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여백』(솔, 1997) 읽다. 

내가 잃어버린 몇 권의 시집 : 장정일의 첫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 황지우의『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그리고 최승호의 첫 시집『대설주의보』. 공교롭게도 모두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들이다. 잃어버린 시집 중 가장 아까운 것은 장정일의 것이지만, 황지우와 최승호를 잃어렸을 때의 상실감도 이에 만만찮았다. 황지우의 것은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재구입 했다. 장정일과 최승호가 꽂혀야 할 책꽂이는 아직도 빈 상태다. 정확하진 않지만 시집을 잃어버린 건 십중팔구 전날 술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에 술을 마셨는지, 그 술을 마시게 한 이유란 놈에게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최승호의 초기 시는 외부의 대상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시점이 80년대 초․중반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시적 대상은 다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먼저 70년대의 산업화가 끝난 후의 도시 문명이 그 첫 번째. 이성과 합리의 가치를 표방하는 문명의 수직성은 빛의 반대편에 음울(陰鬱)을 만든다. 수직의 날선 그늘이 만든 상흔, 그 부조리를 목격한 시인은 문명적인 것으로부터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를 쓴다. 동시에 80년대는 빛고을을 총칼로 제압한 군부 독재의 칼날이 가장 서슬 퍼렇던 시기이기도 하다. 파쇼의 획일성, 강요된 애국주의, 통제의 계엄령. 그 암울한 시기를 살아 남아 통과한 사람들은 ‘말의 변비증’을 앓거나 ‘무덤 속의 벙어리’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최승호의 시편들은 문명과 군사 독재라는 외적 대상을 제재로 삼았기 때문에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편 90년대에 들어서며 최승호의 시편들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90년대라는 세기말의 혼란 ․ 지향해야 할 공동체적 가치의 붕괴 ․ 대항해야 할 적(敵)의 비가시성 등을 시적 변화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외부 세계(대상-도시 문명, 군사 독재)에 대한 염증과 환멸의 종말이란 필연적으로 내면에 대한 탐구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승호의 시적 변화(外 → 內)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내재된 여정이다.

최승호가 탐구하는 내면이란 외부의 대상과 대립하는 자아로서의 ‘나’가 아닌, 고립된 존재로서 내면에 천착하는 개별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후자의 ‘나’는 이 시집에 ‘눈사람’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아래의 시를 보자.
 

인용시 1 

마흔네 개의 눈사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람은 일 년에 자신의 몸무게 정도의 죽은 세포와 세균을 배설한다고 한다. 그 허옇게 죽은 것들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면 사람들은 해마다 보기 싫어도 자신의 분신(分身)인 회색 눈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올해 나는 마흔네 살이 된다. 올 겨울에는 마흔네 명쯤의 눈사람을 거느리게 되는 셈인가.

해마다 나는 눈사람을 낳는다.


이 시는 시집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눈사람> 연작시 이해에 단초를 제공한다. 최승호는 물리적이며 현존적인 자아로서의 ‘나’가 아닌, 비가시적이며 은유적인 자아로서의 ‘나’를 눈사람으로 치환했다. 밀폐된 방 안에 장미를 두었을 때, 장미의 향기(소립자)는 장미인가. 아니면 시각 ․ 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장미꽃만 장미인가. 타자를 치고 있는 내 손가락은 나의 일부인가.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달려, 언젠가 깎여져 나갈 손톱도 나의 일부인가. 그 언젠가는 두피였을 비듬은 나의 일부가 아닌가. 내장 속에서, 미궁 속에서 헤매는 똥은 과연 나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나를 만드는 것은 오직 ‘나’ 뿐인가.

인용시 2

시 아닌 것들이 시를 만든다. 

시 아닌 것들
․ 언어
․ 책상
․ 백지(또는 컴퓨터)
․ 펜(또는 손가락)
․ 저자
․ 나가르주나의『中論』 같은 책
․ 독서
․ 밤
․ 눈사람 같은 시적 대상
․ 국어사전
․ 추억들
․ 원고청탁서, 원고료, 인세
․ 잡지들
․ 편집자들
․ 비평가 혹은 독자
․ 한국시문학사
․ 학자들
․ 인쇄소
․ 의자
․ 문법
․ 기타

만들어진 시는 시 아닌 것들의 부력(浮力) 위에 빙산의 일각으로 존재한다.




위 인용시는 시를 만들게 하는 것(creative가 아닌 make)이 무엇인가를 나열하고 있다. 인용시대로라면 시는 시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시 아닌 것이 시가 되며, 그러니까 시는 시가 아닌 것이다[삼단 논법의 도식적 틀 = A → B, C → A ∴ C → B. 시 : A, 시아닌 것 : B로 친환 후 삼단 논법 공식에 돌려 보자 = ① A → A, ② B → A, (①의 조건항 A와 ②의 결론항 A를 삭제한다) ∴ ③ B →A (A⇏A).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

다시 인용시 1로 돌아가 보자. 내 세포는 나일 테고, 내게서 배설된 세포를 뭉쳐 회색(세포) 눈사람을 만든다면 이 또한 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나와 또 다른 내가 있을 텐데, 그럼 진짜 나는 어떤 것인가. 실체하는 나는 무엇인고, 실체하지 않는 나는 또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온전한 나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나를 만드는 것은 오직 나로 인해서인가. 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가. 비워짐으로 인해 채워진다는 것인가. ‘나’의 부정을 통한 자아 발견인가. 뭐냐. 자동기술법이냐. 흠…. 씨….

이건 어려운 문제라, 이 시집엔 아래와 같은 식의 고민 과정(인용시 3)을 통해, 결론이 유보(인용시 4)된 것처럼 보인다.

인용시 3 

눈사람의 중심 

연탄재를 굴려 눈을 부풀리면서 눈사람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눈사람의 중심은 연탄재가 된다. 열아홉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십구공탄의 경우 중심은 가운뎃구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구멍은 비어 있으므로 연탄재가 중심인 경우에도 눈사람의 중심은 빈 것이 된다.

눈송이만으로 눈사람을 만든 겨웅에는 그 중심이 눈송이다. 그러나 어느 눈송이가 중심인가. 눈사람은 온몸이 눈송이 그물처럼 짜여 있다. 중심은 비어 있거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비어 있음이 중심이라거나 없음이 중심이라는 말과 다르다.



 

인용시 4

  無管樂器

바람이 부는 것은 의미도 아니고 무의미도 아니다. 의미/무의미로 나누기 이전부터 바람은 불고 있었고, 바람의 의미에 매달렸던 사람이나 바람의 무의미를 물고늘어졌던 사람에게 무심한 채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언어 저쪽에서 불고 언어는 바람의 이쪽에서 빨래 집게들처럼 흔들린다.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바람은 구멍투성이 엉성한 세상을 한 자루 피리로 분다. 금관악기도 목관악기도 아닌 그 무관악기의 혼돈 소리를 당신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시집에서 말하는 눈사람이란 ‘나’일 수도 있고, 시(詩)일 수도 있다. 눈사람이 ‘나’라면 이는 존재의 부정일테고, 눈사람이 ‘시’라면 이는 (기존) 시의 부정이다. 이는 신생(新生)을 위한 소멸이다. 정→반→합의 여정으로 볼 때, 이번 시집이 (기존) 시의 형식적 파괴 및 시 자체의 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최승호의 다음 행보를 가늠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다. 내가 이 시집 전체를 오독했거나, 부분적으로 오독했거나. 흑…. 어.렵.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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