머물며 일기(日氣)를 주시해야 했어야 옳았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뒤늦게 반성한다.

 

아침 식사를 하시는 분께 양해를 구해 소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먼저 출발한다. 이 한 모금의 소주가 없었다면 산행은 많이 힘들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현재 시각 대략 6시 정도.

   

 - 비오는 노고단 대피소. 화질이 영 안 좋다.

 

잘 닦여진 노고단을 오르고 이제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숲길로 들어섰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발이 축축하다. 곳곳에 반달곰 출현 주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지리산 반달곰이라. 해가 뜨기 전이고 인적도 없는데다 비까지 오니 왠지 으스스하다. 정말 어디선가 곰[각주:5]이 나타날 것만 같다. 곰은 위험하고 나는 완전히 무방비다. 나는 곰을 잘 설득할 자신이 별로 없다.

 

그래도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지리산이라 생각하니 새벽 숲길은 싱그럽기까지 하다.

 

고인물을 피해 걸었는데도 언제부터인가 깔창이 축축하다. 내 깔창은 육각형 벌집 모양으로 깔창 전체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등산화 바닥부터 그 틈새로 물이 올라온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이 재밌다.

 

오전 7시 즈음. 임걸령.

 

임걸령까지의 길은 비교적 평이해서 속도가 제법 붙는다. 임걸령 근처에 와 배낭을 조절하고 있는데 저 뒤로 산님이 한 분 오신다. 장터목 예정지라는 그 분이다.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갑다.

 

낭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배낭 뒤를 부탁드렸다. 사람 좋아 보이게 웃으시는 그 분. 한 시간에 이 정도 왔으면 꽤 빨리 온 거란다. 이 정도 속도면 오늘 천왕봉에도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며 나를 칭찬해 준다. 칭찬을 들은 나는 배시시 웃는다.

 

지금 시간이 7시란다. 시간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다. 인간은 늘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존재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확인으로 자신이 규정된다.

 

아까 노고단 대피소에서 이 분이 입고 계신 노란 T를 나는 봤다. T셔츠에는 '우리의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49재라 온 거예요? 그 분, 말씀하신다. 천왕봉으로 해서 봉하로 내려갈 거예요, 저 말고 딴 팀들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눠 가는데 모두 봉하에서 만날 거예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집에 걸어 놓은,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던 조기(弔旗) 생각이 났다. 맞아, 곧 49재구나. 지금쯤 우리집 기(旗)도 비를 맞고 있을까.

 

임걸령을 지나면 연하천까지 식수를 보충할 곳이 없기 때문에 임걸령에서 나는 그 님[각주:6]과 헤어진다. 나는 연하천에서, 헤어진 님은 벽소령에서 각자 점심 식사를 해결할 것이니 우린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리라.

 

마음 속으로 안전 산행을 빌며 임걸령 샘터로 내려가니 이거 낭패다. 비가 많이 와 흙물이 나온다. 이건 정말 낭패다. 아쉬운 대로 물을 조금 뜨고, 배낭을 멘다. 비가 거칠다.

 

오전 7시~11시. 노루목. 화개재. 토끼봉. 총각샘.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비가 많이 와 핸드폰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걷는다.

 

노루목을 지난다.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바람이 세다. 봉우리 정상은 강풍이 불어 몸을 움츠리고 걸어야 했다. 삼도봉 부근에서는 급기야 번개와 우레까지 친다. 반사적으로 몸을 굽힌다.

 

등산화는 산행 초기부터 물에 젖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물에 빠진 긴팔원숭이처럼 난 느리게 걷고 있다. 어기적- 어기적-. 긴팔원숭이 하나가 배낭을 메고 비 오는 지리산을 걷고 있었다. 어기적- 어기적-.

 

화개재로 내려가는 계단 퍼레이드. 여길 잘못 걸으면 나중에 하산이 힘들어진다. 이 와중에도 하산 걱정을 하며 뒤로 돌아 거꾸로 한 계단씩 내려간다. 여긴 꽤 길다. 한 손엔 스틱을 잡고 한 손엔 로프를 잡으며 걷는다. 다시 말하지면 여긴 꽤 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손가락이 약간 찢어졌었는데 이때 로프를 쥐고 내려오다 생긴 상처였으리라.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화개재까지 내려오니 땀이 식었다. 춥다. 지리산에 오기 전 지식의 샘은 내게 부탁을 했었다. 자기 대신 뱀사골에 소주 한 잔 뿌려주라고, 고정희를 위해. 아무래도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땀이 식었고 춥다. 아까 노고단 대피소에서 소주 한 모금을 얻어 마시지 못했다면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춥다. 배낭에서 미니 초코바를 꺼내 먹는다. 이가 덜덜 떨린다.[각주:7] 먹을 만한 식수가 없어 아까 임걸령에서 뜬 흙물을 조금 맛보았다. 물을 바닥에 쏟아 버린다. 미니 초코바를 다시 꺼내 먹는다. 손이 떨려 비닐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 먹는다. 이 사이로 낀 초콜릿을 혀로 핥으며 산을 오른다. 좀 낫다.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잊을만한 즈음 곰 출현 주의 경고문이 보인다.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두렵다. 난 곰이 정말 무섭다. 내가 싫어하는 존재 1위. 바퀴벌레 2위. 쥐 3위. 칠성장어인데, 3위의 자리를 곰으로 바꾸고 싶을 정도다. 곰을 설득할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  

