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이는 그의 의지처럼 또한 정확했다. 아무리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걸음걸이가 죽음에 접근하여 가는 마지막 길일지라도 결코 허튼, 불안한, 절망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흰 눈, 그 속을 걷고 있다.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선 언덕, 흰 눈이다. 연발하는 총성, 마치 외부 세계의 잡음만 같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흰 눈 속을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히 걸어가고 있었다. 눈 속에 부서지는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온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난다. 누가 뒤통수서 잡아 일으키는 것 같다. 뒷허리에 충격을 느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흰 눈이 회색 빛으로 흩어지다가 점점 어두워 간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놈들은 멋쩍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부로 돌아들 갈 테지.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안으로 들어들 갈 것이다. 몇 분 후면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누가 죽었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평범한 일인 것이다. 의식이 점점 그로부터 어두워 갔다. 흰 눈 위다. 햇볕이 따스히 눈 위에 부서진다.

- 오상원, 「유예」 중


1919년 브르통은 수포와 함께 ‘자장(磁場)’이란 책을 내어 의식적인 창작 태도를 거부하면서 무의식이 명령하는 대로 글을 쓰는 실험을 한다. 그들의 의도는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원시적인 힘을 의식의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되는 이 자동 기술은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언어화된 사유는 진정한 것이 아니며 언어화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 즉 꿈이나 광기의 상태에 드러나는 잠재의식의 언어가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초현실주의 제1 선언’에서 브르통은 꿈과 불면의 중간 상태에서 자동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상태의 경험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무의식의 진실을 탐구한 프로이트의 이론에 심취해 있었던 브르통 · 아라공 · 수포 등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심원한 사고의 존재를 밝히려 하고, 무의식은 그 나름의 정연한 법칙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심원한 사고의 논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 속에서 통용되는 논리와는 물론 다른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을 탐구하고 초현실적인 시적 이미지들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시를 창조하겠다는 문학적인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 속에 길들어 있는 우리의 정신과 사고를 개혁함으로써 사회적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사실주의 소설을 공격한다. 그들은 사실주의 소설이 일상적인 논리의 틀 속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를 위주로 한다는 점, 소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우리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적 현실이라는 점,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위가 결정론적이라는 점, 소설은 직접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보다 구성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점 등을 들어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들을 모아서 진실의 감정을 주입시키려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의도는 이 세계에 대해 비합리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있다. 그들은 사건의 인과 관계나 작중 인물들의 분명한 정체를 묘사해야 한다는 소설의 일반 원칙을 무시하고 신비스러운 환상을 주입시키려고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노린다. 상상력이야말로 진부한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인간의 드높은 힘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고상한 취미를 기반으로 균형과 일치를 추구하는 고전적 미(美)의 개념을 거부한다. 브르통은 전통적인 기준에 입각해 있는 미란 살아 있는 인간의 정신을 억압한 사회적 속박의 한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문학적 형태에 대한 고정된 편견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장르의 포로가 되지 말고 미를 표현하는 수단에 대해서 끊임없는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오생근, 「초현실주의 - 꿈과 현실의 종합」 발췌.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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