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푸르른 틈새』(살림, 1996) 읽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눅눅한 반지하 방에서 이사를 준비하는 현재(31살의 나)의 층위와 회상의 대상이 되는 과거의 층위(11살, 21살의 나)가 그것이다. 11살이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한다면, 21살은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성(性)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3차 성징에 해당한다. 이러한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한 성의 경험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비약하자면) 인간으로서의 내․외적 정체성 형성에 다름 아니다. 육체란 녀석은 정신의 환유이므로.
액자의 구조로 볼 때, 작가는 내화에 해당하는 과거의 서사 라인을 통해 성장통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말하고자 하는 했던 것이리라. 여기서의 성장통이란 위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와 ‘성(性)’에 대한 숨 가쁜, 뼈 아픈 경험이다. 옳거니.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성장을 해서 하나의 인격체를 형성하는 데에 정치와 성은 통과제의적 장치겠지. 정치와 성으로서의 성장 소설의 형식이므로 유아적 자아(11살)와 성년의 자아(21살)가 등장하는 것도 괜찮은 구도다. 소설 초입에 서술된 위 인용문이 작품 전체의 튼튼한 골격을 만들어 주는 장치라 생각하며 읽는다. 그러나….
신인 소설가의 작가적 역량에 관한 것이겠지만, 이 소설은 단단한 플롯이 없다. 과거 1(11살)과 과거 2(21살)가 따로국밥이다. 연결고리가 없다. 과거 1의 에피소드식 유년의 기억이 어떤 성장통으로서의 역할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형상화된 인물은 입체적이지 않거나 이야기 전개상 불필요한 경우도 있다. 과거 2의 경우는 80년 운동권의 후일담. 가투 및 노동 운동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성장통을 말한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소설에 간헐적으로 소개된 단편적 이야기 - 냄비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는 알레고리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치밀하지 못한 중구난방.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이 불편함. 몇 개의 반짝이는 문장들과 짧은 일화적 사건만을 놓고 가늠할 때 권여선이 단편을 쓴다면 이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덧. 제 2회 상상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는 이 소설은 <살림>에서 출판이 되었다가 최근 <문학동네>로 적을 옮겨 재출판 되었다. 상상문학상이 대체 뭔가, 검색해 보니 총 3회를 끝으로 사라진 문학상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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