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공동체의 유전적 원형  

 

신동흔, 『살아있는 우리 신화』(한겨레, 2004) 읽다.

전설은 진실한 이야기다. 발화 행위나 전승 과정에서 전설의 진실성은 구체적 공간․증거물로 근거화 된다. 말하자면 가시적 사물, 곧 증거물을 통해 전설의 진실성은 강화되는 것이다. 전설의 비범한 인물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어김없이 패배하며, 삶에 대한 이 비극적 인식은 대지를 밟는 인간의 숙명이다. 전설은 진실한 비극이다.

한편 신화는 신성한 장소에서의 신(혹은 신격화된 존재)에 대한 이야기. 인간계에서의 일 년은 신계에서의 하루와 같다. 인간의 삶이 수유와 같다면, 영겁을 관통하는 신은 불멸하며 영원하다. 신계는 이승이자, 이승의 수평적 대척점인 저승이다. 신계는 또한 이승이자, 이승의 수직적 극한점인 천상과 지하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은 시․공간에 간섭받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이므로 세계 위에 군림한다. 신은 언제나 승리한다. 승리의 전리품은 세계(천지창조)이기도 하고, 나라(국가 건설)이기도 하다.

신화는 설화(說話)이므로 구전된다. 구연되는 신화는 적층적이며, 가변적이다. 쌓이며, 변한다. 견고하게 고정되지 않은 이야기는 꿈틀거리며, 고이지 않고 흐르는 이야기는 숨을 쉰다. 꿈틀거림과 숨쉼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비록 머리가 신들의 이야기를 잊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들숨과 날숨은 신화의 원형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존재는 환경(外)에 지배 받기도 하지만, 존재는 존재 자체(內)로 증명되기도 한다. 인간은 시․공간․문화의 입체 위에서 그 형질이 결정되기도 하지만, 개별자의 유전적 특성에 의해 형질이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은 옳다. 민족성은 분명 존재한다.

한민족을 특성 중 현세성이 있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듯이 한민족은 내세가 아닌 현세 쪽으로 화살표의 향을 지시한다. 내세의 영원한 구원은 한민족에게 너무 요원하며 무거운 주제다. 내세 지향의 코쟁이 종교도 바닷물을 건너 이 땅에 들어와 입국수속을 밟으면 기복신앙으로 그 형태가 바뀐다. 고로 우리 신화는 창세(천지 창조)든, 생사, 자연(해와 달), 그리고 사랑(남녀, 부자․모자)이든 인간의 삶, 살이 그것을 기축으로 한다. 저승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서사의 근저에는 살이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가령, 바리데기 신화. 우리는 오구신․신격화된 바리데기(死)보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짐을 당한 바리데기(生)에 좀더 애착이 간다. 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바리데기(死)보다는, 아버지를 위해 저승으로 저승으로 홀로 떠나 스스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영웅으로서의 바리데기(生) 이야기에 가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신들의 여러 형태는 우리에게 내재된 삶의 원형질로서의 단면이자, 환유다.

 

횡의 동편 인간세상과 서편의 저승세계가 나뉘는 경계는 바로 황천수다. 황천수는, 부화되지 않은 생명을 알의 껍질이 감싸듯, 인간세상을 둘러 싸고 있다. 인간 세상의 가장 동쪽으로 해동조선국이 있으며 해동조선국은 남쪽으로 한라, 북쪽의 끝으로 백두를 받들고 있다. 해동조선국의 오른쪽으로는 불라국, 강남천자국, 홍진국, 명진국이 차례로 위치한다. 천년뜰 아래의 천태산을 건너면 서천서역국의 경계에 진입할 수 있다. 인간세계의 동쪽 경계점이 해동조선국이라면 서쪽의 그것은 서천서역국이다. 종으로 인간세상 위를 올려보면 옥황상제가 자리한 하늘나라가 있다. 옥황상제는 하늘과 땅을 아우르므로 천지왕이라고도 한다. 옥황상제는 구름 위에 앉아 하늘을 처소로 하며 새의 깃으로 된 부채를 들고 있다. 인간세상의 아래는 지하국이다. 지하국의 최고신은 지부사천대왕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이던 카오스의 시절, 그 혼돈 속에서 도수문장이 하늘과 땅을 갈라 세상의 질서가 잡히던 그 때. 지부사천대왕은 천지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해 우주를 천지왕에게 넘겨주고 아득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황천수를 베개 삼아, 알 속의 생명처럼 숨죽이고 있는 이승 세계는 신들의 감싸안음으로 부화된다. 저승세계의 초입에는 신비의 꽃들이 가득한 서천꽃밭이 있고, 그 위로 원천강이 있다. 민간신화는 불교 요소를 수용한 측면이 많기 때문일까. 저승의 위편에는 극락[極樂 : 지극한 즐거움]이며, 아래편은 지옥[地獄:땅 아래의 감옥]이다. 저승에 이른 혼령은 이승 살이에 대한 응보로 극락이나 지옥으로 나뉘어 향한다. 혼령을 불러와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은 시왕[十王:열대왕]이다. 그 가운데 위치한 자가 염라대왕이니, 가히 저승의 왕이라 할 만하다. 극락은 부처의 땅이며, 부처는 자비로써 영혼을 돌본다. 지옥은 극단의 형벌과 고통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한과 눈물의 공간이다. 황천수를 건넌 영혼을 맞이하여 상처받은 영혼의 눈물을 씻어주는 신이 바리[바리공주, 바리데기]다.

줄탁동시는 그러나 쌍뱡향적이어야 한다.

 

[우리 신들의 귀환]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잊은, 혹은 알지 못했던 우리 신들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이 아닌, 우리 신들의 이야기는 유전적 정체성 찾기의 시발이며 귀환의 염원은 있어야 할 것들이 결핍된, 현재의 위안일까. 아무려나 좋다. 신화는 상징의 관성을 유인하는 원형이며 핵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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