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인물과사상사, 2002,) 전 3권



1970년대편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 이번은 공부를 목적으로 한 책 읽기이다.

2. 책에 소개된 제목 순서대로 글을 소개하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며 페이지를 표시한다. (강준만이 직접 기술한 부분과 참고 문헌을 인용한 부분은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단 따옴표로 표시된 것은 강준만이 참고 문헌을 인용한 부분이다. 이번주 pd 수첩 <저작권의 덫에 걸린 아이들> 편을 보니까 이진법 공간에서의 저작권 문제가 심하던데, 이렇게 글 몇개 올린다고 저작권에 걸릴까?)

3. 삽입한 사진은 책에 나온 사진과 다르다.

4. 각주는 사실을 부연하거나 나의 느낌을 고려하여 작성한다.

5. 책의 부제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는 다음을 상징한다. 평화시장 : 전태일, 노동,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궁정동 : 중앙정보부, 고문, 공작정치, 파시즘.

6. 여론조사 결과(시사IN), 노무현 대통령 서거의 여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년 서울 시장 후보로 유시민, 한명숙 후보가 압도적 지지율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 후보로는 독재자의 딸 박OO가 예외 없이 1등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 이 책은 70년대 박정희 시대를 아주 폭넓게, 세밀하게 분석한다. 박정희. 다음 대선의 화두가 될 박정희.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은 것은 아주 유익하다. 연도별로 끊어서 사건을 기술하기 때문에 흐름에 조금의 방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공부가 됐다.

7. 내가 생각하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 가지다. 지역주의, 언론, 무관심. 이 세 가지 화두에 방점을 찍으며 글을 읽는다.

8. 현대사에 대해 좀 알고 읽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아쉽다. 난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했고, 게다가 이쪽 방면으로는 읽은 책도 없어서 영 생소한 사건이 많았다. 무지한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시선이 중요한 뿐이다, 라고 자위한다.  

8. 좀 길다. 호흡을 가다듬고...

 

 

 





머리말 - 1970년대의 두 얼굴 :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각주:1]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박정희, 육영수, 정주영)

 

제1장. 도시에 빨려 들어가는 농촌 (1970년)

 

- 정인숙, 그 죽음의 배후

정인숙의 숨겨진 아들(성일)이 박정희의 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당시 이러한 소문은 박정희의 귀에까지 들어가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항간에 정 여인이 남긴 세 살배기 사내애가 ‘대통령의 씨’로 소문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더 이상 추측 보도나 의혹을 부추기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라.”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언론에 보도 통제를 가해 사건 발생 10일 후인 3월 27일부터 정인숙과 관련된 기사를 언론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권 38쪽)[각주:2]




-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아파트 건설, 33명의 생명을 앗아간 붕괴 사고

 

와우 아파트 붕괴 현장

판자촌을 철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지어준 시민아파트라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그것도 불과 입중 20일 만에 15개 동 전체가 문너진데다 사고 발생 한 달 전부터 부실공사 사실과 위험성을 서울시에 여러 차례 진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묵살했다. 심지어 붕괴 나흘 전부터 붕괴 우려가 있으니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는데도 서울시는 이마저 외면했다. … 한 마디로 국민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정치적 전시효과를 노린 생색내기용 사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53, 54쪽)[각주:3]




- 김지하의 ‘오적(五賊)’

김지하의 <오적>

남한의 극심한 부패상 폭로는 ‘북괴 주장에의 동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59쪽)

박정희는 무력만으로 정권을 유지한 것이 아니었다. 매수와 포섭을 위해 늘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나중에 박정희가 죽은 뒤 청와대 금고에서 엄청난 돈이 쏟아져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성격의 자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박정희부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는데, 고위층 스스로 저지르는 부정부패에 대해 어떻게 칼을 빼들 수 있겠는가? (65쪽) [각주:4]




- 경부고속도로와 문화
- 시골과 자연의 상징으로 밀려난 기차, 고속도로가 농촌에 미친 영향

“당시만 하더라도 민심은 한없이 순박했었다. 고속도로 용지 대금을 낮추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로 생각됐고, 백성들도 그렇게 믿고 따랐다. … 평당 평균 236원으로 매수한 것이다. 아무리 30년 전의 일이라 해도 믿을 수 없이 싼값이다. 담배 한 갑에 40원(파고다), 쌀 한 가마에 4,350원 하던 때였다.”

그러나 고속도로 개통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 이후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려 수도권 토지는 ‘돈 놓고 돈 먹기판’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런 투기 열풍이 농촌까지 파고 들어간 것이다. (75쪽)

- 경부고속도로와 지역 갈등 - 지역 균형 발전을 외면한 경부고속도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난 소외감, 호남인의 호남 탈출, ‘시장 논리’로 정착된 호남 차별

박 정권 10년간에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함하여 도합 26억 달러의 외국차관을 들여와, 이 자금으로 영남 지방에다 울산공업단지를 비롯한 대소 산업 지대를 형성했으나 호남 지역에는 하나의 공업단지도 건설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호남지대에 세워진 공장은 여수의 호남정유와 호남 화력발전소, 그리고 광주의 아세아자동차 공장 등 3개뿐이었다. 이 3개 공장마저도 소유주는 영남 사람이었다. … “전라도와 강원도는 만성적인 인구 감소 지역이 되었고, 경상도의 신흥공업도시는 높은 인구성장률을 보여 한국 공업의 지역적 불균형성을 반영하게 되었다. (81, 82쪽)