 

아침이 훨씬 지났을텐데 하늘은 흐리다. 오름길에서는 허벅지의 근육통, 내리막길에서는 무릎이 말썽이다. 길이 미끄러워 한발 한발 조심해 걸어야 한다. 넘어져 다치면 큰일이다. 스틱을 꾹꾹 눌러 걷는다. 자꾸만 스틱이 돌부리에 걸린다. 신경 쓰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난 토끼봉이 싫다. 귀엽고 정겨운 이름, 토끼봉. 이 녀석 실체는 해발 1,537m다. 뭐냐. 아무리 지리산맥 자체의 고지가 높다 해도 토끼봉이란 이름과 해발 1,537m는 아무리 양보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토끼가 일본원숭이를 헤드락한다. 난 넉다운이다. 백기를 든 일본원숭이 하나,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다.

 

곧 있으면 총각샘이 나타날 것이다. 총각샘[각주:8]까지만 가면 연하천 대피소는 금방이다. 지도는 꺼내 볼 수도 없으니까 이정표만 믿고 거리를 짐작해 보며 걷는데 이게 또 이상하다. 아까 전에 지나온 이정표에서는 연하천 산장까지 2.7km였는데, 한참을 걷고 다음의 이정표를 확인하니 2.5km다. 또 한참을 걷고 이정표를 보니 1.7km고, 다음 이정표에는 1.8km다.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연하천, 연하천, 너무 먼 연하천.

신은 무겁고 비는 여전히 진행중.

 

오전 11시. 연하천 대피소.

   

 - 우중의 연하천 대피소

 

연하천에 도착해 취사장으로 들어서니 두 명의 산장 청년이 청소하고 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냐고, 식사도 못하셨겠네요 라며 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연하천은 텅 비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새벽에 등산객을 모두 하산시켰고 그래서 현재 시각 지리산 전 구간에서 산행을 하고 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한다. 나는 머쓱해 하며 웃어 주었다.[각주:9]

 

배낭을 풀고 옷을 벗어 말렸다. 손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양말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봤더니 발이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팬티까지 홀딱 벗은 다음 수건으로 몸을 닦고 츄리닝으로 갈아 입으니 한기가 가신다. 물을 끓여 밥과 라면으로 아침 겸 점심을 떼운다. 산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연하천에는 물 끓는 소리가 포근하다. 

 

소주도 한 모금, 한 모금, 한 모금.

살 것 같다.

노곤하다.

 

- 취사장에서 찍은 대피소 주변 풍경, 근사하다.

 

밥을 먹고 밖을 보며 앉아있으려니 산장 청년이 온다. 사뭇 비장한 표정이다.

지리산 지역의 호우 주의보가 방금 호우 경보로 바뀌었으니 하산을 하든지 연하천에서 자고 가든가 선택해야 한단다.

 

딜레마.

어떡하나,

잠시 시간을 달라 하고,

지도를 살핀다.

커피를 마신다.

 

얼마가 더 지나니 산장지기님이 오셔서 빨리 내려가라고 하신다. 음정으로의 하산길을 설명해 주시며 이젠 재워줄 수도 없다고 하신다. 700미터 정도 내려가면 음정 하산길 표지판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가면 음정 마을로 갈 수 있다 한다. 벽소령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고 못 박으신다.

 

그 길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아니, 꼭 한번 걷고 싶은 길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 지리산 전체 길 중 가장 인간다운 길, 가장 평화로운 길. 다만 그 길을 오늘 걷는 게 싫었을 뿐. 이렇게 하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 출입 통제된 지리산(사진은 벽소령)

변명하자면 나는 출입 통제 사실을 모르고 산행했다.

 

산장지기님의 강권으로 나는 이제 떠나야 한다.

다시 등산복으로 갈아 입는다.

이 느낌, 말로 하기 무척 힘들다.

처음부터 젖은 옷을 벗지 않았으면 모를텐데,

몸을 말리고,

다시 젖은 옷으로 갈아 입는 이 느낌, 무척 곤혹스럽다.

젖은 양말을 신을 땐 차라리 울고 싶을 정도였다. 

젖은 신을 신고, 배낭을 꾸린다. 

대머리원숭이로 변신 완료.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못 되었다.

연하천에서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소비를 했다.

연하천을 등지고 길을 나선다.

 

오후 4시. 벽소령 대피소.

   

- 비 오는 벽소령 대피소, 흡연 구역이 있어 떳떳하게 담배를 태울 수 있다.

벽소령 대피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장이다. 맑은 날도 예쁘지만 비가 내려도 이렇게 예쁘다.

