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2003) 2~4권

  

제2장. 충성 경쟁과 마법의 주문 ‘86․88’ (1981)

 

- 김대중의 목숨으로 흥정한 방미(訪美)

 

레이건이 미국의 11․4 대선에서 승리하자 전두환은 좋아서 무릎을 쳤고 신군부 인사들도 환호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1월 10일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정부는 인권문제로 한국정부 지도자들을 괴롭혀왔던 카터가 낙선하고 레이건이 압승하자 환호하고 있다. 득의에 찬 한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광주사태 배후조정 혐의로 체포한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을 서두를 것이다.”

반면 김대중은 눈물을 흘렸다. 김대중의 회고다.

 

“제2심에서도 사형선고가 내려지던 그 다음날, 또 하나의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현 대통령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는 뉴스였다. ‘인권외교’를 기치로 내건 카터가 재선된다면, 내 신변에도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빗나간 것이다. 새로 뽑힌 레이건씨는 보수파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사형이란 말인가? 신은 나를 버렸구나’하고 생각하니 사내 대장부지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정도로 나는 카터씨의 재선을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1980년 12월 9일과 18일, 그리고 81년 1월 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레이건의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앨런은 당시 중앙정보 공사였던 손장래의 주선으로 남한관리들과 회동해 김대중 문제를 의논했다. 앨런은 12․12의 주역이자 광주학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정호용과도 만났는데, 당시 정호용은 김대중은 남한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므로, “법에 따라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대해 앨런은 만일 “김대중을 처형한다면 한․미 정부 사이의 거북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앨런은 만약 김대중을 처형한다면 “벼락이 당신들을 치는듯한” 미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정호용은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초청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앨런은 김대중에 대한 선고가 대폭 감형되어야 한다는 조건 아래 레이건의 취임 후 전두환의 방미를 제안했다. (2권, 23, 24쪽)

 

- ‘86․88’이라는 마법의 주문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 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스포츠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反)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후일(86년) <말>[각주:1]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86은 88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소위 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86․88은 현정권이 통치명분으로 내세운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 야릇한 관제 조어(造語)는 관제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선전되면서 대중세뇌의 핵으로 등장하여 대중을 그야말로 ‘입만 벙긋하면 86․88’을 읊조리는 백치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65쪽)

 

제3장. 밤의 자유와 프로야구에 취해

 

- 통행금지 해제와 ‘애마부인’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해방감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야간통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들의 특권이 사라졌다.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각주:2] (83쪽)

 

 -  이대근의 <가루지기>,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등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던 기억이 난다.

 

<애마부인>은 서울극장에서 6월 11일까지 넉 달 가까이 장기 상영되어 당시로서는 기록적이라 할 수 있는 3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 1982년 영화감독 배창호는 이동철의 소설을 영화화한 <꼬방동네 사람들>을 발표했다. 빈민들이 잡초같이 모여 사는 산비탈 달동네인 꼬방동네가 무대인 이 영화는,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무려 67개의 수정을 강요받았는데,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다룬 소설의 원제목을 쓰지 마라”, “요강을 방안에 두지 마라” 등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배창호는 당시 이 작품을 서유럽의 어느 영화제에 출품하려다 결국 전두환 정권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지 이유는 역시 가난을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섹스’는 환영이었지만, ‘가난’은 금기였던 것이다. (91쪽)

 

-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0년 12월 9일 밤, 광주의 미문화원에서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임종수 등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결행한 이른바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될 것을 우려하여 방화가 아닌 단순한 전기누전이었다고 발표해 사건의 본질을 은폐했다. 그러나 은폐엔 한계가 있었다. 이로부터 15개월 후인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5월 광주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93쪽)

 

- 프로야구 출범

 

 - 전두환의 표정이 해맑다.

 

“어린아이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104쪽)

MBC가 앞장서서 프로야구 열기를 촉진하게끔 하는 동시에 이를 앞세워 모든 국민을 스포츠에 열광하게끔 만드는 것이 5공 정권의 심오한 스포츠정책이었다.

그래서 프로야구 출범 후, 스포츠 중계시간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81년 9월 8%에 불과했던 텔레비전 방송국의 스포츠 중계시간 비중은 82년 2월 12%로 증가하더니, 1년 후에는 20%에 이르렀다. 그리고 LA올림픽이 열렸던 84년 6월에는 프로그램의 4분의 1이 스포츠중계였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한마디로 스포츠 중계를 위한 방송이었다. 이때는 스포츠 중계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30~40%를 차지했다.[각주:3]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전국을 강타하자 KBS는 7월 3일부터는 아예 뉴스도 드라마도 뺀 채 하루종일 이산가족찾기를 방송했다. KBS와 대한적십자사는 매일 이산가족찾기 명단이 실린 호외를 발행했고, 생방송 3일째부터는 신문들도 이산가족찾기 열풍을 1면 머릿기사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세계 방송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긴 방송이라 할 수 있는 <이산가족 찾기 특별생방송>은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AP, UPI, 로이터, AFP 등 세계 4대 통신과 각국의 일간지. 방송사는 서울발 특파원기사를 크게 다루었고, 방송의 열기가 더해감에 따라 대규모 취재반을 서울에 파견하기도 했다. 미국의 ABC 방송은 인공위성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중계하기도 했다. (138쪽)