“5.16 전해인 60년 말, 영남의 인구는 8백19만4천명이었는데 10.26 다음 해인 80년에는 1천1백42만9천 명이 되었다. 그 동안에 3백23만5천명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에 비해 호남의 인구는 60년 말 5백94만8천 명에서 80년6백6만5천 명이 되었다. 20년 동안에 11만 7천 명밖에 늘지 않은 숫자였다. 60년 말 한국의 총인구는 약 50%의 인구 증가를 보였다. 이 증가율을 호남에 적용한다면 80년의 호남인구는 약 9백만 명이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도 박정희 통치 20년 동안 호남 인구가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연 증가분에 해당하는 약 3백만 명은 어디로 갔는가? (83쪽)

먹고살 길이 없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이른바 서울의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1979년에 발표된 서울시의 <저소득 시민의 생활 실태에 관한 기초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영세민의 출신 지역별 분포는 호남권 28.3%, 호서권 17.3%, 서울 14.2%, 영남권 11.6% 등이었다. … 영남의 경우 농촌 퇴출 인구의 대부분은 영남 지역의 산업부문과 도시에서 흡수했으므로, 서울로 이주한 영남 출신의 상당 부분은 대학 진학, 관료 진출, 사업가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의 이주였던 것이다. (83쪽)

호남 차별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로 정착되어 자연스러운 ‘시장논리’로 호남 차별의 악순환을 가동케 하는 가공할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일 부산 동아대 어느 교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투자한 액수가 10 대 1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원적을 전라도로 옮길 생각을 했다. 왜냐 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85쪽) [각주:5]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바보회’ 결성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지 정말 죽고 싶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 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이 바보들의 모음이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98, 99쪽)

노동 시간은, 작업량이 많지 않은 기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일거리가 밀릴 때는 물론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 나쁜 환경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락방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업주들이 좁은 작업장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생산비를 절감하고자 만든 것인데,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한국의 저임금 경제가 딛고 선 냉혹한 인간 경시, 인간 비료화, 저 참혹한 노동지옥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멀쩡한 육신을 제대로 바로 펴지 못하고 비좁은 작업장 사이를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 다니는 노동자들을 상상해보라. (100쪽)

 

제2장. 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 (1971년)

 

 




 

- 선거를 위한 서승, 서준식 형제 ‘간첩’ 조작 - 보안사가 연출한 반공 드라마, 선거를 엎기 위한 음모극

서승, 서준식 형제가 1970년 서울법대 재학중 불법적으로 7박 8일 동안 북한 여행을 다녀온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일교포로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방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정권은 이것을 간첩 행위로 연관시키며 한 편의 무서운 음모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만일 박정희 후보가 질 경우 서승 사건과 연계시켜 선거 자체를 뒤엎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 김대중 후보가 마지막 선거 유세 대결을 벌일 때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김대중이 당선되면 ‘서울 거리에서 탱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미 CIA 책임자에게 했다는 말은 언론에는 뻥끗도 안 했지만 입에서 입으로 활달하게 옮겨 다녔다.”

“하루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특명이라는 게 내려 왔는데, 내용인즉, ‘총칼로 잡은 정권 쉽게 내줄 것 같으냐? 피바다가 될 거다!’라는 식의 깡패 양아치들이나 할 상스러운 협박공갈 유언비어를 시중에 나가 퍼뜨리면서 국민을 겁주라는 게 국가안보 최고기관이라는 중앙정보부특명 수사국에 내려온 특명사항이었습니다.”

점쟁이들을 유언비어 유포에 이용하는 수법도 동원되었다. (132, 133쪽) [각주:6]




- 정권을 훔친 박정희

 김대중, 장충당 공원 앞 유세

“이후락 정보부의 또 다른 중요 임무는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관한 보도 통제였다. 차장보 등은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연일 김대중의 유창한 웅변에 쏠리는 인파가 보도에 부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김대중 바람에 대한 박 정권의 공개적인 대응은 주로 색깔론이었다. (134쪽)

4.27 대선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데다 박 정권은 대규모의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결국 정권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6백34만2천8백28표(53.2%)를 얻었고, 김대중은 5백39만5천9백표(45.3%)를 얻었다. 선거가 끝나고 박정희는 9ㄹ4만여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마터면 정권 도둑맞을 뻔했다”고 말했다지만, 정작 정권을 도둑맞은 건 김대중이었다. (137쪽)

1971년 국가예산은 5천2백42억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600-700억을 썼다. 입식버스 요금이 15원, 커피 50원, 정부미 80kg이 7천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조(兆) 단위를 넘는 엄청난 돈이었다.

박 정권은 대선 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백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각 투표함마다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10표를 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던 우정동의 경우 집안 식구들의 것만 합쳐도 12표였고 친척들과 친구들의 것을 합치면 100표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집안 식구들 숫자에도 못 미치는 7표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개표 부정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분노 이전에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138쪽)




- 민족분열을 꾀하는 자는 누구인가 - 신라 임금을 뽑자

 

4.27 대선은 지역주의, 특히 영남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박정희는 경북에서 92만 표(박 133만, 김 41만 표), 경남에서 58만 표(박 89만, 김 31만 표)를 이겼는데, 영남 지역 승리는 전체 승리 득표 94만 표보다 56만 표나 많은 것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를 전북에서 23만 표(박 30만, 김 53만 표), 전남에서 40만 표(박 47만, 김 87만 표), 그리고 서울에서 39만 표(박 80만, 김 119만 표)를 이겼다. 박정희는 이미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에 비해 영남표만 1백36만 표를 앞섰는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박정희가 이긴 116만 표보다 20만 표나 웃도는 것이었다.

