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 심리학』요약. 난해하다.

 

  - 화가 조해선님의 블로그 에서 퍼옴.

 


칼 구스타프 융(Jung, Carl Gustav)의 분석 심리학에서는 정신을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이라는 세 가지 수준으로 설명했다.

 

- 융의 분석 심리학 :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

 


의식은 개인이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정신의 유일한 부분이며, 유아기 때 감정, 사고, 감각, 직관의 의식을 통해 성장해 간다. 이 네 가지 요소는 동일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아이에게는 사고가, 어떤 아이는 감정이 강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의식의 개성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요소가 생겨나는데 융은 이것을 ‘자아’라고 불렀다. 자아는 자각하고 있는 지각(知覺), 기억, 생각, 감정으로 구성되며, 자아에 의해 존재로 인정되지 못하면 그것들은 자각될 수 없다. 그리고 경험이 의식의 수준까지 도달되기 전에 자아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면 자아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경험들은 어떻게 될까? 경험할 당시 중요하지 않거나 신빙성이 부족하면 ‘개인 무의식’이라는 곳에 저장되었다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쉽게 의식화될 수 있다.

 

- 의식의 개성화 과정을 통한 자아 형성

- 자아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개인 무의식

 


한편, 융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 무의식’에 대한 발견이다. 융에 의하면 개인의 성격은 선조의 역사적 산물이며, 그 내용물을 담는 용기(容器)라는 것이다. 이것을 ‘집단 무의식’이라 했으며, 이것은 많은 세대를 거쳐 반복된 경험들의 축척된 결과이며, 이는 과거 세대의 경험을 재생하는 가능성을 말한다. 아기가 ‘어머니를 어떻게 지각하느냐’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예비 관점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집단 무의식의 내용물을 원형(原型)이라고 한다.


 

- 집단 무의식 및 원형

 


원형들 중 사람들의 인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페르소나(persona) 원형, 아니마 원형과 아니무스 원형, 그림자 원형, 자기 원형이 있다. 페르소나란 개인이 대중에게 보여주는 가면 또는 겉모습이며, 여기에는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해로운 페르소나는 한 페르소나가 진정한 자기 본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게 되면, 자아는 그 페르소나만 동일시하여 성격의 다른 면은 전혀 발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페르소나가 세상을 향한 얼굴, 즉 외면이라면, 내면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다. 아니마는 남성 정신의 여성적 측면을 말하고, 아니무스는 그 반대로 여성의 남성적 측면을 말한다. 남자는 여성성을 물려받아서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기준을 만들고 그 영향으로 여자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 된다. 아니마의 처음 투사(投射)는 어머니에게 행해지며, 아니무스는 아버지에게 행해진다. 융은 개인이 양성적(兩性的) 본성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면 건강한 성격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무의식적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으로 친구에게서 결점을 지적당하면 분노를 느끼는데, 이는 친구의 지적을 통해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즉 특정인을 미워할 경우 이는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자신의 약점이 특정인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자기 원형은 집단 무의식 속의 중심 원형으로 의식 속의 원형들을 조직하고 조화시킨다. 누군가가 자신 및 세계가 조화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원형들이 그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페르소나 : 개인이 대중에게 보여주는 가면

- 아니마 & 아니무스 : 남성의 여성적 측면인 아니마와, 여성의 남성적 측면인 아니무스

- 그림자 : 무의식에 있는 나의 분신. 분노와 연결

- 자기 원형 : 집단 무의식 속의 중심 원형

 


이처럼 정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정신은 바위나 나무처럼 일단 표현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 변화하는 역동적 체계, 정신

 

요약문의 요약 : 정신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그리고 자아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있다. 개인의 성격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통해 반복 축적된 결과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에는 페르소나,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 자기 원형 등이 있다.

 

 

 -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

 

어렵다. 심리학은 대체로 어렵고, 흥미롭다.

 

흔히 사회적 가면으로 이해되는 페르소나는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의 나는 파랑색인데, 겉으로는 빨강색으로 보이게 하려는 행동. 융에 의하면 이것은 집단 무의식의 표출이므로 인간에게 내면과 외면의 괴리는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너무 자책하진 말자. 사람들이 보는 나의 이미지란 결국 페르소나 원형의 표현인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김소월과 한용운을 공부할 때 배운 용어다. 나는 작가와 서정적 자아의 관계, 즉 문학의 해석 방법에서 이를 종종 사용했었는데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의 사랑에 대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가령 나의 아니마가 투사된 여성을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다. 흔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이 이해는 맞는 것 같다. 그림자 원형 역시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그 정도의 개념인 것 같다.

 

김광규의 시 중 재밌는 게 있다. 예전에 이 시를 페르소나의 개념으로 분석했던 기억이 난다. 시를 읽어 본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김광규,「나」전문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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