 

- KAL기 실종과 ‘땡전뉴스’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미국인 51명, 일본인 28명 포함)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 (152쪽)

이 사건은 미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겐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던 때문이었다. 레이건은 이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철저히 이용했다. (153쪽)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

 

"전두환 씨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방송은 유린되다시피 했다. 방송이 더욱 참담했던 것은 신문보다 TV를 선호했던 전씨의 개인적 성향과 이를 부추긴 주위의 영향이 컸다. 때마침 5공화국부터는 컬러TV방송이 시작돼 TV의 영향력이 차원을 높이고 있었다. 이에 착안한 청와대 측근들은 전씨 이미지 메이킹에 주로 TV를 동원키로 하고 방송담당 비서관이란 직책까지 신설했다. 그 첫 담당자가 김기도씨(전 MBC 정치부장)였다. 그는 최초로 대통령 동정보도 때 육성을 넣어 효과를 살리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여기에서 당시 KBS 이원홍 사장과 MBC 이진희 사장의 충성경쟁이 가열돼 신문에 이어 TV에도 로열박스가 생겨났다. TV의 로열박스는 뉴스순서 중 항상 첫번째 자리, 즉 톱 뉴스였다. 뚜뚜... 하는 9시뉴스의 신호음이 나간 뒤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시작하는 뉴스 때문에 전씨의 아호가 '뚜뚜전', '오늘전'으로 회자됐고, 전씨 동정이 끝나면 곧이어 '또한 이순자 여사는......'이 사작돼 이씨는 '또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린된 방송을 상징하는 사건 중의 하나가 83년 KAL기 실종 뉴스와 대통령 동정 중 어느 것을 톱 뉴스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한 방송사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음에 뒤이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뉴스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 TV화면에 전씨가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뉴스시간에 뉴스는 뒤로 밀리고 권력이 판을 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땡전뉴스'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이 땡전뉴스는 심한 경우 총 뉴스시간 45분 가운데 30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방송사끼리 누가 오래 대통령 동정을 다루느냐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곤 했었다. 방송사들의 이런 과잉 충성경쟁은 후일 본격적인 KBS 시청료 거부운동을 낳게 했다. (157쪽)

 

제4장. 저항의 불꽃은 타오르고 (1984년)

 

- ‘환상적으로 강요된 애국심’

 

LA올림픽은 미국만의 축제가 아니라 한국의 축제이기도 했다. 8월 13일에 폐막된 LA올림픽에서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로 종합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16일간의 올림픽 기간 중 모두 11회의 호외를 발행한 <조선일보>를 필두로 하여 언론매체들은 ‘올림픽 열기’를 달구는 데에 앞장섰다.

LA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올림픽 찬가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LA올림픽 개선 국민축제’에 대해 고광헌은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우리의 인기연예인들이 전부 동원되어 주로 <아! 대한민국> 같은 소위 건전가요를 부르고, 코미디언들의 식상한 연기가 국민대중을 사로잡은 밤이었다. 다 같이 애국가를 반복해서 부를 때 휘황찬란하던 조명과 네온싸인이 일제히 꺼지고 완벽한 어둠과 정적 속에서 태극기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하였다. 태극기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순간 여의도에 모인 사람들과 전국의 모든 시청자들은 집단최면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말초적인 감정에 의탁한 애국심을 강요했다. 과연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이렇게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의 정치․문화적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196쪽)

 

-『노동의 새벽』과『영웅시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각주:4]는 83년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이 꾸려가고 있던 동인지 『시와 경제』2호에 총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84년 9월에 나온 『노동의 새벽』엔 모두 42편의 시가 실렸다. 이 가운데 <손 무덤>을 감상해보자. (206쪽)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집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닥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 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옘병할, 산데미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마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뚝싹뚝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제6장. 탄압과 고문의 광기 속에서 (1985년)

 

- ‘괘씸죄’에 걸린 국제그룹의 해체

 

전두환정권은 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정리에 나섰다. 전두환정권은 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정리에 나섰다.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의 이름 아래 85년 5월부터 88년 2월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부실기업정리가 단행되었는데, 해운업, 조선, 합판, 섬유,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88년까지 모두 78개의 기업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되었다. (236쪽)

1985년 2월 21일 오전 10시에 발표된 국내 제6위의 재벌 '국제그룹'의 해체방침은 겉으론 부실기업정리라는 외피를 썼지만 실제로는 정치보복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93년 7월 29일 양정모는 마침내 헌법재판소로부터 ‘공권력의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241쪽)

 

후일, 국제그룹은 전두환에게 정치자금을 적게 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해체당했다는 게 거의 정설로 통용되었다. 양정모가 전두환에게 ‘찍힌’ 여러 가지 이유는 후일 청문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중 하나는 각종 성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양정모는 새세대육영회와 새마음심장재단이 2천5백여억 원을 걷는 동안 한 푼도 내지 않았고, 1984년 11월에는 청와대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서야 새마을 성금 10억을 그것도 3개월짜리 어음으로 냈다. 국제그룹 해체 원인으로 양정모가 밝히고 있는 또다른 이유는 전두환이 나눠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자기 것을 뺐었다는 것이다.

