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 지성, 2010) 읽다.

 

무위와 관조의 언어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이 도발적 직유 하나로도 최승자는 시인이다, 라고 안도현은 말한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시의 ‘서정과 낭만’으로부터 지구 반 바퀴쯤 떨어진 곳에 최승자가 있다. 최승자는 말한다. 만약 시에 ‘서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개 같은 것이며, 우리네 삶에 ‘낭만’이 있다면 그것은 매독꽃의 흉측함이 포장된 거라고. 이 도발적 선언문은 최승자의 삐쪽빼쪽한 시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최승자가 최승자라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의 형태로 회자되는 것은 그녀의 시어가 가진 강렬함과 중독성, 그리고 배설의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최승자는 고정화된 여성의 언어, 시인의 언어에 반기를 든다. 관습화된 언어의 조합, 그 경계를 폴짝 뛰어 넘어 우리네 삶, 그 허위와 가식의 언어를 깔깔 비웃으며 말한다. 삶? 사랑? 행복?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개 같은 삶, 매독 같은 사랑. 기쁘다우리 철판 깔았네.

 

최승자의 새 시집이 나왔다. 11년만이다.

오줌 냄새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영원한 루머’라고 외쳤던 서른 살의 그녀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요양원에서 반백의 머리로 쓸쓸해서 먼, 아스라한 세계를 들고 돌아왔다. 최승자가 들고 온 세계는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 너무 산기슭도 아닌’(「내 詩는 지금 이사 가는 중)」), 그러니까 시장과 산의 어름 어디쯤일 것이다. 그곳은 삼천갑자동박삭이도 살던 세계, 노자와 장자와 예수가 숨바꼭질하던 세계이며, 동시에 비와 눈이 내리는, 쓸쓸하고 먼 세계다.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간결하다.

명사형 종결과 단문의 단단함. 달라졌다.

삶과 세상에 대해 독소의 가시를 세우던, 기존의 최승자 언어와는 분명히 다르다. 어쩐지 시시하고, 밍밍하다. 개 같은 가을과 봄과 여름을 기대한 독자라면, 그러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오랫동안 병을 앓고 난, 이제 60을 바라보는, 반백의 최승자가 아닌가. 가정컨대 인간의 한평생 동안 정해진 양의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면 최승자는 이미 세상과의 오랜 악다구니로 그 기력이 모두 소실된 것이 아닐까. 분기탱천의 검술로 화려한 초식을 선보이던 무림의 절대 고수. 그가 깊은 내상을 앓고 난 후 죽음보다 깊은 운기조식으로 얼마간의 기적같은 생을 유예 받고 각혈을 참으며 하는 말은 결코 요란할 수 없다. 그 언어는 간결하며, 단단할 것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생기듯 단단히 여무는 언어.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시간성’을 기축으로 한 무위와 관조의 세계다.

알다시피 삼천갑자동박삭은 유한한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삼천갑자동박삭은 무려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치치카포, 무드셀라, 그리고 서생원네 고양이 등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인용시에서 삼천갑자동박삭이가 살던 세계란 시간의 알파요 오메가다. 시간의 축지법으로 삼천갑자동박삭이가 살던 세계를 들여다 보니 그 시간의 어름어름에 노자와 장자와 예수가 살.았.다. 시간의 프리즘에 굴절되어 등장하는 기독교와 불교와 도가는 비와 눈이 내리는 세계에 잠시의 형태로 지나간(시간성에 간섭받는)다.

 

영원히 흔들리는 이 세계에서, 그러므로, 존재란 ‘지네 한 마리의 꿈틀거림’이나 ‘시간의 공책 위에서 개미 한 마리’가 발버둥치는 것과 같다. ‘시간의 그늘 속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노라면 존재는 ‘바람처럼 쉽게 바뀌’므로 ‘꽃인가 하면 바위이고 / 시인가 하면 소설’이 된다. ‘죽은 神’조차 무참히 버려지는 이 세계에서 우리네 한평생 삶의 궤적이 고작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라는 시인의 비관적 인식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 그 ‘쓸쓸하고 머나먼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면을 사유할 힘이 생긴다. 노자와 장자와 예수조차 살다, 쓸쓸하고 먼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에게 ‘무위’와 ‘관조’는 선택항이 아니다. 그 쓸쓸함이 하 싱겁고도 싱거워 오늘 밤엔 우윳빛 막걸리나 한두 잔 해야겠다.

 

Posted by 가림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