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3. 현암사, 장영은 역, 1994) 읽다.

 

철학의 담론을 소설의 형식으로 주조한 메타픽션

 

소설의 형식으로 읽는 철학 개관서.

이미지로 세계를 그리는소설, 그리고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세계를 해석하는철학은 분명 다르다. 나는 형상화를 좋아하는 음모론자다. 그러므로 철학은 젬병이다.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세계도 그 존재가 불확실한 이 시대에 이성과 정신의 고차원적 함수 관계가 가당키나 할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잘 모르니까 읽는다.잘 모르니까 최대한 쉬워 보이는, 개관서를 골랐다. 이 책이다. 파편적이고 분절화된 내 지식의 요람에 이 책이 한 줌 보탬이 되길 바라며 페이지를 펼친다.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할지 비문학으로 분류할지는 2권 중간 쯤, 힐데의 등장에서 결정되었다.

소설은 15세의 소피라는 소녀가 어느 날 너는 누구니?’라는 작은 쪽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소피는 알베르토 크녹스라는 철학 선생님으로부터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로부터 빅뱅 이론까지 철학사의 개관을 학습하게 되는데, 번호 붙인 각 장마다 철학사의 한 흐름씩이 알맞게 분절되어 있다. 즉 일종의 액자 형식의 소설인 셈이다. 외화로서 소피와 크녹스 선생님의 이야기, 내화로서 철학사의 통시적 흐름.

하지만 이 책은 그리 간단치 않다.

 

소피는 크녹스 선생님에게서 뿐만 아니라 알베르토 크낙이라는 UN 평화유지군 소령에게서 정체불명의 엽서를 받는다. 크낙은 힐데의 아버지인데, 엽서는 한결같이 딸(힐데)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힐데와 소피의 생일은 같다. 소피는 혼란에 빠졌다. 힐데와 크낙은 누굴까. 크낙이라는 사람은 왜 힐데에게 보내는 엽서를 내게 보냈을까. 이런 의문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즈음, 소피는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힐데라는 소녀가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금목걸이가 소피의 침실에 있는가 하면, 크녹스 선생님의 개 헤르메스가 힐데야, 생일 축하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숲에서 난쟁이를 만나기도 하고, 늑대를 만나기도 한다. 혼돈스럽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픽션이다.

소피와 크녹스는 크낙이 쓴 소설 속 인물이다. 크낙은 자신의 딸, 힐데의 열 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자신이 직접 쓴 철학책을 선물한다. 말하자면 소피와 크녹스 선생님은 그 철학책을 흥미롭게 구성하는 일종의 배역인 셈. , ‘비현실(정신/영혼) 세계에 존재하는 크녹스 선생님이 소피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현실(육체/물질) 세계에 속한 크낙이 딸 힐데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것에 각기 대응한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형식은 단순한 흥미 요소를 넘는 상징적 장치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다. 이 정신과 육체의 함수 관계가 곧 서양의 철학사가 된다. 그리스 초기의 자연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재료에 대해 탐구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세계는 원자의 결합이며, 이 결합의 주조 방식에 의해 물질(세계)이 구성된다고 보았다. 자연계의 변화란 이 물질들의 해체-결합의 동음이의어다. 이른바 유물론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한편 플라톤으로 넘어 오면 세계를 보는 방식이 바뀐다. 플라톤은 현실을 이데아의 모사품이라고 정의했다. 불변하는 정신에 비해 육체는 변하므로, 육체는 정신의 비해 열등한 것으로 인식한 것.

이와 같은 인식 체계는, 헤겔 식으로 표현하자면,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 서양 철학의 거대 산맥, 곧 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말한다.

 

결론을 내자.

소피와 크녹스 선생의 철학 수업(관념의 세계)에 크낙의 엽서가 불쑥 등장(현실의 세계)한다든가 하는 것은, 곧 서양 철학사의 대립적 이항 관계의 상징적 표현이며 동시에 물질과 정신은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답변, 즉 물질과 정신의 실체는 불확실하므로 두 세계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다는 현대 철학의 사상적 궤적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서양 철학의 거대 담론을 소설의 형식적 변형으로 주조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한편.

철학 입문서라 하지만 데카르트부터 전개되는 바로크 이후 철학은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 늘 그렇지만 철학은 특히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 버클리, 칸트,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경로를 통해 꼭 공부해야 할 숙제다.

철학의 등에가 나를 물었을까.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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