 

“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양김씨의 민추협은 바람을 타고 있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2․12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추가로 필요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황 때문에 10대 재벌에서는 수금이 잘 안됐다. 이때 재벌순위가 저 아래인 재벌 중에서 회사 규모에 걸맞지 않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권력에 밀착한 재벌들이 있었다. 총선 때 이들에게 비자금을 받아 쓴 전두환은 이들에게 나눠줄 먹이가 필요했다. 그때 걸려든 것이 국제그룹이었다.” (244쪽)

 

- 동아, 조선의 민족지 논쟁

 

 

일제치하에서부터 치열한 경쟁관계였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창간 배경에 있어서 누가 더 민족적인 성격이 강한 민족지였는지 그걸 따지는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가장 격렬한 싸움이 85년에 터졌다.

<동아일보> 85년 4월 1일자 창간 65주년 기념호는 <동아일보>의 창간 과정에 대해 말하면서 <조선일보>를 친일 신문이라고 말했으며, 이어 4월 12일자 기사에서도 그런 주장을 해, 두 신문 사이에 치열한 '민족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249쪽)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의 경쟁을 의식해 이미 1920년 8월 27일까지 총독부에 지면을 압수당하는 기록을 23회나 세우는 등 '비판의 상품화'를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보았다. 이 '비판의 상품화' 전략에 대해 최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20년부터 1925년대까지는 이러한 당국에 압수당하는 것을 오히려 장하게 여겼다. 이는 신문사측도 그랬거니와 독자인 민중 대중도 이를 크게 지지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신문기자들은 경무국 도서과로부터 압수라는 통보가 오면 만세를 불렀으며 닷새만 압수가 없으면 오히려 기자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건너 한번씩 편집국장은 도서과장과 경무국장에 담판을 하러 갔었다. 그러나 1926년 이후로부터 1931년대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전진과 더불어 총독부 당국의 강경한 탄압정책으로 말미암아 .... 기개와 투지도 어느덧 둔하여져서 압수를 당하면 그저 침울한 침묵으로 따라갈 뿐이었다."

 

어찌됐던 1920년대 초반 <조선일보>의 주된 생존전략은 '압수당하기'였지만, 그게 큰 효과를 낼 수는 없었다. <조선일보>는 친일파 두목 송병준의 손에 넘어가 '친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 결과 경영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결국 송병준이 손을 들고 1924년 9월 12일 <조선일보>를 신석우에게 매도함으로써 <조선일보>는 큰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민족주의자인 이상재가 사장이 되면서 편집진 및 지면구성을 대폭 쇄신하여 민족지로서 뚜렷한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1925년부터는 사회주의 논조를 펴기 시작해서 사회주의 신문이라는 평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운명은 1933년 3월 21일 조선일보를 방응모가 인수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방응모는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대등한 관계가 될 정도로 상업적 수완은 잘 발휘하였지만, 20년대와는 달리 조선일보를 철저한 친일신문으로 이끌었다.

 

물론 이는 당시의 정세변화와 일제의 통치전략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기에 방응모만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나,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방 씨 일가 소유의 조선일보가 그런 과거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하기는커녕 당당하게 큰소리친다는 건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워낙 그렇게 대담하기 때문에 5공에 대해서도 그렇게 낯 뜨거운 찬양을 해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 2권, 254쪽)

 

제7장. 대통령 직선제를 향하여 (1986년)

 

- 개헌 1천만 명 서명 운동

 

전두환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에서 “대통령 선거 방법의 변경에 관한 문제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선례와 서울 올림픽 개최라는 긴급한 국가적 과제가 성취되고 난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야당이 집권하면 올림픽 개최가 안 되는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했음 직한 신민당은 2월 12일부터 대통령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3월 9일 추기경 김수환은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9일 기도’를 마무리하는 정오 미사에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고 나섰고, 3월 13일에는 한국 기독교협의회가 1천만 개헌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 날 여성계에서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이태영과 여성단체협의회의장 이우정 등 13명이 모여 ‘민주헌법쟁취 범여성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여기에 민통련과 천주교정의평화의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도 개헌 서명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당시 재야 법조단체였던 대한변호사회도 3월 26일 개헌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3권, 19쪽)

 

- ‘보도지침’ 폭로 사건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 보내 사실상 언로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하는 기이한 작태를 연출하였다. 이 보도지침은 1985년 6월 해직 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협의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말>지 86년 9월호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의 자료 제공을 받아 폭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48쪽)

 

- 도시빈민 울리는 86․88

 

86년 10월 31일 신당6동 강제철거시 2병이 분신을 기도하였고 12월 4일 철거민 1명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철거 이유는 신라호텔이 바로 맞은 편에 있어 외국인들이 보는 서울의 도시 미관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각주:5] 강제철거는 대단히 폭력적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사망하기까지 했다. 86년 한 해에만 철거 현장에서 숨진 도시빈민은 모두 5명이었으며, 86년 4월부터 88년 2월까지 강제철거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14명이나 되었다.

