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아들과 함께 걷는 길』(해냄, 1996)

  

작가의 고향 강릉을 아들과 함께 걸어 간다. 대관령 꼭대기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아들과 문답식으로 대화를 하며 삶, 인생, 아들과 아버지, 자연 등에 대해 말한다. 총 31장으로 구성되었고, 나지막이 이야기하며 37굽이를 걸어간다. 잔잔하다. 끝.

 

이 책은 헌책방에서 산 것 같은데, 재미없을 것 같아서 여지껏 잊고 지내다가 오늘 꺼내 읽는다. 직관은 정확하다.

나는 이순원을 모른다. 그의 작품이라야 고작 27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단편「수색-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정도나, 이상 문학상 우수작「말을 찾아서」정도를 읽은 기억이 다다. 가족사 소설. 이 책은 90년대 중반 이순원이 문단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받던 시기에 창작되어진 건데, 사실, 별로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동화책도 아니고. 뭐라 규정할지 애매하다. 왜? 이야기가 없다.

 

소설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 이유는 이질감 때문일 것이다. 아들과 대화하는 다음의 장면을 보자.

 

“상우야.”

“예, 아빠.”

“이제부터 걷는 거야. 여기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저기 산 아래 할아버지 댁까지. 다른 사람들은 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너하고 나하고만 걸어서.”

“예.”

“너 걸을 수 있지?”

“예. 걸을 수 있어요. 그래서 신발끈도 아까 자동차 안에서 다시 맸는 걸요.”

“준비는 그것하고 이 물통하고 하나면 충분하다. 아빠는 이제 네가 아빠하고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을 만큼 자란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저도 아빠와 함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서울에서 아빠가 우리 그 길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말씀하실 때부터요.” (22쪽)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적어도 내가 아는 부자지간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나만해도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일 년에 고작 10분도 채 안 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겠고, 그렇다면 여러 종류의 부자지간도 있을 테니까 이런 걸로 시비거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어색하다. 어색한 것은 어색하다. 초등학교 6학년을 나는 안다. 대체로 그 때의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좀더 보자.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의 말을.

 

“그리고 가면서 나무도 살피고, 돌도 살피고, 길가의 풀들과 꽃들도 살피고, 또 시

냇물을 만나면 시냇물과도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시냇물하고도?”

“그건 걷다보면 저절로 알아질지 몰라요. 그냥 이야기를 해도 되고 또 말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아빠하고 제가 시냇물에 세수도 하고 또 그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마시면 그것도 시냇물과 이야기하는 거나 같잖아요.”

“자, 그럼 걷자.”

“그럼 지금이 두 시 반이니까 여덟 시쯤 되어야 도착하겠네요. 별이 뜨면 별자리도 살피면서.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 보는 별을 우리집에선 왜 볼 수 없을까 하고. 여덟 시쯤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죠?

“그래. 아마 그때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거야. 네가 끝까지 걸을 수만 있다면.”

“전 걸어요, 아빠. 저 이제 6학년이에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고요.”

 

결국 도덕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훈훈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다. 난 도덕 교과서를 싫어한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때 <국민윤리> 시험에서 49점을 맞았겠는가. 나보다 점수 낮은 학생이 전교에 얼마 없었다. 교훈과 교훈과 교훈이 나는 싫다.

 

덧> 우찬제의 해설도 우습지만, 아래의 삽화는 뭔가 이상하다. 아래는 ‘직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의 삽화다. 아이의 눈이 네 개다. 순간 등골이 오싹.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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