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부재의 기억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 비평, 2001) 읽다.

가슴 아리는 시가 있다. 그냥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참혹한 시. 그 참혹함에 얼른 시집을 덮어 버리게 만드는 시.

가령,

드는 칼로 심장 가까운 부위를 도려내는 섬뜩함.

날 선 언어와 날렵한 예각의 모서리.

찬 서리에 월광이 묻은 피뢰침.

찢겨진 살점과 녹슨 못.

사금파리와 맨발. 베이는 살점.

이런 시들을 읽는 동안은 밤 자리도 어지럽다. 기형도가 그랬다. 그리고 적확한 자리에 허수경이 있다. 기형도와 허수경에게 ‘결핍’과 ‘부재’라는 단어가 오버랩된다. 공들여 허수경을 읽는다.

읽다 덮고, 읽다 잊는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인용 1

바다가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원형적으로 바다는 여성(자궁)이며, 정화 및 재생의 공간이다. 바다(물)는 파도를 통해 그 형태가 유동적이며, 달은 차고 기움의 순환적 선운동을 통해 그 모습이 가변적이다. 여성 역시 마찬가지. 건강한 여성의 생리는 착상․수태 여부에 의해 (생리)혈과 태아로 유동적이며, 만삭과 해산은 둥굶과 평평함으로 달의 운동 방향 및 모습과 일치한다.

인용 1을 보자. 시인은 바다에 있지만 바다를 붙잡지 못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바다가 (시인에게) 걸어 왔지만 시인은 바다를 잡을 손도, 바다를 잡지 못해 서러워 눈물 흘릴 눈도, 가지 마라 애원할 혀도 없다. 거세된 시각과 청각, 촉각. 거세된 감각 기관. 결핍의 신체.

바다에 있지만 바다를 가질 수 없는 시인은, 여성이지만 여성성이 없는 (여성 혹은 모성을 포함하는)성적 결핍의 공허감만 남는다. 여성으로서의 성적 결핍이란 수태하지 못하는 껍데기로서의 자궁, 생산성이 절취된 산도에 다름 아니다. 이 결핍과 부재의 전언에서 정화와 재생으로서의 모성, 즉 희망의 영상 역시 절제된다.참혹하다. 참혹하다.

허수경의 결핍된 여성성은 내면적 원인이라기보다는 외부적 충돌에 의해서 강요된다.


 

인용 2 (밑줄 : 인용자)

 

ⅰ) 나는 다시 노래를 할 수 있어요

어느날 죽은 이의 결혼식을 보러 갔지요,라고 //

신랑은 심장을 도려냈어요

자궁만이 튼튼한 신부는 신랑의 심장자리에

자신을 밀어넣었습니다

- 「나는 어느날 죽은 이의 결혼식을 보러 갔습니다」 中

 

ⅱ) 담뱃진 속에 끈적거리는 죽음은 갓 태어난 아가처럼 신선하고 외롭다

- 「미술관 앞에 노인들은 물 흐르듯 앉아」 中

 

ⅲ) 눈알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박네

- 「그 밤에 붉은 꽃에」 中

 

ⅳ) 바람이 불고 바람 사이로 먹소금이 일어나 작은 자궁으로 들어가고 먼 훗날 그 자궁에서 늙고 조그마한 아가가 자라난다

-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 中

 

ⅴ) 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

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

-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中

 

ⅵ) 돌아오지 않는 연인의 가무덤 뒤집고 공장 서고 //

아가들 아장거리며 공장에서 일하고 손은 쇠덩쿨 되고

- 「비행기는 추락하고」 中

 

ⅶ)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中

 

ⅷ) 그 숲에 살던 나무들은 통째로 잘려나가고 없었다

잘려나간 그 자리에서 벌떡거리는 그들의 심장을 나는 보았다

- 「聖 숲」 中

 

허수경의 세계 속 여성은 건강한 자궁을 가졌더라도(ⅰ) 결핍된 애인의 심장(ⅰ, ⅲ, ⅷ) 덕분에 늙고 조그마한 아기를 잉태(ⅱ, ⅳ)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① 신체 및 존재의 결핍 (ⅰⅲ ⅵ ⅷ)

② 죽음과 생명의 등가성, 이로 인한 희망의 부재 (ⅱ ⅳ ⅵ ⅶ)

③ 과거와의 절연 (ⅴ)

이다.

수치스런 과거(③)로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는 결핍(현재-①)되었으며,[인과는 관성적이므로] 희망이 부재한 미래(②)는 당연하다. 과거의 ‘수치’ → 현재의 ‘결핍’ → 희망(미래)의 ‘부재’로 이어지는 단선적 운동성은 경쾌하지만 불투명하고, 흡착력이 좋지만 숨막힌다. 결핍된 것은 참혹하고, 부재하는 것들은 참담하다. 궁금한 것은 과거의 수치스런 기억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래 시를 읽으면, 그 답을 알 수 있을까.

 

인용 3

그 옛날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과수원 가까이에는 통조림 공장

과수원 가까이에는 마을

 

한때 마을에는 사람의 아들에게 연애편지를 쓰던 호랑이가 살았네

우편배달부는 지난날 전쟁으로 살해되고

편지가 든 가방만이 과수원 나무에 매달려 있네

 

과수원 가까이에 사는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했네

머리카락이 떨어질세라 흰 머릿수건을 쓰고

 

여자들은 밤에도 낮에도 일을 했네

물과 피로 이루어진 생산기계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여자들의 흰 손이 양수 속을 헤엄쳐다니네

 

과일에 박힌 씨앗을 도려내고

토막토막 잘라서 끓는 설탕물 속으로 집어던지네

 

거대한 화덕 위 씨앗 없는 과일들이 설탕물 속에서 쏘다니고

우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과수원 나무에 매달린 주인 없는 가죽가방 속에서

오래된 문자로 쓰여진 편지가 지상으로 떨어지네

 

내 짐승의 자궁을 받아주어요 누군가 공장의 그늘 아래에 멈추어 서서 늙은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었네

 

공장의 문을 닫은 지도 오래되고 이곳이 먼 훗날 바다가 될는지 바다가 생겨서 물고기들이 낡은 공장의 들보 사이를 걸어다닐는지 알 수 없네

 

덧. 도저히, 뭔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완의 포스팅으로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덧 2. 인용 3에서 읽히지 않은 '편지', '전쟁'과 살해된 '우편배달부', '자궁'과 '삶은 과일들의 '자궁', 오래된 '편지'와 '늙은 애인' 등의 시어를 주목한다면, 시집이 정리될 것도 같은데...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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