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 2000) 읽다.


탄생이 숭고하다고? 아주 오래된 농담이겠지.

 

아버지의 불명예스러운 퇴직과, 죽음과, 이사와, 유복녀의 출생이 한 해 동안에 연달아 일어났다. 영빈이의 여동생 영묘는 새로 이사간 변두리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교체하듯이 태어난 생명은 아버지에 비해 그 존재가 너무도 작고 미미해서 불필요한 이물질 같기도 하고 서투른 거짓말 같기도 했다. (14)

 

소설의 시작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주인공 심영빈 집안의 몰락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교차가 일어난다. 아버지는 삶에서 죽음으로, 그 삶의 빈 여백을 채우듯 동생 영묘는 태어났다. 아버지의 죽음과 환치돼 태어난 동생은 불필요하거나 서투른 거짓말 같다.

소설은 죽음과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죽음은 불명예와 막막한 생계라는 인과를 만들고, 삶은 불필요하거나 서툰 거짓말 같이 막연하며 뜨악하다. 소설의 결말 역시 죽음과 삶이 반복된다. 치킨박의 죽음, 그리고 심영빈의 막내 아들 탄생 역시 환송받거나 환영받지 못할 교체.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는 자본주의가 낳은 사생아다. 죽음은 그것 자체로, (생명 탄생)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낯설고 처치 곤란한 무엇이다. 그 삶과 죽음의 틈에 낀 우리 현대인은 자본에 굴종된 속물적 인간으로, 성욕에 함몰된 쾌락적 인간으로, 감각과 지각이 마비된 비윤리적 인간으로 타락한다.

그러므로 치킨 박의 죽음을 소멸의 순간에 빛나는 정신의 선택이나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라는 이선옥의 해설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암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치킨 박의 죽음이 빛나는’ ‘배려와 사랑일 수 있을까. 남겨진 가족들은 가장의 생명과 맞바꾼 치킨집을 보며 망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빛나게느낄 수 있을까. 옳지 않다. 오히려 그런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비극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희망은? 글쎄. 에필로그에서 영빈과 영준의 대화를 통해 가족을 통한 희망을 발견했다면 그건 글쎄다. 영준이 말한 가족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거리만큼 격리되고 단절된 가족이다. 회신되지 않은 E메일처럼 공허한 메아리일 뿐. 오래된 언어와 같은 끈끈함과 유대로 살 비비며 사는 그런 가족이라 할 수 없다. 희망은? 글쎄.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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