86년 서울의 한 철거 현장 곳곳에선 다음과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허울 좋은 86, 88 올림픽이 없는 사람 다 죽여요. 살고 있는 주민들 다 쫓아내고 어쩌겠다는 건가요? 이건 재개발이 아니라 투기개발이예요, 투기개발.” (72쪽)

 

- 86 아시안 게임

 

[각주:6]

“그 춥고 엄혹했던 겨울, 우리는 아나운서, 기자, PD 할 것 없이 모든 탤런트, 코미디언, 가수까지 다 동원돼서 시내로, 학교로, 절로, 교회로 뛰었다. 코흘리개들은 저금통을 깼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용돈을 모았다. 우리는 그것을 ‘앵벌이’라 불렀다. 명동, 서울역, 광화문에 중계차를 대놓고 추위에 코끝이 빨개지도록 서 있으면서 ‘손님’들의 주머니돈을 긁어모았던 것이다. 모금방송이 있던 날 그 ‘앵벌이’에 배당된 사람들의 얼굴은 난감함 그 자체였다. 그것도 단지 추위가 싫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6개월만에 7백억 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모았다. (99쪽)

 

제8장.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1987년)

 

- 6․10 항쟁과 ‘중산층의 반란’

 

 

 

1987년 6월 2일 전두환은 민정당의 중앙집행위원회 간부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해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두환이 20분에 걸쳐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내용의 원고를 낭독한 후, 노태우는 감격에 떨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려움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 주십시오. 동지 여러분, 지도해 주십시오.”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는 간선제 선거를 통해 새로운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선 박종철군 고문 살인 및 호헌 철폐 규탄 시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6․10 항쟁에서도 4․19 혁명 때처럼 한 장의 사진이 큰 기여를 하였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다. … 바로 이 한 장의 사지이 신문에 보도된 다음날부터 대학에는 대형 걸개 그림이 걸렸고, 시위학생들은 이 사진을 손수건․스카프 등으로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사진은 군사독재정권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결정적인 사진이 되었다. (157쪽)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출정식을 갖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에는 학생과 야당의원들이 노상 규탄대회를 열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쫓기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각주:7]

 

이 날의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는데, 경찰은 이 날의 국민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성난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국민대회는 진압에 나선 경찰들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최루탄으로 인해 흡사 시가전을 방불케 할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찰들은 사복 체포조를 동원하여 시위자 검거에 나섰는데, 이 날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연행된 사람만 해도 3천8백31명에 이르렀다. (159쪽)

 

 - 이한열 열사의 노제. 시청 광장.

6월 26일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은 6월항쟁의 절정이었는데, 이 날 시위에는 전국 334개 시, 4개 군․읍 지에서 18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나섰던 경찰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참여는 전두환 정권을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날 시위로 전국에서 3천4백67명이 연행되었고, 경찰소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투석과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되거나 방화되었다. 파손된 경찰 차량도 수십 대에 이르렀다. 6․10 시위 이후 만 17일 간 전국에서 열린 시위는 모두 2천1백45회, 발사된 최루탄은 모두 35만 발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170쪽)

 

- 6․29 민주화 선언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171쪽)

 

- 1987년 대통령 선거

 

 

 - 노태우의 여의도 유세. '보통 사람'이란 단어가 보인다.

 

1987년 7월 9일 김대중이 사면복권되자 세상의 이목은 누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지에 쏠렸다. 7월 17일엔 김대중의 계보조직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는 기정사실화 되었다. 김대중은 8월 8일 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하였다. 양감은 8월 11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9월 12일 김영삼계는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추대를 선언하고, 산하 조직인 민주산악회의 조직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질세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87년 9월 중순 워싱턴을 방문해 레이건 을 면담했다.

 

노태우 진영은 ‘안정이냐, 혼란이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떠내려간다. 느니 ‘대안 없는 투쟁경력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없다’느니 하는 겁주기 전략을 구사하였다 또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해 박정희가 원 없이 우려먹었던 ‘색깔 공세’를 취했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경합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표 초반부터 우세를 보이던 노태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노태우는 36.6%(828만 표)의 득표율을 기록해 28.0%(633만 표)와 27.1%(611만표)를 얻는 데 그친 김영삼과 김대중을 따돌리고 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6.6%짜리 대통령이었다.[각주:8] (220쪽)

 

- 1987년 대선과 지역감정

 

 - 김영삼의 유세 현장. 사람 겁나 많다.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의 노태우는 대구와 경북에서 유효표의 70.7%, 66.4%를,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은 부산, 경남에서 56%, 51.3%를, 평민당의 김대중은 광주, 전남, 전북에서 각각 94.4%, 90.3%, 83.5%를 득표했다.

이 같은 결과가 말해주듯이, 87년 대선은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건 5공 정권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부추겨진 것이었다.

