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남해 금산』(문학과 지성, 1986) 읽다.


시(詩)가 묶이면 시집(詩集)이 된다.
소설의 문장들은 소설 밖으로 방치될 때 생명력을 잃는다. 인과의 연결 관계에서 소설의 언어는 빛을 내기 때문이다. 반면 시의 언어들은 시의 집을 떠나서도, 시를 떠나서도 파닥파닥 살아 숨 쉴 수 있다. 요 질긴, 시퍼런, 살아있음. 시는 한 개의 문장 자체로도, 구절 그것만으로도, 한 개의 시어만으로도 자립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는 시집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하다. 구조인 시집, 이를 구성하는 요소인 시는 그 자체로 구조가 될 수 있다.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남해 금산』은 시집 전체가 하나의 시다. 개체(詩)들 하나하나가 전체의 얼개(詩集)를 이룰 때 비로소 시(詩)는 완성된다. 왜 그런가. 일반적으로 시의 제목은 시를 은유하며, 대개 하나의 시는 제목을 통해 시의 완결성이 결정된다. 한편 이성복 시의 제목은 일반적인 그것과 다르다. 이성복의 시제는 특별한 의미를 추출해 낸 추상 작용이 아니다. 그냥 시의 첫 구절이 시의 제목이다. 김영랑의 시편들이 이랬었다. 언뜻, 무성의해 보이는.「정적 하나가」라는 제목의 시는 ‘정적 하나가 내 가는 길과 들판을 몰아옵니다’로 출발한다.「당신은 짐승, 별,」은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로 시작하며,「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는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과 같은 식이다. 이성복의 시는 시집 전체에 예속되어 있다. 



『남해 금산』의 세계는 이성복의 기억이다. 그의 눅눅한 기억은 몽환적이라, 안개 뒤에 숨은 나무 같다. 이성복은 ‘아무 일도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은 기억 속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라고 절규한다. 이성복은 사건과 기억을 감지할 뿐이지, 진술하지 않는다. 진술되지 않은 기억은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이어서 시를 읽는 우리로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는지 알 턱이 없다. 대체 왜 ‘처녀들의 가슴에선 상한 냄새가 나’는지, 왜 어머니와 조상들이 ‘풀뿌리 아래서 울고’있는지, 시인이 왜 ‘자주 죽고 싶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안개 뒤에서 얼굴을 가린 그 기억의 나무는 ‘아름다운’ 혹은 ‘구갑(龜甲)같은’ 치욕으로 파생되며, 그 치욕의 현장에서 시인은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을 경험한다. 그 허술한 시간의 석탄층에서 시인은 ‘금빛 거미가 쳐놓은 그물에 갇’혀 희망을 달라 절규하지만, 애초에 희망이란 ‘벽 위에 처바른 변 자국 같은’ 것.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라는 고백은 차라리 담담해 보인다.

거짓 희망이 난무하는 이 공간에서 이성복이 목격한 것은 ‘수의(壽衣)처럼 바람에 날리는 기저귀’와, ‘무덤을 닮은 젖가슴’뿐이다. 살아야 할 것들은 이렇게 죽음과 닮아 있다. 어미의 만삭한 배는 무덤을 닮았으며, 하관의 흙 구멍은 자궁과 흡사하다. 희망이 없는 세계, 안개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 죽음이 세계를 은유하는 이 치욕의 공간 어디에서 ‘녹슨 풍경소리’가 들린다. 녹슨 풍경(風磬)이 들려 주는 소리는 어떠한가. 풍경 앞에 달린 이 불편한 수식어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모든 햇빛 찬란한 개념어(사랑, 위로, 믿음)는 거짓일 것이다. 시인은 ‘거짓말로 위로 하고 위로받’는 핏물 든 강변에서 삶이란 ‘연극’임을 ‘막이 내려도 괴로움’이 끝나지 않음을 경험한다.

치욕과 거짓의 현장.
탈출구는 없는가.

․ 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 악몽(惡夢)을 보내주신 그대, 목마름을 더 다오! 신열(身熱)을 더 다오!
․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썩은 전봇대에 푸른 싹이 돋았다
․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둥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보다
․ 기적(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


위 인용문이 어쩌면 미궁(迷宮)을 탈출하는 실이 되지 않을까. 도식화 하면 이렇다. ‘악몽’ → ‘신열(身熱)의 수용’ → ‘사랑, 돈오(頓悟)’ → ‘푸른 싹, 푸른 잎사귀’. 만약, 만약에 이 해석이 적절하다면 이성복의 다음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 지성, 1990)은 ‘그 절망의 끝’으로 치환해도 괜찮을 것이다. 확인해 볼 문제이다.

아래는 시「남해 금산」. 이 한 편의 시!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Posted by 가림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