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푸른 나무, 1994) 읽다.

 

미메시스는 가능한가

 

유시민이 쓴 교양 역사서.

저자가 책머리에 밝힌 대로 이 책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한국판 버전이다. 더벅머리 총각 시절에 읽은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은 솔직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그 유명한 경구만 피상적으로 갈무리해 두었을 뿐이다. E.H 카의 것을 우리 역사의 사례를 통해 설명해 준다니 독자로선 고마운 일이다. 책머리에 따른다면, 고로 이 책은 역사 울렁증의 나 같은 독자가 교양 서적으로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졸립고도 지난한 주제인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 책 역시 (이제는 거의 역사의 정의처럼 굳어진)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과거의 사건’이라는 한가로운 얘기를 반복하며,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사건이 아닌, 역사가의 사관[가치관, 역사관]에 의해 굴절된 사건이므로, 독자 제위께서 역사와 세계를 대하는 눈은 늘 서늘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왜곡된 역사관이 낳은 대표적인 피해 사례라는 것.

 

가장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창조적 소수자]와 [대중], 그리고 [지배적 소수자] 사이의 함수 관계를 다룬,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학 소개 부분.

토인비에 따르면 문명의 발전이란, 어떤 한 문명이 문제 상황에 봉착했을 때 그것에 성공적으로 응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 여기서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힘은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에서 비롯하는데, [대중]은 [창조적 소수자]를 미메시스(mimesis : 모방)하고 문명은 둘의 시너지를 통해 새로운 난제를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창조적 소수자]가 자신의 창조성을 우상화하면 네메시스(nemesis : 업보)에 빠지고, 이들은 [지배적 소수자]로 [대중] 위에 군림하려 든다. 네메시스에 따른 군림을 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면 “지배 계급[지배적 소수자]이 물질적 이익에 집착하여 다수 대중의 이익을 짓밟는 것”이며, 사마천 식이라면 “형벌로 백성을 길들이거나 백성과 다투는 위정자[지배적 소수자]”가 된다.

[지배적 소수자]가 새로 등장한 [창조적 소수자]의 진보적 가치를 수용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만약 [지배적 소수자]가 개혁을 거부한다면 [창조적 소수자]가 [민중]을 이끌고 낡은 제도를 폭파한다. 이것이 ‘지연된 미메시스’로서의 ‘혁명’이다. 개혁도 혁명도 없는 문명은 ‘해체’의 길을 걷는다.

 

토인비의 견해는 역사에서 민중의 역할이 기계적 모방에 그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소수자]를 선택하는 것이 민중이고, [창조적 소수자]를 미메시스함으로써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도 민중이고 보면 민중의 역할 축소라는 이러한 반론은 좀 억지가 있다. 오히려 토인비의 이론은 역사에서 민중의 지분을 고평가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도 든다. 2010의 대한민국을 볼 때,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민중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내 대답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토인비의 역사 이론을 지금에 적용할 때, ‘역사의 지연’은 무엇 때문일까. [창조적 소수자]를 미메시스 하지 못하는 민중의 문제인가. 대중이 미메시스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곧 [창조적 소수자]의 부재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창조적 소수자]의 가면을 쓴 [지배적 소수자]의 위선 때문인가. 유시민은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는가, 유시민의 역할은 무엇일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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