87년 11월 1일 부산 유세를 마친 김대중의 숙소에 300여 명의 폭도들이 몰려가 호텔 현관을 부수고 각목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려 평민당원 15명이 부상하고 차량 10여 대가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14일 김영삼의 광주 유세에서는 김영삼이 군중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고 피신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과연 누가 저지른 것이었을까? 이는 보안사가 87년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을 위해 가장 크게 기여한 공작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통하는 것이었다. 후일, <조선일보> 기자 방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H처장(준장)이었다. 그는 보안사 내에서 ‘흑색 선전의 귀재’로 불리는 사람으로 80년 광주사태 때 전두환 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전남도청에 있던 폭약의 뇌관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 보내 ‘돌멩이 투척 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보안사 장고는 ‘이상하리만큼 YS를 집중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느 한쪽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면 상승 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인데다 보안사로서는 기존의 ‘반(反) 호남’ 정서를 건드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33, 234쪽)

 

제9장. 서울올림픽의 빛과 그리자 (1988년)

 

- 5공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일보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섰으며,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도 크게 기여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매출액에 있어서 <조선일보>는 161억 원으로 <동아일보>(265억)와 <한국일보>(217억)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5공을 거치고 난 88년에 이르러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와 <한국일보>(713억)를 압도하게 되었다. 권언유착을 신문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 창출에 앞장서는 ‘정치 신문’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261쪽)

 

- 서울 올림픽과 대한민국의 영광

 

 

한국은 과거 1~2개의 금메달에 그쳤지만, 이 대회에선 금 12, 은 10, 동 11개 등 도합 33개의 메달을 따내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하는 대성과를 이루었다(중국은 9위, 일본은 14위).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려졌던 5공 정권의 군사작전식 스포츠 정책이 맺은 결실이었다.[각주:9]

무엇보다 올림픽 전후로 오락․문화산업, 음식․숙박업, 관광산업, 스포츠 및 여행장비산업 등의 여가산업이 급격하게 팽창했다. 재벌들은 앞다투어 관광호텔업과 레저스포츠 시설의 건설 및 운영 등 관광레저업에 뛰어들었고, 기존의 건설업과 프로 스포츠, 스포츠웨어․용구산업을 발판으로 레저산업을 주도하였다. 이는 전체적인 국민 소득의 향상에 근거한 ‘여가의 상품화’ 전략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것 못지 않게 부동산과 노사문제도 중요한 이유였다. 반면 도시빈민들은 올림픽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올림픽’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이겨내긴 어려웠다. (이상 3권, 298쪽)

 

제10장. 중산층 신화와 공안정국의 결탁 (1989년)

 

- 중간 평가 유보와 노태우․김영삼의 밀월

 

 - 1990년의 3당 합당. 민자당이 된다. 이후 신한국당을 거친 한나라당의 전신이다.

노태우는 1987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노태우는 김대중과의 회담에서 중간평가에 대통령의 신임을 연계시키는 것은 위헌이라는 점에 동의한 채 중간평가는 단순히 노태우 정부의 정책평가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합의했다. 이 합의로 인해 노태우는 중간평가에서 50% 이상의 득표에 실패해도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판을 확보했다. 다음날, 신문 1면에는 일제히 “중간평가에 신임을 연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김영삼과 민주당은 21일 마포 가든호텔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중간평가 유보 담화를 ‘국민기만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4월 13일에 실시된 동해 보궐선거에서의 후보 매수 사건은 김영삼과 민주당의 발목을 잡는 대형 악재로 떠올랐다. 이는 민주당측이 공화당의 후보 이홍섭을 1억 5천만 원에 매수한 사건이었는데, 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가 5월 30일 구속되고 김영삼의 사전 공모설이 유포되면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용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는 정부측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 총재는 민정당이 중간평가를 유보한 이후 기세 좋게 나갔으나 후보매수 사건이 터지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의 정치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제2야당 총재로 김대중에게 눌려지내는 치욕을 감수하기 어려웠던 김영삼은 이 사건으로 6공 정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잡히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결행하게 된다. 당시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이 증언하듯이, “3당 통합은 사실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노태우와 김영삼의 ‘밀월관계’가 가시화 되기 시작한 것은 5월 31일에 열린 노태우․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었다. 김영삼은 이 회담에서 ‘초당적 북방외교’에 합의했다. 김영삼은 6월 중 소련과 미국을 방문했는데, 6월 6일 소련에서 청와대가 주선해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과의 회담에 응하고 이 회담에서 정부측 입장을 지지해줌으로써 3당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밟아갔다.

1989년 8월 18일에 실시된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김영삼의 3당 통합 결심을 확실하게 굳혀주는 또다른 사건이 되었다. 공안정국으로 인해 김대중과 평민당이 위기에 청해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 이원범의 득표율은 2등으로 낙선한 평민당 후보의 득표율 3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8.8%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4권, 59~61쪽)

 

- 노무현의 3당 합당 반대. 노무현의 사진 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다.

 

- 조선일보의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수

 

1989년 3월, 이른바 ‘조평 사태’가 터졌다. <조선일보>와 평민당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조․평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은 3월 5일자 <주간조선>에 실린 <조선일보> 기자 부지영의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순방 동행취재기>였다.

이 기사가 나갔을 당시만 하더라도 평민당 내부에서는 <조선일보>와의 일전 불사론과 신중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다가 3월 3일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조선일보>와의 전면전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렇게 <조선일보>와의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 배경에는 총재 김대중의 강경한 입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날 회의에서 김대중은 “수십 년간 쌓아온 정치인들의 신뢰가 한두 기자가 쓴 기사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면서 “내가 책임질 테니 끝까지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평민당은 3월 7일 부지영을 포함하여 <조선일보> 발행인, 편집국장, <주간조선> 발행인, 편집인 등 5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평민당의 강경 대응에 맞서 <조선일보>도 완강한 입장을 고수했다. <조선일보>는 3월 3일 평민당의 회의 결과가 <조선일보>와의 전면전으로 결정되자, 곧 평민당의 반응을 ‘새로운 형태의 언론탄압’이라고 규정한 후, 다음날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평민당이 <주간조선>의 보도 내용을 문제삼아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한 것은 언론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며 “<주간조선>의 관계 보도 내용은 진실에 입각한 것임을 재확인한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평 사태는 10월 17일 평민당의 고발 취하로 사건 발생 후 7개월만에 일단락 되었다. 방우영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평민당측의 불매운동으로 <조선일보> 부수는 5만부가 줄었으며, 발행 부수 감소는 호남지역(2만3천8백29부)보다는 비호남 전체(2만4천6백48부)가 약간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각주:10] (74~89쪽)