그러한 영남 몰표는 부정선거와 더불어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적극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거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공무원들에게 ‘김대중이가 만약 정권을 잡으면 모조로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또 선거 막바지엔 대구에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 단결” 같은 유인물이 호남향우회 명의로 나돌아다녔다. “럭키치약을 사지 말자”는 유인물도 유권자들의 집에 대량 살포되었다. “호남에서는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라는 구호가 전봇대에 나붙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143, 144쪽) [각주:7]





 

- 국회의원 선거와 ‘진산 파동’ - 신민당 당원들의 습격을 받은 유진산, 신민당의 ‘실질적인 대승’, 언론의 김대중 보도 통제

“1971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의 3분의 2 의석 확보에 실패한 박정희는 헌법개정이라는 법 절차를 밟아 장기집권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비상계엄의 선포 아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식의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신체제 도입의 권력정치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147쪽)

총선 후 박정희는 대선시 경쟁자였던 김대중이 신민당 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끔 김대중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김대중에 관한 기사는 좋든 싫든 무조건 쓰지 마라. 김대중이라는 이름 또한 쓰지 마라. 이름만 봐도 국민들이 생각한다’고 협박을 가했다. (148쪽) [각주:8]




 

- 버려진 사람들의 분노 -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람들

 

광주대단지 사태

<신동아> 1971년 10월호에 박기정이 쓴 <광주대단지>라는 기사는 당시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몽둥이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길목마다 막고 서서 택시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몇 끼니를 걸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팔자 좋게 택시만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 왜 도망치려 하느냐"면서 온갖 욕설과 위협을 주어 모조리 차에서 내리게 했다. 취재하던 보도 차량도 마찬가지 였다. "굶어 죽게 된 마당에 신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면서 덤벼들었다. 대단지 일대는 민란의 조짐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이 감돌아 마치 공포의 도가니 속 같았다. 경찰관들에게 뭇매를 맞아 뒷머리가 터졌다는 수진리 김정규 씨(21)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때린 경찰을 죽이겠다"면서 식칼을 휘두르며 날뛰기도 했다. 오후 1시 40분경 서울시경과 경기도경 소속 기동경찰 700여 명이 나타나자 군중들의 흥분은 오히려 가열됐다. "배고픈 우리에게 밥을 줄 생각은 안하고 몽둥이로 막으려 하느냐"면서 2천이 넘는 주민들은 심여대의 시영버스에 분승하여 서울로 나가려 했다. 경찰의 최루탄과 주민의 투석으로 맞선 데모가 한창일 무렵 때마침 참외를 가득 실은 삼륜차가 지나갔다. 데모를 하던 군중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정신없이 차에 달려들어 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참외 한 차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수진리 김모양(12)은 "배고파 죽겠어요"울부짖으며 자기 키보다 훨씬 큰 몽둥이를 고사리손에 힘겹게 들고 발악이나 하듯 뛰고 있었다. 난동을 지켜보며 서 있던 한 여인은 "세상에 한창 먹을 어린것이 몇끼니씩 굶었으니 저럴 수밖에......쯧쯧"혀를 차고 있었다. (172쪽) [각주:9]

 



- 프레스카드제 실시
- 민심에 편승한 언론통제, 프레스카드제 악용

1972년 2월부터는 프레스카드 없이는 취재를 못하게 되었으며 프레스카드를 받지 못한 기자들은 언론계를 떠났다. <경향신문 50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드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주재기자의 집단 감원과 관청에서 ‘찍힌’ 기자들에 대한 발급 거부 등 예상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195쪽) [각주:10]

 

실미도 사건 실제 사진

 



제3장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1972년)

 

- 7.4 남북공동성명 - 평화통일 3대 원칙 - ‘자주, 평화, 대단결’, 남한도 북한에 배울 게 있다

박 대통령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부장은 앞으로 통일까지 일구려면 김일성의 파트너인 나도 그만큼 권위와 격을 갖춰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나.” (215쪽)

 



- ‘10월 유신’ 선포
- 대통령 종신제를 위하여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회를 강제 해산했고 정당과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헌법 기능은 정지되었고 그 권한은 박정희가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비상국무회의가 가져갔다. 쉽게 말해, 박정희 개인이 곧 법이요 진리인 그런 철권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물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으며 대학은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 ‘10월 유신’과 국회
- ‘악질 의원들에게 가해진 고문

박정희가 ‘악질’로 분류한 의원들은 정보부, 보안사 요원들이 발가벗긴 채 고문을 하는 인간 이하의 만행을 겪게 되었다. 실미도 사건을 폭로한 이세규는 발가벗긴 채 물고문을 당하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른 의원들도 다 물고문과 ‘통닭구이’를 당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팬티까지 완전히 벗기더군요. 벌거숭이 몸을 시멘트 바닥에 굴리면서 각목으로 마구 때렸어요. 그래도 내가 버티자 ‘이 새-끼, 너같은 놈은 죽여서 마대자루에 담아 한강에 내다버리면 돼’ 라면서 물고문을 시작하더군요. 먼저 목욕타월을 물에 적셔 양 팔목을 감더라구요. 그 위로 로프를감아 두손을 꽁꽁 잡아맨 후에 무릎을 올려 양팔 안으로 집어 넣으래요. 그리곤 솟아오른 무릎 오금사이로 야전침대 각목을 끼워 책상 두개 사이에 걸쳐 올려 놓더군요. 통닭처럼 매달리니 무거운 머리가 뒤로 졌혀지잖아요. 얼굴위에 수건을 덮고 소주 대병들이 주전자로 물을 붓는거에요. 답답해 입을 벌리면 물이 들어와 배가 남산만해지더라구요.한차례 고문이 끝나면 군의관이 들어와 혈압 체온을 재고는 이상한 주사를 한대씩놓고 갔어요.그리고 또 시작되는거죠. 5일간 갇혀 있는데 3~4일이 지나자 환각이 생겨요. 아내한테 유언도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 싶어 덜컥 겁이 나고요." (228쪽)

