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미쳐야 미친다』(푸른 역사, 2004) 읽다.

 

과유불급의 시대, 불광불급(不狂不及) 엿보기

 

편한 독서를 하다.

이 책의 제목인 불광불급(不狂不及)은 미치지 않고는[不狂] 미칠 수 없다[不及]는 뜻이다. 어순을 고쳐 말하면 미치려면[及] 미쳐야[狂] 한다는 것이며, 이는 한 분야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미치는 것[狂]은 무엇을 통해 가능한가. 그것은 벽[癖-습관]에서 비롯한다. 벽[癖]은 흔히 주벽, 도벽, 낭비벽 등의 부정적 어휘로 쓰이는 것이 상례이나, 서벽[書癖-글 읽기를 즐기는 습관]이나 고벽[古癖-옛 것을 즐김] 등 고상한 용례도 있다. 대상에 대한 습관[벽癖]이 굳어져 대상과 나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 광[狂]이다. 피아의 오롯한 구별이 사라져,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도달하는 것이 참된 미침[狂]이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이는 호접지몽의 극점이다.

 

여기 벽[癖]에 들린 사람들이 있다.

김군은 아침에 눈 떠 꽃밭으로 달려가 종일 꽃을 본다. 그는 여명의 꽃망울과 이슬 머금은 꽃봉오리와 정오의 꽃과 노을과 함께 소멸되는 꽃을 관찰한다. 이른바 화벽[花癖]이라 할까. 김득신은 「백이전」을 1억1만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등은 2만 번을 읽었다. 김득신의 독수기를 보면 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를 않고 만 번 이상 읽은 책만도 36편이다. 꽃에 미친 김군은 만 가지 꽃을 그린 『백화보』를 완성했고, 후세 사람들은 둔재 김득신의 독수기를 읽고 그를 바른 독서 자세의 사표로 삼았다 한다. 천문학자 김영은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기하학과 천문학에 관한 여러 연구를 통해 해시계 지평일구를 만들고 이후 역관을 역임, 종 6품의 벼슬을 지냈다. 이상은 벽[狂]으로 도달[及]한 예다. 그러나,

 

하게 보면 이 책의 표제[미쳐야 미친다]는 떡밥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작 책의 표제에 해당하는 내용은 1부의 [벽에 들린 사람들]이 전부. 유재겸의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 등에서 가져온 사례는 엷지 않은가 한다. 표제대로 한다면 미쳐야(狂 - ①) 미치는(及 - ②) 것인데, 여기 소개된 것들은 ① 아니면 ② 둘 중 하나가 부족하다. 즉 미치지 않은 사람(①)의 미친 이야기(②)거나, 미친 사람(①)의 미치지 못한 이야기(②)라는 거다. 미친 사람(①)의 미친 이야기(②)로서의 총합을 기대했던 독자로선, 그러니까, 낚인 거다.

표제 뿐 아니라 부제[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역시 떡밥이다. 부제가 주는 의미는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의 내면 세계 탐구’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 막상 이 책의 어느 부분에도 이들의 내면 세계를 관통하는, 교집합이 안 보인다. (혹시 그 교집합을 사대부의 풍류나 지절이라 말하지는 말자. 그것들은 이제는 상식이니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조금 더 날서게 말하자면, 1부의 [벽에 들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2부의 [맛난 만남]이나 3부의 [일상 속의 깨달음] 모두 야사 정도의 가십 뉴스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라는 제목이 무색하다. 표제와 부제를 합해 의미를 산출하면 조선 지식인의 내면은 미침[광狂]이라는 건데, 그러기에 2, 3부의 내용은 너무 단조롭고 평범하다. 내가 보기엔 아무도 안 미쳤다. 글쓴이도 그걸(미치지 않았다는 것) 알기에 2, 3부의 제목이 위와 같은 것일 게다. 게다가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 몇이 조선 지식인을 대유한다고 항변하는 것 또한 궁색하다. 그러니 책의 제목은 떡밥이 맞다.

( + 표지가 화려하면 떡밥이 확률이 높다. 글쓴이 정민의 공력을 생각건대 제목의 떡밥 콤보는 출판사의 수작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밌는 독서를 했다. 특히 박제가의 기행문, 박지원의 짧은 편지, 이옥의 연경과 홍길주의 문장론 등은 아.주. 좋.다. 고소하고 맛있는 문장들이다. 누룽지를 땅콩 소스에 듬뿍 찍어 먹은 뒤 물구나무서기를 한 듯 하다. 읽으며 내가 한 뼘은 자란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충만함은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박제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인의 문장들이 물 위에 얼비쳐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

 

Posted by 가림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