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

이 책은 C 출판사 강 과장님이 생일 선물로 주신 책이다.[각주:1]  

책을 선물해 주신 그 분은 이 책이「그 여자네 집」보다 좀 더 재밌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잘 읽겠다고 말해놓고 지금껏 책장에 처박아 놓고 있었다. 제목이 비슷하니까 곱단이의 만득씨에 대한 사랑이야기겠거니 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는「그 여자네 집」을 백번도 넘게 읽었었으니 사랑 이야기가 지겨울 만도 했다. 아래는 책의 줄거리.

 

6.25 전쟁.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남자들은 월북하거나, 피란을 가거나, 징용으로 끌려가거나, 죽거나 했던 시절의 서울. ‘나’는 집안의 가장으로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 간이었던 그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그 때, 전후의 서울에서 사랑은 사치일 수도 있다. 우리 집은 하숙을 치기 위해 이사를 하고 나는 은행원과 결혼을 한다. 신혼 생활의 재미도 잠시.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 시집 식구들과의 이질감에 진절머리가 나던 나는 우연히 그 남자의 소식을 듣는다. 그 남자가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얘기다. 둘은 다시 만난다.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며 불필요한 소품 따위를 사거나 돼지 껍데기를 먹는다. 나는 벌써 생기 있는 처녀로 변신해 있었다. 그 남자네 별장으로 놀러 가기로 한 날, 그 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나는 곧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가 시력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나는 들었고, 시어머니는 나의 임신 사실을 좋아했고, 나는 곧 네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하숙을 치던 엄마네 집을 부수기 얼마 전, 그 남자와 나는 마지막으로 만난다. 나는 그 남자의 유아적 행동에 치를 떨며 야단을 친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있다. 앞서 읽었던 백광흠의『귀뚜라미가 온다』의 경우가 은유라면 박완서는 story다. 개인적으로 은유를 선호하긴 하지만 박완서 정도의 작가라면 말은 달라진다. 박완서는 대단하다. 그녀는 치밀하며, 능수능란하며, 솔직하고, 담담하며, 재치 있으며, 따뜻하다. 나를 ‘구슬 같다’고 말한 그 남자(현보)와의 사랑. 그래서 나는 그 남자에게 구슬 같은 여자가 된다, 는 박완서의 첫사랑에 관한 소설. 결론부터 말하자면『그 남자네 집』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소설은 전체 18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보다 2장이, 2장보다 3장이 조금 길다. 거꾸로 18장이 가장 짧고, 17장이 그보다 조금 길다. 18장을 분량별로 그린다면 산과 같은 모양이 생긴다. 그 중 그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4장에서, 11장에 나온다. 즉 분량 면에서 짧고, 비중 면에서 중심이 아니다.

 

「그 여자네 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시대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다. 6.25라는 격변의 시대가 준 아픔. 사랑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그렇게 만든 시대에 관한 이해를 빼놓고 이 소설을 감상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만약 소설의 방점을 ‘사랑’에 찍는다면 첫사랑의 그 남자가 그 남자의 어머니에게 해대는 가혹한 투정이라든가, 춘희의 낙태 및 춘희가 양갈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라든가, 장호원 광수의 이야기는 소설의 인과성을 결여하는 요소가 된다.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 17장 춘희의 전화 통화는 후일담 형식의 에피소드란 말인가. 그렇게 판단해도 좋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고엽제 광수며, 양갈보 춘희, 시어머니의 박수무당, 원단 장사하는 올케, 음악을 좋아하는 그 남자. 그 남자의 다 헤진 팬티를 입고 임종하셨던 그 남자의 어머니. 이들은 모두 시대가 우리에게 준 상흔이 아니겠는가. 박완서는 나직이 ‘시대’를 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속을 살아왔던 우리의 아픈 과거를 들려줬던 것이다.

 

박완서 소설의 매력이 무엇일까? 이야기라 해도 좋고, 솔직함이라 해도 좋고, 따뜻함이라 해도 좋다. 이번에 느낀 점. 섬세함.[각주:2]

   

재밌는 구절.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70쪽)

유일하게 밑줄 친 부분인데, 이 구절은 무척 재밌다. 이런 문장 구조다. "OO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OO을 통과한 후이다. " 이렇게 바꿔보자.

추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추억을 통과한 후이다.

우정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우정을 통과한 후이다.

사랑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사랑을 통과한 후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덧> 대학 새내기. 꽤 학번이 높은 선배와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여류 작가를 비하했고, 그 선배는 내게 내가 아는 여류 작가[각주:3] 누가 그렇게도 형편없느냐고 했다. 나는 아는 대로 박완서를 들었고, 선배는 그 소설의 줄거리가 뭐였냐고. 박완서의 단편 고작 몇 개를 읽었던 나. 어물어물. 이외수의 단편 줄거리를 거짓말로 말하고... 그 선배, 끄덕끄덕 해줬는데. 얼굴이 화끈. 거짓으로 취한 척.

 

덧> 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가?

소설을 읽으며 도무지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모든 독자들이 갖고 있는 고질적 습관인데,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박완서 할머니가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게 도무지 머릿속으로 연상되지 않았다. 풋풋한 박완서. 새초롬하고, 귀엽게 생긋 웃는 박완서. 구슬 같고 어디서나 빛나는 박완서. 사소한 습관이 이 소설을 제대로(?) 읽게 한 계기. 속죄하는 의미에서 박완서 할머니의 풋풋했던 사진 한 장.

 

 

 

 

 

덧> 어제 pd수첩 <기지촌 할머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2009.06.23)을 보았다. 거기에는 춘희가 있었고, 박정희가 있었으며, 박완서가 있었고, 우리 어머니가 있었다. 좀 엉뚱하지만, 국가란 도대체 뭔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어떤 사학자는 기지촌 여성들을 일본 위안부에 비유한다. 국가가 그녀들의 가랑이를 벌리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담배맛이 쓰다. '불쌍하다'는 감정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링크 걸어둔다. 

pd수첩 다시 보기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pd/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836100403100000&pagesize=15&pagenum=1&cornerFlag=1&ContentTypeID=1  

 

  1.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지 못하고 두리번대던 겨울. 출판사에서 잠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책이 끝날 때까지 교정을 보고, 원고를 수정하고, 뭔가를 기획하거나 회의를 했던 것 같다. 자유 계약이었으니까 집에서 주로 작업을 했고, 출판사에는 일주일에 두 세 번 출근했다. 당시 그 분은 백수였던 나에게 꽤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사를 권유하셨는데(지금 생각해보면 빈말이었을 확률이 높다), 하루 종일 출판사에 앉아 책을 보고 교정한다는 생각을 하니 좀 심심할 것 같아 별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잘한 일이다. [본문으로]
  2. 딴 생각. 모든 여자는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할까. 아니면 대개의 여자는 섬세한 것일까. 아니면 박완서라서? 난 여자들이 신기하다. 부럽기도 하고. [본문으로]
  3. 이렇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류 작가가 뭔가, 여류 작가가. 매사에 진지한 척. 고민하는 척. 합리적인 척. 지금의 나도 그때의 나와 결국 같지 않은가. 천생(賤生)이 이러한 걸. [본문으로]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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