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야생사과(창비, 2009) 읽다.

 

시의 수렴적 진화물, ‘죽음그리고.

 

오랜만에 시집을 읽다. 나희덕을 읽는다.

나희덕의 전작에 대해 나는 시적인 것의 응집이란 표현을 썼다. 나희덕의 가장 강력한 힘은 시적인 정황을 수집하고, 이를 시로 응결시키는 데서 기인한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시적인 것이란 삶, 그 쓸쓸함의 풍광이라 생각한다. 쓸쓸한 것을 바라본다는 의미는 쓸쓸한 것에 대한 연민이다. 쓸쓸하지 않은 존재는 쓸쓸한 것을 응시할 수 없다. 아니, 응시하지 않는다. 값싼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함께 아픈 우리네 쓸쓸한 삶을 나희덕은 발견하고 시화한다.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후 5년만에 발표한 이 시집에서 나희덕은 좀더 그늘진 곳으로 지침을 옮겼다. 쓸쓸한 삶보다 더 쓸쓸한 것은 쓸쓸한 죽음이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섶섬이 보이는 방)

분필은 잘 부서진다, 또는 부서져 쌓인다.

  칠판 위에 곧 스러질 궤적을 그리며 (거대한 분필)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 (새는 날아가고)

목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 머리들 (돼지머리들처럼)

탯줄과 같은 지상의 길들 어디선가 끊어지고

  양수는 점점 핏빛이 되어갔다. 아무로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잠시 엿보았을 뿐.

  별거 아니군, 하는 표정으로

․ 죽음의 극장모르그(19세기 프랑스 파리에 있던 시체 전시장.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방문했다고 한다. - 인용자) 밖으로 걸어나왔을 뿐. (구경꾼들이란)

- 밑줄 : 인용자

 

심장(생명)을 잃어버린 존재는 그 박동의 의미를 모른 채, 기계적으로 생을 순환한다. 심장의 구동력은 존재로서의 살아있음 그 이전에 부유하는 영혼을 제어하는 구심점이다. 그러나 심장을 잃은 몸은 그 회전의 축을 잃고 기계적인 박동만 할 뿐이다. 나희덕이 잃은 심장은 무엇일까. 아니, 그녀가 목격한 심장을 잃은 존재는 누구일까. 누가, 무슨 이유로 심장을 물고 갔는가. 이 물음에 답은, 하지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가, 어떤 이유로, 심장을 잃었건 간에 심장을 잃은 존재는 반복적인 박동의 상태로 남겨져 있다. 시인은 심장 잃은 자를 포착한다. 마치 비탈길 넘어진 자전거의 헛바퀴처럼, 남겨진 자리는 정물같다.

정물같이 고요한 것. 아니 고적한 것. 달리는 것에 실려가고 있을 뿐인 수취인 불명의 편지나, ‘,,,이며 이 생을 버티고 버틴 존재는, 그 존재의 궤적은 결국 스러지고 바스라질 생이 아닌가.

고작 방 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방에서 미리부터 죽음을 예행 연습하기 마련인 쓸쓸한 것들은 시인과 정서적 유연관계를 맺고 있다. 목적과 방향을 잃은 자전거 헛바퀴의 울림 없는 소리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활짝 웃고 있어야만 하는 돼지 머리들의 공허한 표정과 닮았다. 삶을 상품처럼 매매하는 도시의 삶과 닮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심장을 잃은 박동이나, 목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웃는 돼지 머리는 정작 현재를 자각하지 못한다. 생명의 줄기로부터 절연되었으나,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그 맹목적 삶. 그 삶의 공허함이 나는 아프다.

 

시의 진화 과정에서 죽음은 수렴적 귀결인가. 마치 죽음이라는 하나의 형태학적 완성도를 향해 진화 과정의 업을 완성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 쓸쓸함이 조금은 갑갑하기도 하다. 나희덕의 초기작(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의 여리나 품이 넓은 모성(母性)을 기대하는 독자였다면, ‘죽음으로 수렴되는 나희덕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아직 죽음의 외경을 잘 모르는 나는 기껏해야 호기심어린 구경꾼에 불과할 테니.

 

울지마라, 아가야, 내가 저 강을 건네주마, 너를 낳아주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노루)

모든 것이 타고 난 뒤에야 검은 숯 위로 연한 싹을 내밀고 싶은 (뱅크셔나무처럼)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두고 온 집)

- 밑줄 : 인용자

 

그러나 나희덕은 말한다.

개체는 소멸해도 종의 유전적 확산은 영속할 테니, 너무 걱정 말자. 침전하고 부유하는 쓸쓸한 것들은 언젠가 바람에 의해, 구름에 의해, 불에 의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산길이 아닌 아스팔트를 방황하는 노루라 하더라도, 불에 타 검은 숯만 남은 나무라 하더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일지라도 슬퍼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울지 말자. 죽은 영혼은 강물이 어루만져줄 테고, ‘구름은 풀줄기를 타고 죽은 영혼을 어루만져 줄테니.

나희덕의 시는 결국 죽음을 닮아가고 있지만, 그의 모성적 수태 능력은 결국 영혼의 윤회를 통해 재생한다. 겨울의 나목(裸木)이 언제 그랬냐 싶게 봄에 뜨거운 잎사귀의 혀를 내밀 듯.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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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8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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