 

- 10년만에 10배 상승한 주가지수

 

 

1985년 말 163이던 종합주가지수가 1986년 말에는 272, 1987년 말에는 525, 1988년 말에는 907을 기록함으로써 불과 3년 동안에 주가 지수가 5.5배나 상승하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증권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걸 시사해주는 것이었다. 이 주가 급등은 투자가들에게 평균적으로 매년 70~90%의 높은 자본 수익률을 안겨주었지만 여기서 정작 막대한 이익을 올린 것은 큰손 및 기관투자가들이고 일반투자가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이 시기의 주가 급등의 원인으로는, 당시 한국 경제의 경상수지 흑자 전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 올림픽 등에 따라 시중 유동성이 풍부해진 상태에서 지하경제의 큰손들의 검은 돈과 가진 자들의 여유 자금 등이 투기성 자금으로 증시에 유입됨으로써 유발된 것이었다. 여기서 가진자들은 막강한 자금력과 시장 통제력을 동원하여 증시를 투기적 상황으로 가열시키며 일반투자자들을 유인하였다. 89년 3월 31일 주가지수는 1천 포인트를 돌파했는데, 이는 10년만에 10배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공의 정권안보 공작에 곁들여진 6공의 중간층 포섭 전략은 상당히 먹혀 들어갔다. 정치적으로는 노태우에 반대하면서도 경제적 풍요와 이익을 위해 노태우 체제를 지지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 화이트칼라는 “노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정치적으로는 동조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투자한 증권에서 이익을 남기고 작은 아파트 한 채 라도 구입할 때까지 만이라도 커다란 격변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각주:11] (215쪽)

 

- 5․6공의 전라도 죽이기

 

80년 5월 31일 설치된 국보위의 분과의원은 모두 84명이었는데, 이중 호남 출신은 단지 두 명에 불과했다. 반면, 분과의원의 절반 이상은 영남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미 이때부터 호남 차별이 예고되었던 걸까? 몇몇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5공이 ‘스포츠 공화국’인 동시에 ‘호남 차별 공화국’이기도 했다는 걸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장․차관 및 처․청장 등 차관급 이상 고위 정무직 인사의 영호남 출신간 격차가 1공 18. 8대 6.2, 2공 20 대 20, 3․4공 30.1 대 13.2에서 5공 43.6 대 9.6으로 나타났다.” (연세대 교수 유석해)

“5공 기간 동안 경제관료의 재직 횟수 가운데 영남 출신이 44.4%를 차지한 반면 충청지역은 2.2%, 호남지역은 8.9%에지나지 않았다.” (단국대 교수 박동운)

 

영남 출신은 고위직을 거의 말아먹다시피 했다. 5공 시절 차관급 이상 관료 155명 중 43.6%인 67명이 경상도 출신(호남 출신은 9.6%)이었으며, 6공시 영남 출신은 전 각료의 48%, 차관급에선 60%에 일렀다. 또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주요 실국장 등 요직은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이 차지했고, 특히 청와대와 검찰은 영남 출신이 거의 독점했다.

 

군에서의 영남 패군주의는 더욱 심했다. 1공부터 6공까지 육군참모총장은 경상도 출신이 전체 임기의 73%를 차지했다. 66년에서 90년까지 10대에 걸친 24년 동안의 20년간을 경상도 출신끼리 이어가면서 참모총장을 했으며, 해군은 21년 가운데 18년, 공군은 21년 가운데 16년을 그렇게 했다.

정부투지가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89년 정부투자기관 사장의 61.5%가 영남 신이었다. 90년 10월 말 현재 24개 정부투자기관의 임원 72명의 출신 지역은 영남이 44%로 32명인 반면, 호남은 0.9%로 7명에 지나지 않았다.

 

기업 내부에서의 호남 차별도 극심했다. 정경유착이 뿌리를 내린 한국에서 기업은 정관계의 인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50대 재별 창업주의 44%가 영남 출신(호남 출신 6%)이라는 게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88년 국회 지역감정 특위가 국제 100대 대기업 임원의 출신도별 분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 790명 가운데 서울 37.8%, 영남 32.7%, 충청 9.8%, 경기 6.7%, 호남 6.3% 등이었다.