6. ‘10월 유신’국민투표와 ‘체육관 선거’ - 강요된 부정선거, 99.99% 지지가 나온 ‘체육관 선거’

“나는 10월 유신 때 전방 근무 사병이었다. 국민투표 때 반대표를 찍으려 했더니 중대장이 붓뚜껑을 빼앗았다. ‘네가 아무리 반대표를 찍어도 사단에 가면 모두 찬성표로 바뀐다’면서 중대장이 찬성표를 찍었다.” (231쪽)

 



- ‘10월 유신’과 코리아나호텔
-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유착, <조선일보>의 ‘10월 유신’지지, <조선일보>의 낯뜨거운 아첨

박정희 측근 인사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박정희가 자주 신문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오는데, 늘 거의 예외없이"조선일보"다. 박정희와 "조선일보"는 상호 유착 관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를 아꼈다.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 차관 도입 당시 "조선일보" 경제부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코리아나 호텔 건립을 위한 자금은 67년경 대일 청구권 자금 중 상업차관으로 들어온 것이며, 언론사에 대한 상업차관으로는 이것이 첫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국내 금리가 연26%나 됐던 것과 비교하면 연7-8%에 불과한 상업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임에 틀림없다. 당시 상업차관을 주선한 사람은 방일영씨와 막역한 사이이며 공화당의 돈줄로 통하는 김성곤 씨로 알고 있으며 방씨와 김씨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현재 "조선일보"에 김씨의 아호를 딴 성곡도서실이 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박 정권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왔다. 그건 바로 3선 개헌을 위한 켐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박 정권은 1969년 10월17일 3선 개헌안을 투표에 부쳐, 행정적 조작으로 77.1%의 투표율에 투표 수의 3분의 2를 약간 넘는 찬성을 받았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활약이 대단했다. '조선일보"는 투표 전날인 10월 16일자에 <`영광의 후퇴`보다 `전진의 십자가`를...`나는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번 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또 이 날 신문은 11명의 각계 인사를 선정하여 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소리를 소개하였다. (249쪽) [각주:11]

 




- 새마을 운동과 민족성 개조론 - 박정희의 민족성 개조론, ‘유신 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

새마을 운동 사진

“때마침 그 해 여름 쌍용양회가 시멘트 생산 과잉으로 재고 처리에 어려움을 겪자 박 대통령은 정부가 구입해 전국 3만 5,000개 부락에 335부대씩 무료로 지급하게 했다. 1970년 새마을 가꾸기를 위하여 부락당 300-350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배급하되 배분받은 시멘트는 개별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을 일으키는데 써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건설,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공동목욕탕 건립, 작은 하천의 둑 개조, 공동빨래터 만들기 등등 지방행정을 통해서 새마을사업을 예시해 주고 마을의 합의에 의해 협동해서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만 6,000개 여 마을이 빨래터를 고치고 다리를 놓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이들 마을에 대해서만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이 추가로 지원됐다.”

박경원은 새마을운동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새마을운동은 시멘트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시멘트가 남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상 1권 264쪽) [각주:12]

 

 



제4장 수출 전쟁과 안보전쟁 (1973년)

 



 

- 체제 수호의 파수꾼 ‘유정회’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지만, 이는 예전의 선거가 아니었다. 유신 이후의 선거는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즉 여야가 동반 당선될 수 있는 중선거구제로 바뀐 이른바 ‘나눠먹기 선거’라 무슨 의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총 1백46석의 지역구 의석은 민주공화당 73석, 신민당 52석, 민주통일당 2석, 무소속 19석 등으로 나뉘어졌다. 물론 지역구 의석을 뺀 73석(의원 정수 2백 19명의 3분의 1)은 박정희가 임명하는 유정회 몫이었다. … ‘유신의 친위대’, ‘청와대 특공대’라는 별칭 외에도 ‘관선(官選)의원’이니 ‘73명의 거수기’니 하는 별명까지 얻은 유정회 의원들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국회를 온전한 의미의 국회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2권 32, 34쪽)



 

- 일본인 기생 관광 붐

실제로 박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실시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박 정군의 그러한 매매춘 장려정책은 ‘수출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매매춘 여성들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웠으면 이왕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를 시도한 김에 그들이 큰돈이라도 벌 수 있게끔 보호 장치까지 만들어 주었어야 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총수입의 80%를 중간 착취당했으며, 정부는 화대 착취구조를 묵인했다. 왜 그랬을까? (61쪽)

일본의 남부에서 북부까지 단체 관광 여행을 해도 1인당 5-7만 엔이 드는데 한국의 기생 관광은 3-5만 엔이면 충분했다. 일본인 기생 관광객들은 ‘싼 맛’에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생 관광 형태는 은밀하다기보다는 과시적인 것이었다. (62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여성의 정조 문제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시켰다. 이른바 환향녀는 왕조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 발생한 시대의 희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조와 집권 사대부는 그들에게 사회하기는커녕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겨 자살을 강요했다. 물론 자기들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박 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아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에 그런 ‘환향녀 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살아 있는 건 아닐까? (76쪽) [각주:13]

 



