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동물농장(박경서 역, 열린책들, 2006) 읽다.


우화, 경계의 인계철선을!

 

엉망이다.

책 읽기의 순서가 뒤죽박죽.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

마땅히 그 나이 때 읽어야 하는 고전이라 하는 것을 나는 읽지 못했다. 그러니까 톨스토이 옹의 부활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마라조프의 형제들을 읽었어야 할 나이에 나는 마냥 흙강아지였거나, 또는 조로(早老)의 술주정꾼이었다. 그러므로 고전을 오마주 하는 글은 물론이거니와 패러디와 착어의 의도 역시 쉽사리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읽지 못한 나는, 오규원의 폴 발레리에게를 읽고 고작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의 명징한 시구로 발레리를 규정한다. 이는 발레리에게도, 오규원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반성한다.

, 이런 식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과 성찰하는 것은 다르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고전을 읽고 있으므로.

 

조지 오웰의 또 다른 역작 동물농장은 알레고리다.

우화는 경건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엄숙함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찌그러뜨리는 게 우화의 생리다. 말하자면 우화는 투명하고 평평한 렌즈가 아닌, 오목렌즈나 볼록렌즈와 같다. 우화는 반쯤 헐거운 조리개로 대상을 관망하며, 일정한 거리감을 조성하며, 롱테이크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피사체의 의도적 왜곡을 독자가 눈치 채는 그 시점에 왜곡은 역설적으로 진실에 근접한다. 근거와 비판이 아닌, 조롱과 농담과 가벼움과 비틀림과 왜곡과 과장과 반복과 변주와 풍자와 골계를 작가와 독자가 은밀히 공유할 때 우화적 글쓰기는 성공한다. 그러므로 동물농장은 성공한 우화다.

 

매너 농장의 존스 씨를 몰아내고 동물 농장의 깃발을 세운 그 순간, 동물들은 네 발로 서는 동물들의 세상이 구현되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자유를 지각하지 못하고, 이념을 체화하지 못한 동물들은 삼일천하의 유토피아를 지켜낼 수 없었다. 구속의 상태에서 소극적 자유를 (수동적으로) 획득한 존재는 그 자유의 가치를 스스로 헌납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지적은 옳다. 그러므로 성실한 수말 복서는 맹목적인 자동 인형이다.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한 청맹과니의 군중이다. 사실 이 복서와 같은 유형이 가장 위험하다. 성실순종적인 이 유형의 다른 이름은 기계적 맹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짚어봐야 할 문제는 1차적 자유를 획득한 저 동물들이 왜 스스로 그 자유의 가치를 내동댕이쳤는가다.

자유란 예속과 대립하며 자유의 본질적 속성상 대결은 필연적이다. 구속과 관습은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자유는 투쟁의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일종의 가능태다. 때문에 가능태로서의 자유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항상 예민한 촉수를 갖고, 곳곳에 의심의 인계철선을 설치해야 한다. 언제라도 그 불순함을 자각할 수 있는 날선 인계철선 말이다. 하지만 돼지들(나폴레옹)기억 말살작업에 글을 아는 동물이든, 그렇지 않은 동물이든 이들은 비판적 사유 능력을 잃었다. 아니라면 행동 의지가 미약했든지. 감시하지 않는 권력이 독재와 체제를 완성하듯, 나폴레옹과 스퀼러, 그리고 개와 양들은 왜곡된 유토피아를 조직한다. 정확히 의심과 비판이 명멸한 바로 그 시점부터.

예속의 톱니바퀴에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것, 그것은 자각이 아닐까. 의심하고 감시하는 것은 자각으로부터 비롯하며, 권력은 감시로부터 제어당하므로. 우리가 의심의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경계의 청음초를 적재적소에 운용해야 하는 이유다.

 

조지 오웰은 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전체주의(나치즘, 파시즘, 정확히는 구 소련의 공산당 혁명)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한다지만, ‘고전의 가치를 과거의 현재적 적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 글은 2012년의 이 땅에도 대입 가능한 우화다.

 

 

내가 외국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순전히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당시에 나는 질 낮은 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악한 번역문의 이 책을 힘들게 해독하느라 정신이 혼미했다. 지금처럼 더웠다. 아니 지독하게 더웠다. 3 , 그러니까 94, 개 같은 날의 오후에 나는 암호문처럼 생긴 글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조지 오웰을 읽으며 어느 출판사의 것을 고를까 했는데, 친절하게 출판사별 번역의 차이를 스크랩해서 올려 주신 어느 블로거(여기 클릭)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앞으로도 종종 신세를 지겠다는 양해의 말씀과 함께.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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