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2001) 읽다.

  

참 좋은 시 읽기

 

문학은 어렵고, 시는 특히 어렵다.

문학은 회화나 조형, 사진과 달리 재료 자체가 추상적이다. 회화나 조형은 대상과 도상적 관계를 이룬다는 점에서 문학에 비해 추상적이다(재현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추상 미술을 제외하자). 반면 문학의 재료인 언어는 시각 기호로 이루어져 있지만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과 언어 기호 사이에 유사성이 없다는 점에서 상징이다. 말하자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은 그림의 대상을 바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도상적이다. 그러나 진주라는 언어 기호와 실제의 진주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므로 상징적이다.

언어 기호는 대상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결합되었다. 우리가 실제의 사물 진주진주라는 언어로 명명할 필연적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의 진주진주라고 부르든, ‘사전이라 부르든, ‘돼지라고 부르든 관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진주라는 언어 기호와 실제의 진주라는 대상과의 관계는 우연히 결합된 약속이기 때문이다. 언어 재료는 이렇듯 상징적이다.

한편 이 언어는 어떤 목적으로 도구화되는가에 따라 그 양태가 또 달라진다. 언어 기호는 상징적이지만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으로 약속된 체계이다. 각개의 낱말들은 도식화된 정의를 부여받는다. 그러니까 사전은 공식적 규율이자 강제된 규범이자 냉혹한 독재자다. 언어가 메시지그것에만 집중하게 될 때, 언어 기호는 명료해진다. 언어는 불분명한 사고의 덩어리를 반듯하게 구획하고 분절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대체로 사고의 명료성을 위한 방법과 수단이다.

하지만 언어를 의도적 모호성의 도구로 사용할 때는 그 방향은 반대다. 문학의 언어가 그러하다. 문학은 명료하게 정돈된언어를 의도적으로비틀어 사용한다. 단어는 일정한 글, 문장, 구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단어들의 배합과 관계 속에서 단어는 규격화된 정의가 아니라, 파생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날 것으로서의 문학의 언어다. 두군다나 시는 소설에 비해 정황과 사건을 구구절절히 서술하지 않는다. 소설이 친절한 금자씨라면, 시는 불친절한 파수꾼이다. 그래서 시가 더 어렵다. 소설에 관한 해석의 분분함보다, 시의 그것이 훨씬 다양한 이유는 명료성의 정도에 있다. 소설은 시보다 명료하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소설보다 불분명하므로 어렵다.


때문에 우리 같은 양민들이 시를 읽기 힘들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어느 시집을 선택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음악에 젬병인데, 일단 음악을 많이 들어보라는 뜬 구름 같이 친절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음악 감상이 어렵다. 음악에 관심이 없으니까 안 듣는 것인지, 음악을 안 듣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진 것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음악 감상은 어렵고 어려운 문제다. 사실 음악 감상에서 내게 가장 큰 장애는 어떤 음악을 선택해야 할지의 원초적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읽은 이 시집은 시에 문외한, 시를 읽고는 싶은 데 어떤 시를 읽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맛있으면서도 격조 있는 코스 요리를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나만 아는 비장의 요릿집을 추천하는 심정으로, 추천한다.

 

이 책은 김용택이 추린 시선집이다.

시집과 시선집은 다르다. 가수의 앨범으로 비유하자면 시집은 정규 앨범에 가깝고, 시선집은 그 가수의 노래를 선별해 묶은 Best 앨범쯤이 되겠다. <문학과 지성사><창작과 비평>은 주로 시집을 내는 출판사고, <미래사>의 경우는 시선집을 출간한다. 그러나 이 시선집은 김용택의 시를 엮은 시선집이 아니므로 위의 분류 기준에 적확하진 않다. 책의 부제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가 말해주듯, 여러 시인들의 Best 시를 갈무리한 일종의 기획 앨범에 가깝다.

선수가 뽑은 선수들의 작품이므로 책의 어느 쪽을 펴고 읽어도 좋다. 되는 대로 아무 데나 펴 읽더라도 기대 이상의 결과 값을 산출할 수 있다. 해석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감상하듯 읽으면 더욱 좋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료와 조리 방법을 추적하듯 말고, 그냥 맛있음그 자체를 즐기듯이 말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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