- 5일만에 귀환한 김대중


-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은 1973년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그는 4일 후 한민통 동경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동경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박 정권은 무임소 장관 이병희를 일본에 진사 사절로 보냈고, 김동운을 면직 조치하였으며, 11월 2일엔 국무총리 김종필이 박정희의 친서를 가지고 가는 것을 끝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였다. 박정희의 친서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80쪽) [각주:14]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 의문사

1973년 10월 16일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은 수사중인 간첩 사건에 대해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했다. 그로부터 9일 후인 10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19일 새벽 1시 30분경 중정 남산분청 7층에서 유럽거점간첩단 사건 관련 수사를 받던 중 동베를린에 갔다온 사실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

그러나 투신 자살했다는 장소의 현장사진 한 장 없었으며, 최종길이 간첩이었음을 입증할 구속영장이나 자술서 하나 제시되지 않은 발표였다. 사망한 지 6일 뒤에 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 중앙정보부는 그와 동시에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적발’이라는 발표를 함으로써 언론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렸다. 의문사에 대한 항의와 진상규명 요구가 빗발쳤지만 박 정권은 묵살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언론이 굳게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눈 하나 깜짝할 박 정권이 아니었다. 그 날조된 사실을 발표하던 기자회견은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이 주관했는데, 이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에겐 “현금 신권으로 20만 원”이 든 중앙정보부의 흰 봉투 촌지가 하나씩 뿌려졌다. (94, 95쪽)




 

제5장 긴급조치와 민주화투쟁 (1974년)

 

- 민청학련 사건

1974년 1월은 긴급조치 1호로 얼어붙었지만, 봄이 오고 3월 신학기가 되자 민주화운동은 다시 대학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3월 하순 어느날 서울 원서동 창경궁 앞길에서 이화여대 학생 한명이 치마 밑에 전단한 뭉치를 숨기고 가다 그만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 전단의 내용은 ‘4월3일 전국적으로 대학생 총궐기’였다. 때마침 끝에 ‘4.3총궐기’ 계획을 파악하였고, 이에 따라 박 정권은 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4월3일, 규모는 작았지만 예정대로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감신대, 명지대 등에서 오전 10시, 11시에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명의로 여러 선언문들이 발표되었다. 이들의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6개항의 요구 사항이 제시되어 있었다.

“첫째, 부패특권 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을 시정하고 부정부패 특권의 원흉을 즉각 처단하라. 둘째, 서민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국민경제의 밑받침인 근로대중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라. 셋째, 제 노동악법을 철폐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넷째, 국가비상사태, 1.8조치 등으로 구속된 애국지사들을 즉각 석방하고, 유신체제를 폐기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라. 다섯째, 모든 정보. 폭압정치의 원천인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라. 여섯째, 반민족적 대외 의존 경제를 청산하고 자립 경제체제를 확립하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호통을 치면서 “오늘 이후 맨 먼저 데모하는 대학부터 본보기로 폐교시켜 버리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도피중인 주모자들에 대한 현상금 액수도 놀라웠다. 이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기에 나와 유인태, 강구철 등의 현상금은 50만 원이었는데, 그 50만원이 100만 원으로, 4월13일에는 유인태와 내 사진이 붙은 전국적 지명수배가 내려지면서 현상금 액수가 200만 원까지 껑충 뛰었다. 현상금이 200만 원이라는 4월13일자 뉴스는 여정남의 하숙집에서 들었다. 유인태가 라디오를 통해 들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우리 모두는 설마(!)했다. 간첩 현상금이 30만 원이던 시절이었으니 실로 상상도 못할 액수였다. 그리고 내가 붙잡히던 4월24일 당시에는 현상금이 자그만치 300만 원으로 뛰어 있었다.” (130, 131쪽)



 

- 불길처럼 번진 자유언론실천선언

자유언론실천선언

박 정권의 폭압에 짓눌려 언론이 제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을 때, 일부 양심적인 기자들은 그간 여러차례 좌절된 자유언론운동을 추진해 갈 수 있는 기굴고 노동조합을 선택하고 노조의 설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1974년 3월 6일 동아노조가 설립되었다.

박정권의 언론통제는 늘 ‘언어조작’을 수반하였다. 박 정권은 언론으로 하여금 공공요금, 각종 협정가격 등을 인상할 때 ‘인상’이란 용어 대신에 ‘현실화’라는 용어를 쓰도록 했고, 학생 데모는 ‘학원 사태’로, 임금동결 조치는 ‘임금 안정’으로, 부정부패는 ‘사회부조리’로 쓸 것을 요구하였다. (169쪽)

박 정권은 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을 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2월 16일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동아일보>를 혼내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획책한 것이었다. 그 결과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 (185쪽) [각주:15]



 

제6장 폭력과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1975년)

 

- <동아일보>에서 내쫓긴 113명의 기자

시민들의 격려광고는 계속되었지만, 격려광고는 <동아일보>가 당면하게 된 경제적 위기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 사주는 투쟁의욕을 잃고 결국 박 정권의 광고탄압에 굴복하여 1975년 3월 8일 경영악화를 이유로 기구 축소를 단행한다면서 심의실.기획부.과학부.출판부를 없애고 사원 18명을 해고하였다. 이의 부당성을 지적한 기협분회장(장윤환) 외 1명(박지동)을 또 해고했다. 이렇게 시작된 <동아일보> 기자들의 해고는 신임 분회장(권영자) 등 17명의 해고로 이어졌다.