 

영남 패권주의자들은 공직 사회에서의 호남 차별에 대해 영호남간의 큰 인구 격차를 내세우며 차별을 정당화하곤 했지만, 그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 경북대 지리학과 교수 박찬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업화 이전인 1939년의 인구 구성을 보면 영남인이 1천500만 명으로 남한 전체 인구의 35.5%, 그리고 호남인이 1천209만 명으로 30.0%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주가 있었지만 인구의 자연 증가에서는 영호남간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1939년과 같은 비율의 영호남 출신 사람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고위 관료에 호남 출신 인사가 인구비율대로 30.0%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27~231쪽)

 

- 맺음말 : 문제는 관객의 부재

 

80년대 내내 수많은 ‘광주들’이 존재했다. 관객의 시선이 차단된 밀실에서의 야만적인 고문과 살인 행위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들이 그때 언론에 의해 보도될 수 있었다면, 5공의 탄생과 존립이 가능했겠는가? 상당수 한국인이 더러운 지역주의에 중독되고 추악한 탐욕의 문화에 절어 있다 할망정 그들도 자식을 낳아 키우고 그들의 혈관에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인식(認識)의 문제였다. 달리 말하자면, 인식을 매개하는 언론의 문제였다. 현장과 관객을 매개해주는 것이 바로 언론이기 때문이다. 그 매개는 무력에 의해서만 기능을 상실했던 건 아니다. 매개 자체가 타락했다! 언론 스스로 무서운 권력이자 ‘탐욕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그 대표적 에증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너무 욕하진 말자.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철부지 어린아이가 손에 들려 있는 칼을 휘돌러 본 게 무얼 의미하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일개 기업의 안전과 번영에만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정권권력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게 언론권력이라는 이른바 ‘권력변환’을 이해하면서 자신들의 손에 들려있는 칼을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신문 구독자들도 자신의 가벼운 소비 행위가 무얼 의미할 수 있는게에 대해 두렵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읽을 거리가 많다’는 것에 매료돼 훨씬 더 중요한 다른 것을 무시하는 ‘아메바’가 아니라면 말이다.(이상 4권 끝, 282쪽)

 

- 조선일보는 센스쟁이



타이핑이 굉장히 힘들다, 이제 이런 무식한 짓은 그만. ^^;;;





  1. ‘지식의 샘’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선배가 있다. 이 선배와는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껏 연락을 하고 있으니 꽤 오랜 벗이다. 대학을 휴학하고 하루만큼의 종이를 씹어대며 무기력하던 96년의 그 겨울. 속초 동명항에 간 적이 있다. 나와 ‘지식의 샘’과 ‘지식의 샘’의 선배. ‘지식의 샘’의 선배는 문창과를 졸업하고 간경화에 매일 피똥을 싼다고 했다. 정상인도 피똥을 쌀 만큼 그 겨울의 밤, 술을 미친 듯 마셨다. ‘지식의 샘’의 선배는『말』지 기자라고 했었나, 수습 기자라고 했었나. ‘지식의 샘’의 선배를 보건대 그리 좋은 주간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굉장한 곳이었다. [본문으로]
  2. 나는 야간 통행 금지에 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대학 다닐 때 야간에 술집 영업을 금지했던 기억은 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단골 주인 아줌마는 술집 문을 잠그고 몰래 술을 팔았었다. [본문으로]
  3. [/footnote] (111쪽)

 

제3장. ‘땡전뉴스’가 대변한 ‘전두환 공화국’ (1983년)

 

- 이산가족찾기방송

 

  - 여의도 이산가족찾기 현장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1TV를 통해 특별 생방송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11월 14일까지 138일간 총 방송시간은 모두 453시간 45분이었으며, 방송기간 동안 방송 신청자 10만 952명 중 5만 3536명이 출연해서 1만 189명이 상봉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95분 가량의 분량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무려 1천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몰려들었고, 방송 도중에는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만큼 전화가 폭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KBS는 새벽 1시까지 예정되어 있던 방송시간을 새벽 3시까지 늘려 연장 방송했다. 4시간 15분 동안 진행된 생방송에는 총 850가족이 출연해 36가족이 혈육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이튿날 KBS 본관 앞에는 날이 밝기도 전부터 1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몰려들었다. 이에 KBS는 연장방송을 결정했는데, 7월 1일의 이산가족찾기는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생방송되었다. 이렇게 새벽 5시까지 방송을 한 것은 한국방송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KBS는 7월 1일 '이산가족찾기추진본부'를 긴급 설치해, 방송시간도 대형 편성으로 바꾸었다. 7월 1일에는 8시간 45분, 7월 2일에는 14시간의 생방송이 이어졌는데, 이날 하루에 재회의 기쁨을 나눈 이산가족이 3백여 쌍이 되었다.[footnote]‘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노래. 이산 가족 찾기. 북쪽으로는 서울 이상을 가본 적도 없는 우리 어머니조차 이 방송을 보시며 많이 우셨다. [본문으로]

  • 박노해. 본명 박기평. 노해 : 노동자 해방. 딴 생각. 노해민이란 대학 동기가 있다. 이 친구 이름이 상징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던지 선배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름이.. ‘민중 노동자 해방’ 뭐 이런 거 아니냐고. 내 동기 노해민군. 그게 뭐예요? [본문으로]
  • 2002 월드컵 때. 나는 율동공원이라든가, 공설운동장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대형 스크린을 보며 즐겼다. 그러나 상암월드컵 경기장 역시 그곳에서 살고 있던 도시 빈민 900세대를 내쫓은 뒤 지어진 것이었다. 명(明)과 암(暗). 함부로 들뜨지 말 것. [본문으로]
  • [/footnote]

