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미실』(문이당, 2005) 빌려 읽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라니, 나는 소설 『미실』을 읽는다. <선덕여왕>에서 내가 좋아하는 고현정 누나가 '미실'역으로 열연중이다. 두어 번 봤는데 역시 완소 고현정 누나의 연기가 발군이다. 좋다. 험험.. 책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서『화랑세기』의 진위 논란은 논외로 한다.
금기의 전제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하니까 하지 말라는 거다. 대개의 금기는 제도 및 문화, 종교적 차원에서 숭고함과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그 기원을 살펴 볼 때 금기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한 필요 선택항인 경우가 많다. 마빈 해리스의 생각을 원용하자면, 문화(금기)란 현실적 요구에 의해 발명되는 것이다.
소설『미실』이 파격적이며 충격적인 작품이라면, 이유는 금기의 소재를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근친상간이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금기. 그것에 대한 까발림 - 예로부터 왕족간의 근친상간은 기득권 유지 및 혈통 보존이라는 이유로 용인되긴 했었지만.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륜왕 :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에게 성(性)을 바친다. 왕의 동생 세종, 진륜왕의 형 동륜, 사다함의 이복 동생 설원랑에 자신의 친동생 미생까지. 뭐, 이건 말이 색공(色供)이지, 실은 집단 난교다. 그러나 작가가 조형한 미실은 말초적 감각 기관만 자극하는 희대의 색마가 아니다. 한편 색공지신(色供之臣)이라는 태생적 소임을 부여 받은 미실은 자신의 성을 권력 장악 및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것만으로 미실을 규정하는 것도 역시 부족하다.
미실은 성을 통해 자유를 얻고, 무애의 경지에 도달한다. 발명되어진 금기(근친상간, 절개, 성매매)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때 미실은 열락의 환희를 맛본다 - 그렇다고 해서 미실처럼 문란한 성관계를 맺은 모든 존재가 다 자유의 은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을 색욕의 배설로만 여기는 사람들과 미실은 대별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 구조의 변곡점에 등장하는 말(馬)의 이미지란 미실의 투사물이다. 굴레와 규칙과 제도와 금기에서 벗어난 준마는 자유롭다.
소설『미실』은 지금껏 베일에 가려진 5세기 신라 궁중의 야사를 작가의 능란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우리는 미실이란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미세하나마 신라 왕조의 문화를 탐닉할 수 있다. 성에 관한 유려한(혹은 감칠맛 나는) 묘사는 덤이다. 색공지신(色供之臣)이었던 미실은 색(色)을 이용 권력의 극점에 서기도 하고, 또한 이를 통해 무애의 언덕을 달리기도 했다. 자칫 야설로 빠질 뻔한 이 책을 구한 건, 김별아의 문체다. ‘전아, 고아, 우아’의 3종 세트가 딱 어울리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페이지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별사탕처럼 달콤한 보석.
덧. 이 소설은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란다. 심사평에서 여성 인권 신장이니, 여성의 주체적 삶이니 한다. 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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