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散策) :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

   비슷한 말 : 산보(散步)·소풍(逍風)·유보(遊步). 


 - 올라가는 길, 높아 보이나 실은 높지 않다. 후까시.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덥지도, 흐리지도 않다. 적당량의 일조량과 바람. 좋다.

일주일에 삼일씩 쉬는 반 백수 생활을 한지 6개월이 지났다. 고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산책을 한다. 나의 산책은 정말 산책이다. 산(山)을 오르니까(步) 말이다.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산을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집을 나와 산을 오르기까지 천천히 걸어도 5분도 채 안 걸리니까 가까운 편이다.

 

 

- 산책 시작

 

땀 흘리는 걸 싫어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니 건강이 좋을 리가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한 게 흡연과 지나친 음주, 운동 부족 때문인 것은 자명한 것. 나도 운동을 해야겠다. 민간인처럼, 정상인처럼 살아봐야지.

 

어떤 운동을 해볼까.

 

원래 운동에는 젬병인데다 사교성도 좋지 않으니 단체 운동 - 족구나 조기 축구 따위는 아예 생각도 않는다. 놀림 받을 게 아닌가. 창피하다. 또 지역 운동 동호회 같은 데 가입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친하게 지내죠, 라며 신입 인사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린다. 웩ㅡ 웩, 못할 짓이다. 난, 그런 거 못한다.

 

그렇다면…. 혼자 하는 운동. 헬스 클럽이나, 수영장을 다닐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것도 곤란하다. 집 가까운 곳에 <청소년 수련관>이 생겨서 수영장도 깨끗하고, 헬스 클럽 시설도 좋다고 하지만 걸어서 10분 거리. 역시 귀찮다. 육교까지 건너야 한다. 육교는 무섭고, 길다. 길고 무서운 육교를 건너다 분명 지칠 것이다. 길고 무서운 육교를 건너다 지쳐 쓰러져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겐 길지도 무섭지도 않은 육교를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다가 지쳐 쓰러져 빌빌거리는 나를 보며 비웃거나 침을 뱉거나 노숙자로 알고 동전을 던져 줄 것이다. 나한테 동전을 던져 준 사람에게 난 감사의 절을 해야 하나. 넙죽넙죽. 자비를…, 자비를…. 혹은 비굴하게 웃어야 하나. 자신이 없다. 난 운동을 하자는 것일 뿐, 육교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그렇다. 육교 때문에 나는 운동하러 가는 것을 기피할 것이다. 분명 등록해 놓고 며칠 나가다 흐지부지할 게 뻔하다. 게다가 수영장에 가면 아줌마들이 많다고 하는데, 수영복만 입고 아줌마들. 아, 무섭다. 지레 겁먹는다. 날 유혹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핑계대지? 픽 웃는다.

 

걸어서 5분 거리에 공원 인라인 스케이트 장이 있어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기도 했다. 인라인 스케이트와 보호 장비까지 샀다. 열심히 운동해야지, 그래서 탄천에 나가는 거야, 한 달 쯤 지나면 한강까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갈 수 있을 거야, 하루쯤은 집에서 63빌딩까지 다녀올 수 있을테지. mp3 플레이어를 끼고,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는 내 모습. 유쾌하지 않은가. 나는 참살이(웰빙)족이 될 거야. 건강해지겠지.

… 인라인 장비를 사고 딱 7번쯤 탄 것 같다. 스케이트 장비는 아직도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난 역시 게으르다.

 

 

- 소담한 오솔길, 근사하다.

 

집 앞에 이런 산책길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올 봄에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까. 처음엔 집 앞 공원을 돌다가, 다음 공원 옆에 있는 산을 오르다가, 다음 공원 뒤쪽에 있는 산을 오르다가. 심심해질 즈음에 여기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긴 우리집 뒷산이다. 집에서 5분 거리의 산책로. 발견하기까지 2년이 조금 더 걸렸다. 역시 파랑새는 집에 있었다, 가 아니고 집 뒤에 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발견이다. 거룩하며, 숭고하다. 어디선가 축포가 울리는 것 같다. 불꽃놀이다. 펑펑~ 펑펑펑!

 

 

- 내려가는 길, 의외로 경사가 깊다. 저 밑은 계곡.

계곡의 다리를 지나면 마지막 오름길이 나온다.

 

이 산책로는 소담하다. 열심히 걸으면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 안 걸릴걸.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아마 그 정도일 거다. 가끔 다람쥐도 있고, 꿩도 있고, 삵도 있고, 곰도 있다. 곰은 오징어 <숏다리>를 좋아한다. 나는 <숏다리>를 새끼 곰에게 주고 그 녀석과 친해졌다. 정말이다. 가끔 엄마 곰을 만나는데 엄마 곰은 생각만큼 날씬하지는 않다. 그런데 새끼 곰은 귀여운 것은 사실이다. 이것 역시 정말이다.

 

이 산책로의 가장 좋은 점은 사람이 없다는 것.

가끔 유명한 산에 가면 사람에 치여 숨을 쉴 수가 없다. 산아, 내가 널 품어주마. 뭔가 거룩한 사명을 품고, 엄숙하게 산에 오른다. 그렇지만 사람이 많다 보면 앞 사람 엉덩이만 보고 걷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계속 보다 보면 앞 사람 엉덩이도 친숙해지긴 하다. 하지만 내가 딴 사람 엉덩이 감상하려고 산에 오른 건 아니잖은가 말이다. 게다가 산에는 예쁜 아가씨도 없지 않은가. 아쉽다. 물론 내 뒷사람에게는 본의 아니게 미안하다.

 

더군다나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속도 조절도 힘들다. 걷는 게 아니라 사람에 치여 밀려간다. 천천히 걷고 싶을 때도 있고, 때로는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고도 싶은데 그러기가 영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산책로는 훌륭하고 값지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도 왠지 여기선 우쭐하다. 우쭐하면 용감해진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박수치며 산책하는 아줌마처럼 과장되게 박수도 치며 걷는다. <국군의 날> 행사 때의 멋진 군인 아저씨처럼 팔을 쭉쭉 뻗어 걷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소녀시대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소녀시대가 내게 온다. 귀여운 것들.

 

 

- 쉼터, 여기 앉아 바둑이라도 두면 신선 같을 테지.

 

 

산책은 가급적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생각이 많으면 늘 화(禍)가 생긴다. 생각이 많아봤자, 사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가급적 생각 따윈 하지 말자, 이게 내 주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내가 무척 좋다.

 

마지막 오름길을 오른다. 난 완전 약골이다. 이쯤 되면 나는 벌써 눈이 풀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팔과 다리가 동시에 앞으로 나온다. 보행 자세가 엉망이다. 팔과 다리가 동시에 앞으로 나오며 걷는 것은 무척 어려운 자세다. 난이도 D. 나는 운동의 클라이막스를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런 자세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낫, 둘, 하낫, 둘. 물론 농담이다. 썰렁하다.

 

짧은 산책의 마지막 오름길에는 의자와 조그만 탁자가 있다. 등산하다 쉬라고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것이다. 비나 이슬에 젖지 않도록 비닐을 씌어 놓은 정성이 고맙다. 부디 복 받으시길…. 나무관세음보살, 남녀호랑개교, 옴마니반메홈, 할레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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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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