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동두천』(문학과 지성, 1979) 읽다.

 

녹슨 과거의 기억과 더러운 그리움

 

일전에 즈나나 바피는 시와 생활의 관계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등 따시고 배부른 시인의 시는 치열하지 않다.’는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마종기, 정희성, 김명인, 최두석, 그리고 나희덕(이들의 공통점은 교수)을 열거하며 이들 최근작의 자연 친화를 냉소했다. 곧 이들의 시는 시의 완숙함을 표방하지만, 실은 시세계의 단조로움에 다름 아니라는 말씀.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 반례를 말하려 하였으나, 상기 시인들을 읽지 못했으므로 묵묵히 소주만 마셨다.

2009년 말. 어디선가 김명인의 시를 읽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너와집 한 채」. 이 시가 어떤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즈나나 바피의 근거가 정확했다면 이 시는 김명인의 초기작과 최근작의 중간이 될 것이다. 시 「너와집 한 채」는 삶의 질곡과 너울에 치이고 상처받은 비애의 공간이다. 음풍농월의 고답적 풍류가 아닌, 세진에 지친 영혼들의 아픔이 답쌓인 독백이자 소망이다. 나는 이 시를 읽고 한동안 안개를 헤매듯 몽환적인 상태가 되었다. 김명인이 궁금해졌다. 책장 구석에 오래 방치된 김명인의 첫 번째 시집, 『동두천』을 꺼낸 이유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에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중략>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 「동두천 Ⅰ」 중

 

시인은 정거장에 서 있다. 간이역의 정거장엔 남루한 삶의 더깨처럼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기찻길은 정거장을 사이로 이쪽과 저쪽을 잇는다. 길은 길로 이어져 있다. 눈 내리는 어둠 사이로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삶의 무게에 지쳐 침묵하고 있는, 저마다의 슬픈 사연이 있는 승객들을 태우고,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난다. 어둠 속으로, 눈 내리는 어둠 속으로. 스스로가 눈물이 되어 시인은 떠난다, 캄캄한 기억의 어둠 속으로.

김명인의 기억 속 과거는 ‘아무도 참혹해서 바로 보지 못’하는 참혹함의 세계다. 유년 시절, 폐광이 된 광산 근처의 와실. 그는 그 시절의 가족을 ‘전등불에 눅눅해진 얼굴’로 기억한다. 광부들은 ‘검푸른 얼굴’을 하고, ‘쓸쓸한 가래침’을 뱉거나 할 뿐. 도처에 가득한 절망의 그림자는 그 또래의 유년기가 품을 최소한의 희망마저 절도해 간다.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 그는 아메리카America로부터 버려진 혼혈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짐을 선고 받은, 동두천의 기지촌 아이들. 피부에 찍힌 혼혈의 주홍글씨. ‘태어나 욕된 세상’이 된 동두천. 그리고 동두천의 어딘가에서 수취인을 찾지 못해 떠돌 편지의 사연들.

베트남 참전, 무자비한 살육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벌거벗고 가랑이를 벌리는 내 누이, 루이’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을 경험한다. 직․간접의 경험에서 머리가 아닌, 피멍든 육체로 체감하는 고통과 무력감. 체화된 김명인의 아픔은 그래서 구체적이다. 참혹과 절규의 소용돌이에서 김명인이 느끼는 아픔은 시대적․사회적 고통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 ‘엉겅퀴 자욱한’ 과거의 체험은, 그러나, 과연 과거의 체험으로 종결된 것일까.

 

ⅰ) 그리고 우리들이 남아서 / 새로 낳은 아이들만 비겁하게 / 캄캄한 풍경 속으로 바칠 뿐

ⅱ) 강을 건너 공장에선 아이들이 한 조각 빵을 움켜쥐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ⅲ) 우리는 떠났다 어리석게 / 그 세상 속에도 좋은 일들이 /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 믿음이 만드는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본래 시간이란 직선적이며 그와 동시에 방향성이 내재해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른 내일을 바라듯, 꿈꾸는 이들에게 시간은 목표가 있는 직선이다. 이 시간의 단선적인 흐름은, 곧잘 희망이라는 추상화된 형태로, 잠언가들의 경구에 회자되지만,

그러나 김명인의 시에서 시간성은 순환적 원운동에 가깝다. 이 원의 중심엔 ‘어둠’으로 상징되는 삶의 부조리가 내재해 있다. 이 핵의 주변으로 각기 다른 시간의 원자들은 원심력이 절취된 상태로 부유한다. 과거와 과거(이전의 시점과 비교할 때의 현재)와 과거(제일 앞선 시점과 비교할 때의 미래)는 탈출하지 못하는, 파놉티콘[원형 감옥]에 갇혀 있다. 과연 그렇다. 어제[과거]와 똑같은 오늘[현재]이고 보면, 오늘은 어제와 같은 시간의 순환일 뿐인 것이다.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더러운 그리움. 처연한 존재들이여.

중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높게 활강을 한다 해도 결국은 지상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대기를 벗어난 자는 미아이다. 시간과 공간, 어디에도 규정받지 못하는 대기의 미아. 존재하는 어떤 이는 시간의 중력과 공간의 인력에 구속된다.

비겁하게 녹슨 과거를 외면하며, 비겁하게나마 살겠다는 시인은 사뭇 비장한 결의를 한다. 하지만 여하한 노력에도 우리의 아이는 빵 한조각을 손에 움켜쥐기 위해 공장의 부속품이 될 뿐이다. 결국 부질없는 내일이란 부질없는 과거의 이음동의어다. 김명인의 시를 녹슨 기억으로, 그리고 기억의 중력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더러운 그리움이라 표현한 이유이다. 무엇이 우리를, 녹은 눈물이 된 우리를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가.

 

고산행

 

열차는 평산을 지나쳤다 한다.

산역에서는 낡은 의자에 기댄 남자들 두엇,

불을 끄고 통과할 어느 역에도

어쩌면 정거하지도 않을 기차를 우리들은 기다렸다.

밤은 깊고 자정 가까이

달은 떠올라 헌 거적대기 같은 빛이

세상을 덮어 주기도 하였지만

오늘 가지 못하면 내일

갈 수도 없고

마침내 영영 가지 못할 그곳에 가기 위하여

저쪽 어느 역에서도 우리들처럼

정든 마을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발 빝에서는 버리고 가는 낙엽 또는 떨어져 뒹구는

젖은 노자 몇 닢.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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