결국 <동아일보>는 3월 8일부터 5월 1일까지 7차례에 걸쳐 모두 1백 13명을 해고하였다. <동아일보>에 쏟아진 격려광고는 광고탄압 넉 달째를 맞은 3월 25일까지 9천2백23건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른 <동아일보>의 광고수입액은 1억 6백여 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정권의 탄압에 굴복해 기자들을 대량 해직시킨 이후엔 격려광고도 크게 줄어들어 5월 7일 이후 격려광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해직 기자들 중 일부는 출판사를 차리고 제적당한 학생 운동권 후배들을 편집부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한길사(김언호), 예조각(장윤환, 임채정), 과학과인간사(조학래), 청람출판사(권근술), 두레(신홍범,정태기), 아침(정동익) 등이 태어났는데, 이들 출판사가 바로 80년대 사회과학 출판사의 효시가 되었다." (226쪽)[각주:16]




 

-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

 32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 (2007)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새벽 6시에 사형을 집행했으니 상고가 기각된 지 채 하루도 안된 20시간 만이었다. 김용원,도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 이수병,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걸 의미한다.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축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 인혁당 연루자들은 심한 고문으로 죽은 후에도 시신이 온전하게 가족에게 인수되지 못했다. 당국이 고문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 유족의 동의없이 화장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사체 화장 등의 거듭되는 잔혹성과 의혹에 종교계에서 들고 일어났다."

무고한 국민의 피를 너무도 많이 흘리게 한 박정희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그는 후일 정부 요인들 앞에서 "크나큼 실책이라면 인혁당 8명을 처형한 것이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라고 고백했다. 8명이 사형당한 지 20년 후인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이 사법제도 1백 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백 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도 인혁당 사건 재판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라고 했다. 그걸 이제 알았나? 그 날의 '사법 살인'에 대해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그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역사학자 최상천은 일제와 박 정권을 비교한다. 일제에 충성혈서를 썼던 다카키 마사오,

바로 박정희다. 최상천은 박정희 치하의 한국을 '다카키 천국'으로 부르면서, 인혁당 사건이

일제시대와 '다카키 천국'시대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말한다.

"삼일운동 민족 대표에게 내린 일본제국의 최고형은 징역 3년이었다. ...... 일본제국은 '빨갱이 두목'인 박헌영이 미친 척하자 정신이상을 이유로 풀어줬다. ...... 일본제국은 악독한 짓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켰다. 독립운동가도 거의 정식 재판을 받았고 길어야 2-3년 정도 감옥살이를 했다."

최상천은 "다카키 천국에서는 인민혁명당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을 잡아다 족치고는 8명에게 사형, 8명에게 무기징역, 6명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 번개같이 처형해버렸다." 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조차 무차별 고문하는 나라. 하루 16시간 노동을 하며 무한 착취에 시달려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절규하며 분신 자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호소할 수 없는 나라. 유신반대 유인물 뿌린 죄로 징역 5년을 사는 나라, 노동운동 한다고 똥물을 끼얹고 작살내버리는 나라. '오적' 시 한 수로 졸지에 빨갱이가 되어 버리는 나라. 수많은 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고 대학에서 쫓아낸 나라. 대학에 탱크 끌고 들어가는 걸 밥먹듯 하는 나라. 조선(북한)에 끌려갔다 온 어민이 간첩이 되어 버리는 나라. ...... 일제시대에도 이런 야만은 없었다. 박정희는 오직 자기의 두목 권력을 위해 감시,협박,매수,미행,전화도청,사생활 추적, 세무조사,감금,고문,테러,살인,사건날조 등등 악행이라고 생긴 악행은 다 동원했다." (233쪽) [각주:17]




 

- 긴급조치 9호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 제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서도 이런 법은 없었다. 하물며 자유민주주의를 내건 유신 선포하에서 이러한 법률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한탄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고수하기 위하여 긴급조치 9호로 정계와 국민여론을 완전히 봉합해 버린 것이었다. 망치질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제3의 쿠테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251쪽)



 

- 의문의 죽음

장준하

'장준하 암살설'은 장준하의 죽음이 갖는 너무나 많은 의문점 때문에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장준하의 시신을 직접 사고 현장에서 운구해 내려온 백기완은 등산용 피켈로 찍힌 것 같은 후두부 함몰상과 시신 검안시 발견된 두 군데의 주사 자국을 결정적인 의문으로 제기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절벽에서 추락했다는 시신이 멀쩡하다니 말이 안 된다. 그 상태에서는 시신이 처참하게 일그러질 지형과 높이였다 .모든 조문객들도 암살의 기미를 눈치채고도 누구 하나 입을 열어 암살 혐의를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의 시국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멀쩡한 김지하가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었고 숨쉬는 것조차 박정희나 그 졸개들의 허가를 받아야 했었다고 과장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상황이었으니 언론인들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동아일보> 기자 성락오가 '장준하 사인(死因)에 의문 있다'고 보도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고, '야당 지도자의 괴사(怪死)'라는 기사를 쓴 <파 이스턴 이코너믹 리뷰>의 기자 로이 황은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 의문 제기는 먼 훗날까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002년 8월 국정원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보낸 당시 문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장준하를 정권에 해가 되는 '위해분자'로 분류해 조직적인 프락치 활용 등을 통해 밀착 감시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문서는 1975년 3월 31일에 작성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로 이는 장준하가 죽기 4개월여 전에 작성된 것이라 암살설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267, 268쪽) [각주:18]



 