 

일부러 음정 하산길 표지판을 놓친 것은 결코 아니다. 믿어주라.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지만 길이 매우 미끄럽기 때문에 한발씩 조심스럽게 내딛느라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까닭이다. 꽤 걸었다. 벽소령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음정 하산길을 지나쳤다 보다. 되돌아가기도 애매하다. 내친걸음이다. 벽소령에서 재워 달라 떼 써보고 안 되면 음정으로 내려가면 된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역시 여기에도 등산객은 보이지 않는다.

벽소령 직원분도 연하천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모두 하산시켰단다.

음정으로의 하산길과 예상 시간을 물었다. 계산해보니 빠르게 걸어도 음정으로 내려가면 서울 가는 버스를 탈 수 없다.

 

나 부탁드린다, 하루만 재워주세요, 내일 아침에도 비가 오면 두말 않고 하산할게요. 직원분 잠시 고민하시더니 허락하신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오는 내내 어떻게 하면 불쌍하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기서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나는 비장의 무기도 선보이지 않았는데 직원분이 1박을 쉽게 허락해서 자뭇 허탈하기까지 하다.

나는 아직도, 용케도, 지리산에 있다.

 

- 벽소령 대피소, 여기서 하루를 묵었다.

 

취사장에 내려가서 옷을 갈아 입는다.

쾌하다.

대피소 한켠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들어 읽는다. 이명박,『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산중의 적막한 산장 분위기와 이명박의 책. 그 불협화음의 느낌이 재밌다. 고소(苦笑)하다.

 

옷을 넓게 펴서 말린 후 핸드폰을 충전한다.

벽소샘에서 간단하게 얼굴도 씻는다.

저녁으로 베이컨을 구워 먹고 소주를 마신다.

고즈넉한 산장,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듣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눕는다.

적당한 취기와 졸음기, 그리고 미열로 일찍 잠이 들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의 하룻밤은 이렇게 저물어 간다.  

- 2편에 계속

  1. [/footnote] 억울할 뻔 했다.

    하지만 잘못은 내게 있었다. 일찍이 황지우도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고... 그 두근거림과 기다림의 능동성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나는 도무지 기다리는 게 싫다. 나는 이렇게 매사에 안이하다. 수양이 덜 된 탓이다.

    어쨌든 열차에 오른다. 뛰어 오느라 숨은 가쁘고, 마음은 기쁘다.

     

    잠이 안 올 것 같아 열차에서 맥주를 하나 마셨으나 말똥말똥.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쉽지 않다. 열차[footnote]열차, 정말 좋다. 인터넷도 되고, 노래방도 있다. 열차, 정말 좋다. 반했다. 무궁화호가 이정도인데 새마을호는 훨씬 더 좋겠지. 궁금하다. [본문으로]

  2. 예전에 지식의 샘과 화엄사부터 출발하는 종주를 한적이 있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본문으로]
  3. 나는 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두 번 오른 적이 있다. 이거 공중 곡예다. 꼭 한번 타보시라. [본문으로]
  4. 수원이 집인 프로그래머. 이 분 말씀에 의하면 자신은 무릎이 안 좋고, 인수봉 암벽 등반이 취미라 한다. [본문으로]
  5. 물론 나는 곰과 친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 동네 곰이다. 게다가 난 지금 숏다리 오징어가 없다. 곰 대비는 전혀 못했다. 준비 부족이다. 이 역시 반성한다. [본문으로]
  6. 인천에 사신다는 이 분. 하이닉스에 다니신단다. 그런데 올초에 경영난 때문에 사측에서 무급휴가를 종용했다고 한다. 씁쓸하다. 아, 그리고 이 분 것으로 추정되는 스틱 하단을 내가 주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 가는 2/3 지점에서. 벽소령 대피소에 맡겨 두었으니 찾아 가시라. [본문으로]
  7. 모자를 두고 망설였다. 집에 있는 카키색 벙거지 모자를 쓸까, 얼마전 홈플러스에서 산 밀짚 모자를 쓸까. 해가 비치면 챙이 넓은 밀짚 모자가 제격일테고, 간편하기로는 벙거지가 나을 것이다. 그럼 우중 산행은 어떨까. 고민하다 밀짚 모자를 쓰고 갔는데, 이건 완전 좋은 선택이었다. 밀짚 모자가 웬만한 비를 다 막아줘서 비교적 몸이 덜 식었으리라. 밀짚 모자, 이거 좋다. 추천. [본문으로]
  8. 나는 총각샘에서 두 번 비박을 했었다. 여긴 찾기 쉽지 않다. 능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내판이 있는 것도 아니라 대개는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번에 보니 총각샘으로 올라가는 숲길을 공단측에서 로프로 막아 놨다. 아마 나처럼 불법 취사했던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반성하고, 반성한다. 불.법.취.사 및 야.영. 금.지. [본문으로]
  9. 실은 최소 한 사람 더 있다. 나보다 앞선 그 분은 연하천에 안 들르고 바로 벽소령으로 갔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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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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