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민음사, 2009, 이인규 역, 2) 읽다.

 

위대한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읽지 못한 고전을 읽는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그의 초창기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을 뿐이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불우했던 올리버 트위스트의 냄새나고 더러운 옷, 그리고 도시 뒷골목 시궁창의 잔상만 기억난다. 지금 읽은 위대한 유산역시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재처럼 사라지겠지. 이런 생각은 좀 슬프다.


3부로 구성된 책은 각각 주인공 의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로 구분된다.

1(1~19)는 핍이 유산을 상속 받기까지의 과정이다. 고아로 누나의 손에서 자란 핍은 부모의 비석 근처에서 탈옥수 매그위치와 우연히 만난다. 그에게 족쇄를 자를 줄칼과 약간의 식량을 준 핍은 이 죄수와의 만남에 정신적 외상을 받고 자란다. 이 트라우마는 타인에게 비밀을 누설할 수 없는, 제한된 경험을 가진 자의 공포다. 이후 핍은 미스 해비셤의 집에서 에스텔러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핍은 가난뱅이 대장장이 매부 집에서 기생하는 천한 신분이다. 그는사랑을 갈망하고, 자신의 신분에 염증을 낸다.

미지의 누군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게 된 핍의 정신적 방황기는 2(20~39)의 중심 줄거리다. 핍은 미지의 재력가에게 매달 받는 용돈으로 런던에서 생활하며, 물질적사회적으로 성장한다. 반면 그는 자신을 길러준 매부 의 천박한 수준을 수치스러워할 만큼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3(40~59)에서 핍은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준 이가 유년 시절 우연히 만난 그 탈옥수였음을 알고 심한 충격을 받는다. 핍은 매그위치가 목숨을 걸고 런던에 온 것(당시 영국은 추방령을 받은 이가 국내로 밀입국하면 사형)의 진의를 알고, 그를 이해하며 해외로 망명을 계획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에스텔러와 매그위치의 관계, 변호사 재거스 씨와 그녀의 가정부, 그리고 미스 해비셤을 둘러싼 수수께기가 모두 풀린다. 매그위치는 밀항을 시도하다 결국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핍은 병을 앓는다. 조의 정성어린 간호로 핍은 기력을 회복하며 동시에 정신적 성숙에 이른다.

 

소설 위대한 유산의 흥미로운 점은 이 위대한 유산의 정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며, 왜 핍이 이 행운의 주인공이어야 했는가, 에 관한 물음표들.

천한 신분에 천박함이 몸에 덕지덕지 붙은 매그위치가 핍에게 상속하려 했던 위대한 유산은 재산이다. 그는 막대한 재산으로 자신이 훌륭한 신사를 주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일종의 풍자다. 신사의 가치가 값비싼 옷이나 품격(?) 있어 보이는 마차로 갈음할 수 있다고 믿는 물신의 매몰. 고전의 보편성이 이것의 현재로 치환할 수 있는가의 환원 가능성이라고 할 때, 배금주의나 그것이 추동해 생성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 구조는 디킨스가 포착한 19세기의 영국과 2012년의 대한민국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위대한 유산위대한 재산으로 단어 교체를 했을 때, 그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다. 그러므로 디킨스의 꼬집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핍이 상속받은 유산은 그보다는 좀 더 추상적이다. 결국 핍은 매그위치에게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으나, 또 역설적으로 그는 매그위치와 조에게 성질이 변형된 유산을 상속받는다. 그들이 보여 준 사랑과 신뢰라는 가치(이런 표현을 쓸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지만)는 핍에게 정신적 각성을 변곡점을 제시한다. 핍은 청년기의 사치스럽고 부유한 시기에 그의 삶을 탕진하고, 낭비하며, 허비했다. 그의 물질적 낭비의 정도가 높아지는 그 좌표의 지점만큼 정신적 공황은 극점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핍은 물질적 파산(매그위치의 피검), 신체적 절명의 순간(매그위치의 죽음 후 조의 병간호)에 각성하며 변화한다. 결국 핍이 받지 못한 위대한 유산은 재산일 테지만, 그가 받은 위대한 유산은 정신적 성장과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였다.

 

고전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고작 한 권의 책이 뭔가의 위대한 것을 창조하거나 위대한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다고 믿는 것도 대단한 착각이다. 삶은 한줄 한줄 씩 채워져 완성되는 것이다. 비약과 도약을 나는 믿지 않는다. 천천히, 하나씩, 딱 그만큼씩.

 

1. 3. 각각 1~19, 20~39, 40~59장의 치밀한 배열. 난 이런 게 참 좋다. 치밀한 것.

2. 민음사 책 표지 컷은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위대한 유산> 중 한 부분이다. 영화는 보지 못했으나, 원작엔 핍과 에스텔러와의 키스신이 없다. 유년 시절에 볼 뽀뽀신이 있었을 뿐. 그러니 애잔하거나 감미로운 로멘스를 기대했다간 실망할 것.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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