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나무(창비, 2002) 읽다.

 



신 귀거래사(歸去來辭)

 

김용택은 서정 시인이다.

그의 서정은 섬진강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김용택의 섬진강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전원에 가깝다. 인간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처녀성이 자연이라면, 인간에게 누울 방 한 칸 기꺼이 빌려주고, 살 비비며 아웅다웅하는 부대낌이 전원이다. 따라서 김용택의 서정은 고답적 풍류나 음풍농월의 탈속이 아니다. 모 닳은 밥상의 보리밥 한 덩이, 남새밭에서 막 딴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고 우물우물 씹는 그 풍광의 일부인 자연이다. 김용택의 서정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자연은 고루하다.

환유의 바탕은 인접성이다. 전원은 너무 멀다. <전원일기>도 진즉 끝났다. 이 시대에 자연이나 전원은 환유의 조건과 위배된다. 도시는 아스팔트와 속도로 상징된다. 가속과 배설은 도시의 생리다. 이상(李箱)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 ‘곡선은 굴곡이 없이 단조롭다. 게다가 동서남북으로 뻗은 벌판은 한이 없이 늘어져 있다. 문명의 도시인에게 자연은 뻔하며 낡았다. 도시와 자연, 둘은 생리 작용이 다른 이질의 종이므로.

 

가난은 아름다웠지만

귀향은 치욕이다 (중략)

돌아온 자들은 떠났던 자들이니

누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누구와 눈 맞추고 산천을 똑바로 쳐다보리

나라는 빚지고

뼈 휜 내 노동은 털렸다 탈탈 털면 하얀 이들이 떨어지던 몸은 김이 났었다 이제 망가진 몸뿐이니

-「98, 귀향중에서

 

그렇지만

다시 원래의 곳이다. 은어나 도요새가 귀소하듯 김용택은 다시 섬진강변에 섰다.

때론 나도 지루한 서정이 싫다는 서정 시인의 고백은 차라리 솔직한 내면일 수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더러운 도시의 거리를 저주하듯, 서정 시인 역시 가끔은 서정에게 투정부린다. 하지만 어쩌랴. 그의 회향은 선택가능항의 판단이 아니라 당위적 결론인 것을. 결국 귀거래사다.

그러나 도연명이 읊은 귀거래사가 자발적이라면, 김용택이 중얼거리는 신 귀거래사는 타율적이다. 쫓겨난 자는 상처를 갖고 있다. 도시는 등속의 물리 법칙에 적응하지 못한 자에게 추방을 강제한다. 도시의 생채기를 몸과 마음에 낙인처럼 새기고 절뚝이며 돌아온 자리. 그 공간은, 그러나, 지루하지만 나긋하고, 단조롭지만 아늑할 테지.

 

나무들이 내 앞에 끝없이 나서는, 나무들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필요한 것을 주고 언제 바라보아도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 봄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입술중에서

해가 뜨고 / 떴던 해가 지고 / 달이 떴다 지고 / 어제 떴던 곳으로 해가 또 떠서 지던 / 그런 하루가 있었다.

- 흰 나비중에서

아침밥 먹고 조금 있으면 점심밥 먹고 조금 있으면 저녁밥 먹는다

- 세한도중에서

해는 늘 앞산에서 떴다가 강을 건너와서는 우리집 뒷산으로 안전하고도, 참으로 한가롭게 진다. 해 뜨면 밥 먹고, 해 지면 밥 또 먹고, 어두워지면 불 켜고, 잠 오면 불 끄고 쿨쿨 잔다.

- 세한도중에서

 

도시와 대척점에 있는 자연은 늘 제자리에서 순환한다.

도시가 가속이라면 자연은 순환이다.

도시가 배설이라면 자연은 밥과 잠이다.

나는 안다. 쿨쿨 잔다는 표현에 과장이 조금도 없음을.

그러므로 나는 모른다. ‘안전하고도, 참으로 한가롭게 쿨쿨자는 저 잠의 미동을. 도시는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기능적인 것을 가르친다. 도시는 등가속의 운동 법칙과 가수면(假睡眠)의 기능을 전수한다. 도시는 무방비를 추방한다. 도시를 학습한 나는 쿨쿨자지 못한다.

 

그러니 시인은 얼마나 노여우랴.

편한 잠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기계들에 대해. 신기의 재주로 산꼭대기까지 올라 제 발밑을 깎는 포크레인은 도시에서 묻혀온 흔적이 아닐까. 시인의 뒷산을 파헤친 포크레인은 이제 전국의 4대강을 다 헤쳐 놓았다.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의 욕지거리였으면 더 좋았을 시인의 분노가 이 땅에 상처받은 나무와 강과 풀벌레에게 씻김굿이 될 수 있을까.

 

너그들 정말 그렇게 아무 곳이나 올라가 파고, 뒤집고, 자르고, 산을 부술래 이 염병 삼년에 땀도 못 나고 뒈질 놈들아 (아아, 나는 정말 쌍욕을 하고 싶다)

- 세한도중에서

 

산문체의 형식, 그리고 시의 어조. 운문과 산문의 불협화음, 평서형과 경어, 표준어와 사투리의 이질적이며 불편한 결합. 응결과 휘발의 간명한 교체.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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