-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

4월 23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에게 면담을 제의했다. 박정희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 월남 패망, 긴급조치 9호 발동 등으로 인해 안보 무드는 상승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게 김영삼의 기를 죽였던 걸까? 김영삼의 제의 28일 만인 5월 21일에 있는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은 박정희의 폭압 정치에 날개를 달아주는 불행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영삼은 대변인 이택돈과 비서실상 박권흠을 데리고 청와대로 갔다. 회담 내용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다. 청와대는 "좋은 분위기 속에 기탄없의 의견을 교환, 난국 극복을 위해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만 밝혔다. 김영삼은 회담 후 "국정 전반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당과 나에게 유익한 회담이었다"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김영삼은 회담 이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방향을 급선회하여 박 정권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충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영삼은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비록 '여야 지도자가 흉금을 털어놓고 내일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자충수를 놓고 있었다. (중략) 정가에선 시비가 일기 시작했다. 이민우, 유제연, 고재청 등은 '회담 내용을 다 말하진 않더라도 알릴 건 알려야 방향을 알고 따라갈 게 아닌가'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의심이 증폭되면서 회담 당일 김 총재가 당사 도착이 늦은 데에 대해서도 설왕설래했고, 거기에 이택돈은 '회담 내용 중 정리할 게 있어서 남산을 한 바퀴 드라이브하고 왔다'고 말해 의혹을 부채질했다. 몇억 원이 오고갔다더라 하는 금품수수설까지 나돌았다. (256, 257쪽)

1975년 5월, 박정희-김영삼 회담 때의 일입니다. 제가 신민당 대변인으로 김 총재를 모시고 청와대에 갔었습니다. 회담이 끝난 뒤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 제가 물어보았죠. 그때 김 총재는 특유의 어법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점은 이거야. 여당은 지가 하고, 야당은 나보고 맡으라는 거야.' 그래서 제가 '김대중 씨는 어떻게 하고요?'라고 반문했죠. 김 총재는 '김대중이는 끝났어!'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박-김 회담 이후로 김 총재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지요. 제가 유신 정권을 공격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김 총재가 제지를 하는 겁니다. 왜 자꾸 호랑이 코를 쿡쿡 쑤시냐고 말입니다. 호랑이 코를 쑤시라고 주문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냐고 했죠. 그래서 대변인을 그만두었죠." (이상 2권 258쪽) [각주:19]



 

 

제7장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1976년)

 

 



- 코리아 게이트

 

제 8장 ‘1백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1977년)

 

- 리영희 필화 사건

리영희는 11월 1일 한길사에서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20여 일 후인 11월 23일, 리영희는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20일간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다시 20일간 조사를 받은 뒤 12월 28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창작과비평사의 발행인 백낙청은 불구속 기소되었다. 리영희의 책 두 권이 다 '해외 공산집단을 고무찬양한 것'으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이전에 낸 <전환시대의 논리>까지 문제가 되었다.

박 정권하에서 진실을 안다는 건 괴로운 일인 정도가 아니라 큰일날 일이었다. 그 진실을 말한다는 건 더욱 큰일날 일이었다. 1978년 1월 27일 리영희의 첫 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8억인과의 대화> 책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중공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반공법 위반이다"라고 주장했다. 리영희는 "그럼 중공은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기술해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검사는 "그렇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지라도 반공법에 걸린다"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2심에서 징역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고 상고심은 기각되었다. (3권 93, 94쪽)

 

제9장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1978년)



 

- 똥물을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김수환 추기경

인천에 동일방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전체 1천3백 명의 노동자 중 1천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는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준의 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성기 등 회사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 4명이 분뇨가 가득 담긴 양동이 3개를 들고 투표장 근처에 나타났다. 그들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투표장 부근에 있던 여성노동자에게 달려들며 "이 쌍년들아, 똥이나 먹어라! 이것이 뭣인 줄 아냐? 이게 바로 개가 먹는 똥이다. 이 개같은 년들!"이라고 소리지르며 분뇨를 뿌렸다. … 분뇨를 얼굴에 들이부어도 반항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이 폭도들이 두 명씩 달라붙어 여성들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는 분뇨를 집어넣었다. 어떤 자는 여성 노동자의 윗셔츠의 단추를 쥐어 뜯고 가슴속에 분뇨를 처넣었다. ( 151, 152쪽)

 



- 박정희의 마지막 취임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대통령 선거를 조롱하는 전단을 찍어 뿌렸다. 이 전단은 먼저 대통령 선거를 보도한 <한국일보> 7월 6일자와 7일자 관련기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6일 상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오는 84년까지 재임할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을 선출한다. 국민회의는 6일 상오 10시 개회식을 한 뒤 단일 후보인 박 대통령에 대한 제 9대 대통령 선출 투표에 들어간다." (7월 6일 '한국일보' 1면)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6일 상오 10시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현 박정희 대통령을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제2대 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 박정희 후보가 2,577표 (무효 1표)를 얻어 (99.9%) 임기 6년의 제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7월 7일 '한국일보' 1면)

이 전단은 다음엔 '위 글은 우리나라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용 교과서 '승공통일의 길' 2페이지 47, 52, 53에서 발췌한 것임'이라는 하단 설명과 함께 '북한 공산 정권의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그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사기 행위'이다........ 우선 공산국가에서의 선거에서는 단 한 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반대할 자유는 없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중에서 적격자 한 사람을 고르는 선택 행위인데 입후보자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선거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임을 알 수 있다." (177쪽) [각주:20]



 

제10장 박정희 시대의 종말 (1979년)

 

 

김재규, 현장 검증

 

12.12. 전두환. 뒤로 보이는 노태우.

