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천, 『스윙』(민음사, 2008) 읽다.
담백한 슬픔
종종 삶이라는 게 선명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발버둥 하며 자맥질을 해봐도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서 맴돌았을 뿐. 백석이 그랬듯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구르기도 하며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삶을 소처럼 연신 새김질할 때 내 삶의 궤적은 나와는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것이고 나보다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결국 나는 앙금이 되어 가라앉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떠다니도록 그려진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게 아닌가, 승패와 관계 없는 몇 게임을 그저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이 삶은 선명한 것이 아닌가.
머리 위로 우기(雨期)의 바람이 불었다.
물은 오랫동안 컵 안에 무겁게 담겨 있었고
승패와 관계없는 몇 개의 게임이
남아 있었다.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처럼
불펜에서 노닥거리거나
구경 나온 다른 그녀를 위해
우리는 희생번트를 댔다.
스파이크, 스타킹, 발목……
비어 있는 스탠드를 보며
우리는 전력 질주하지 않았고
홈으로 돌아오는 걸 잊었다.
「더블헤더」 중에서
여태천이 포착한 삶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 매일은 ‘쓰레기봉투처럼 자꾸만 쌓이는 요일들’이며, 그래서 이 아침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패배가 선명한 ‘고전적인 아침’이다. 어느덧 나는 서른 후반의 중년이 되었으나 그 중년이란 과연 시인의 말대로 ‘나아질 게 없는 우리의 중년 / 우리는 조금씩 정상인을 닮아 가’는 거겠지.
반복되는 일상의 스냅 사진, 이 지루하도록 뻔한 삶의 관성에서 잠깐의 유예된 시간을 나는, 그리고 그대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생명을 다해 꽃을 피우려 했으나, 내가 피운 꽃은 본질적으로 꽃인가, 하는 물음표를 대했을 때 자신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저무는 강변을 보듯 그렇게 무심히 응시하는 것 뿐이리라.
노란 약물을 척추에 꽂고
빨간 꽃을 피웠는데
동백이라고 부를 수 없다.
꾹꾹 눌러쓰고 싶었던 말은
흔적이 없다.
(…)
길고 오래 지속되는 밤과 낮들은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중독」에서
줄임표 : 인용자
삶은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스윙은 ‘역전 홈런’이 아니라 ‘마이볼’에 의해 아웃 카운트로 기록될 ‘플라이 아웃’. ‘국자 들고 우아하게 스윙’해 봤자, 우리의 스윙은 예고된 패배의 수순을 영리하게 밟는다.
그러나
이 시집의 마지막은 ‘이미 끝난 게임 / 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터지는 장외 홈런.’으로 끝나는데, 시인은 과연 희망의 단서를 포착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장외 홈런이 터져도,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베이스를 돌고 또 돌아도, 그것은 이미 끝난 게임. 삶은 완벽한 구도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해 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룰이고 규칙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므로 삶은 더욱 슬픈 것이다. 지는 태양을 잡을 수 없듯, 새벽빛이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을 고이 담아 둘 수 없듯. 다만 조용히 응시하고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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