     - 임춘애 선수. 이후 88년 올림픽 성화 마지막 주자가 된다. 지금은 칼국수집 사장이라고 한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우승한 중국의 금메달 94개에 1개가 모자라는 93개를 획득함으로써 2위를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5공 정권의 입장에선 그 누구보다 더 좋아 죽을 일이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게임의 유치는 광주 학살을 저지른 5공 정권이 그 ‘원죄’를 덮기 위한 최상의 카드였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열을 내고 떠들어낸 이른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으로 모든 걸 감출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 앞에선 ‘민주화’도 무력했다. 그런 이치를 잘 아는 신군부의 주역들은 86․88을 위해 그야말로 발 벗고 뛰었다. 5공 정권은 ‘스포츠공화국’답게 두 게임을 여론 조작의 주무기로 활용하였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교과서도 그러한 여론 조작에서 비켜갈 순 없었다. (76쪽)

     

    - TV가 ‘앵벌이’로 나선 ‘평화의 댐’ 사건

     

    1986년 말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걸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86년 10월 30일 정부 발표로부터 시작된 ‘평화의 댐’ 사건이었다. 북한이 건설한다는 금강산댐은 정부 발표와 언론의 부풀리기 보도에 의해 순식간에 남한 사회에 공포를 몰고 왔다.

    국방부 군사정보팀은 당시 금강산댐 주변의 지형 등을 찍은 항공사진을 판독해본 결과 “안기부가 댐의 담수 및 방류량을 실제보다 부풀려 잡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기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었으니 더욱 기가 막힌 일이었다. 국방부 군사정보 고위 당국자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5공 정권이야말로 정권의 사욕(私慾)을 위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주범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대대적인 연기 행가엔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없었다. 언론과 일부 지식인이 5공에 대한 충성 경쟁에 돌입하면서 공포는 더욱 증폭되었다. 언론은 “2백억 톤의 물이 서울을 덮친다. 63빌딩의 절반 가까이 물에 잠기고”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 “수도권까지 물바다, 잠실 올림픽 시설은 물론이고 한강변 아파트군은 완전히 물속에 잠겨” 운운하는 보도를 해댔다. 북안이 왜 그런 짓을? 이때에도 답은 서울 올림픽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언론이 앞장서서 ‘평화의 댐’이라는 대안 모색으로 나타났고 언론은 12월 6일부터 그 댐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어린아이, 해외 동포,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들에게까지 성금을 거둬들였다. 손석희는 그걸 ‘앵벌이’라고 불렀다고 말한다.[footnote]저 7백억 원이 넘는 돈에는 어머니께서 주신, 내 돈 천 원도 들어 있다. 오백 원만 내고 나머지는 군것질 할까, 아니면 천 원을 다 내야 하나 갈등하다가 천 원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63빌딩 절반까지 물에 잠긴다고, 이제 큰일났다고, 뉴스에서 떠들어댔다. 하지만 난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우리집은 달동네 비스무레해서 결코 수해로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깟 63빌딩이 잠겨도 우리 집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에 쓰는 지도 모르고 냈던 방위성금, 육성회비. 다 돌려받고 싶다. [본문으로]

  • 그렇다면 2008년의 촛불 집회는 대단한 것이다. 87년의 6월 항쟁 최고 인원이 하루 180만이었다는데, 2008 서울에서도 60만은 넘지 않았던가. 명박 산성 앞에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칼라TV 진중권을 봤다. 난 신기해서 진중권 뒤를 졸졸 쫓아 다녔다. 내 폰에는 아직도 진중권의 인터뷰 사진이 있다. [본문으로]
  •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서는 공설 운동장이 보였다. 사람들이 운동장에 가득 모여 무슨 구경거린가, 달려갔다. 김대중의 유세장. 멀리서 보일까 말까, 까치발을 들며 결국 못 보고 집에 왔다. 해가 지자 경례곡이 울리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으로 시작하는 낭송이 들렸고, 나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덧. 나는 소심한 어린 아이였으므로 길을 걸어간다든가, 공터에서 검정개가 되어 놀 때에도 경례곡이 울리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있음직한 곳을 향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그랬다. 가끔 늦은 낮잠 때문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못 하거나 하면 죄책감에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본문으로]
  • 유도의 김재엽, 복싱의 김광선, 양궁의 김수녕, 탁구의 유남규, 그리고 여자 핸드볼 팀. 이런 정도가 기억 난다.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게 했고, 나는 재미 있을 턱이 없는, 따분한 하키 경기 따위를 봤던 것 같다. 본 적도 없는 나라의 국기를 손에 쥔 채. 경기가 끝나고 나면 자원봉사 아줌마들이 우동 같은 것을 말아주셨고,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설렜다. [본문으로]
  • 고작 이정도다. 제1야당이 총력투쟁해도 고작 이정도밖에 안된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서도 조선일보와의 전쟁에서 지고, 노무현 역시 조선일보에게 졌다. 결.코. 이길 수는 없는가. [본문으로]
  • 2007년 대선. 2MB에 대한 서민, 중산층의 압도적 지지도 이와 같은 연유일 것이다. 강준만은 이와 같은 국민적 행태를 ‘경제벌레’라고 표현했다. [본문으로]
  •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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