 

- YH 옥상 위에 노총 깃발 꽂아 놓고

 

- 김영삼 의원직 제명

 

- 유신 정권의 심장을 쏘다

 

- ‘YWCA 위장 결혼식’과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 전두환의 등장과 새로운 파시즘의 도래

 


 

굉장히 오래 타이핑했는데 아직도 정리가 덜 됐다. 포기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마지막 제10장만이라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힘들다. 

 

덧> 신문(2009.06.19) 을 보니 인혁당 사건에 관한 기사가 났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이 국가에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유가족이 승소. 법원은 국가가 피해자 유가족에게 200억의 배상하라고 판결했다고 한다. 돈 얼마로 그동안의 아픔이 치유되겠느냐마는 실로 다행인 일이라 생각한다. 차기 대통령으로 이미 낙점받은 박OO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훗날의 역사는 진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길고 힘들다. 세상은 대체로 어둡다.  



  1. 전태일은 인권을 경부고속도로는 경제적 성장을 상징. [본문으로]
  2. 2MB의 성접대부 발언이 생각난다. 못생긴 여자를 골라야 서비스가 좋다고 했었나? 박정희에 비하면 확실히 2MB가 실용적인 것은 맞다. 그러니까 실용 정부인가? [본문으로]
  3. 성수대교, 삼풍백화점이 생각난다. 비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따벼볼 필요가 있겠다. [본문으로]
  4. 다음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70년대의 김지하는 확실히 탁월했다. 현재의 김지하로 70년대의 김지하를 평가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다. 김지하가 노벨 문학상 및 평화상 후보로 몇 차례 올랐다는 얘기는 들은 바 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가 이를 방해했다고 강준만은 말한다. 김대중 노벨 평화상 받을 때 한나라당이 그렇게 반대했던 것처럼. 아이러니다. [본문으로]
  5.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를 보면 위와 같은 호남 차별이 곧 선거 결과에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지역주의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가장 기뻤던 것 중에 하나는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호남선 건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최신식 호남선 건물에서 귀향하며 조금의 상처가 치유됨을 느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실은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정리를 하는 직접적 계기가 있다. 일전에 아는 분들과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으신 그분께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더라. 난 박정희를 본 적도 없고, 기억도 없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결론은 어디서 정보를 얻는가이다. 모든 것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박정희에게도 명은 있다. 하지만 10 정도의 밝음으로 나머지 90의 어둠을 가리려 해서는 안된다. 명암을 구별할 것. 그리고 판단할 것. 과제다. [본문으로]
  7. 흠... 초등학교 때 삼촌에게 들은 얘기다. 삼촌의 군 시절. 부재자 투표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한다. 투표소에 들어가자 소대장이 “1번 맞지?” 하면서 “다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삼촌은 “아닙니다. 저는 김대중 후보를 찍을 겁니다.”라고 하자, 소대장은 욕을 하며 “빨갱이 새끼를 찍다니. 너도 빨갱이지?”라고 삼촌에게 린치를 가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기억의 왜곡인지. 아무튼 당시 선거에서 군부재자 투표 결과 박정희의 압승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불쌍하지 아니한가?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훗날 역사가 말할 것이다. 왜곡이다. 왜곡. [본문으로]
  9. 광주대단지. 성남의 과거다. 성남시민으로서 가슴 아픈 과거다. [본문으로]
  10. 자꾸만 MB악법이 생각난다. 2MB는 정말로 박정희를 사랑하는 것일까? 역사는 귀납이다. 알고, 적용하는 것이다. 적용하지 못하면 죽은 지식이다. [본문으로]
  11. 좃선일보. 넌 역시 일관성이 있었군! [본문으로]
  12. 기억난다. 어릴 때 새마을 운동. 난 늦잠이 많아서 아침 청소를 나간 기억이 별로 없다. 담임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나같은 아이들이 커서 데모하고, 나쁜 짓 한다고. 담임 선생님의 예언대로 될 뻔 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본문으로]
  13. 나 살던 고향 (유곡나루) -곽재구 詩 - 정태춘 노래 육만엔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맑은 유곡나루 음~ 아이스 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3박4일 풀코스에 육만엔이란다. 워~ 허어~~ 초가지붕 우로 피어오르는 아침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넝쿨 바라보며 니빠나모노 데스네 니빠나모노 데스네 개스불에 은어소금구이 혓바닥 사리살살 굴리면서 신간센 왕복기차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워~ 허어~~ 초가지붕 우로 피어오르는 아침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넝쿨 바라보며 니빠나모노 데스네 니빠나모노 데스네 낚시대 접고 고무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호텔 사우나에 몸풀면 긴밤 내내 미끈한 풋 가시내들 서비스 한번 볼만한데 음~음~ 환갑네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대접 받고 그저 아이스박스 가득가득 등살푸른 섬진강은 그 맑은 몸값이 육만엔 이란다. - 이 노래가 곽재구의 시였구나. 찾아 들어 보자. 가슴이 참 아프다. [본문으로]
  14. 김대중을 뺀 민주화 운동은? 여백이 클 것이다. [본문으로]
  15. 예지몽인가? 1974년의 사건이 2009년에도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MBC를 비롯한, 한겨레, 경향 신문에 대한 광고 보복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본문으로]
  16. EBS 지식채널e 中 "동아일보 해직기자"가 있다. 이는 한겨레 신문의 창간 비화에 대한 이야기다. 꼭 볼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17. 신영철 대법관이 생각난다. 역사란 이렇게 돌고 돈다. 사법부, 검찰. 믿을 게 별로 없다. 무섭다. [본문으로]
  18.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장준하의 죽음이 연상된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9. 김영삼의 3당 합당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20.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이었다. 촌철살인이란 바로 이런 것. [본문으로]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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