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읽다.

꼭 한번 도종환을 본 적이 있다.
노제(路祭). 사람들. 고복(皐復)의식. 노란 풍선. 만장(輓章)의 암호들 사이에서 나는 도종환을 보았다. 북망산(北邙山)으로 가는 망자(亡者)와 도종환의 초혼(招魂). 초혼의 미세한 떨림. 그 떨림이 문득 슬퍼 보였다.
대개 한 시집을 관통하는 한 편의 시(詩)가 있다. 도종환의『접시꽃 당신』을 응축한, 이 한편의 시(詩). 감상해 본다.

 

옥수수밭에 당신을 묻고

견우 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 주고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제목을 읽어 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고, 화자는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느끼며 옥수수밭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는 길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슬픔이 있다지만, 사별(死別)의 슬픔에 비하는 것이 있을까. 생(生)과 사(死)의 영원한 갈림길의 그 순간에서 화자는 망연히 서 있다.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최소한의 위안,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영역. 죽음. 단절. 영원한 결별.

시는 크게 두 도막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1~7행까지가 사별(死別)의 상황 제시다. ‘안개꽃’처럼 가녀리게 살다 결국 안개꽃처럼 소멸해 버린, 당신. 살아 생전 당신께 고운 옷 한 번도 못 사 입힌, 나. 그런 내가 당신께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베옷(壽衣)’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확인에서 시인의 회오(悔悟)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화자는 당신을 옥수수밭에 ‘묻고’, 땅에 묻고, 가슴에 ‘묻는’다. 시에서 ‘묻는다’의 반복적 제시란 당신이 정말로 죽었다는 충격의 절규이자, 당신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의 재확인이며, 삶과 죽음의 아득한 거리감에 대한 흐느낌의 독백이다. 당신의 무덤가에서의 회한(悔恨).

무덤이란 삶의 끝이며, 죽음의 입구이다. 만삭한 여인의 배(生)는 무덤(死)을 닮았던가.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등식이 참이라면,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등식도 참일 것이다. 시인은 당신을 땅에 ‘묻지만’ 결국 삶으로 ‘돌아온다’(!).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다면, 그 이복형제인 이별과 만남도 동심원의 궤를 그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당신을 묻은 이 날, ‘칠석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견우는 소 치는 목동이고, 직녀는 하늘나라 임금의 딸로 베를 튼튼하게 잘 짰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 후 자기 직분을 망각하고 노는 데만 팔려, 이에 노한 임금이 둘을 갈라놓고 일년에 한 번씩 칠월 칠석날 저녁에 만나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 ‘칠석날’은 견우와 직녀에게는 만남의 날이지만, 시인과 ‘당신’에겐 이별의 날이 된다 - 아이러니. 이 모순에서 시인의 절망의 파고(波高)는 높아지겠지만, 시인은 이 절망의 늪을 희망의 ‘은핫물’로 전환시킨다.

전반부(1~7행)의 시어가 ‘묻고’(슬픔 및 회한), ‘돌아오네’(전환의 여정)로 축약할 수 있다면, 후반부의 핵은 ‘만남’(재회의 가교)으로 함축할 수 있다. 분명 ‘은핫물(의)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는 저승으로 간 당신과 살아 남은 시인과의 거리감.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그 아득한 거리감. 그러나 견우 직녀가 오작교를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 현존하는 물리적 거리감이 심리적 거리감으로 전이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당신과 나는 ‘흙’과 ‘바람’으로 변전(變轉)되어 재회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칠석날’은 설화에서 ‘만남․기다림의 시간’이며, 시인에겐 ‘사별․영결의 시간’임과 동시에 ‘재회․재생의 시간’이 된다.

 


시인이 ‘패랭이꽃’, ‘소지’, ‘노래’, ‘눈물’로 당신에게 그리움의 사연을 보내는 그 순간, 당신은 ‘구름’, ‘초저녁별’, ‘풀벌레 울음’, ‘빗줄기’로 내게 응답한다. 그 순간, 당신과 화자는 ‘하늘(死))과 땅(生)의 거리’에서 절망하는 게 아니라, 씨 뿌리고 밭 가는 공간(生)에서 세상의 모든 슬픔을 희망으로 전이하는 넉넉한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인식의 전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필요 조건이 있다.

다시 설화로 돌아가자. 설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은핫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그 둘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벌은 죄가 있기 때문. 자기의 직분을 망각한 죄. 견우와 직녀는 각자의 자리에서 소를 치고, 베를 짜는 본연의 직분을 인내할 때 만날 수 있다. 이 설화에서 시인은 ‘칠석날’이라는 상징적 의미 장치를 넘어선, 삶의 방향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 -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 것. 시인이 흘릴 수 있는 땀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내게만 곱고, 사랑스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를) 이웃에 나눠 주’는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 이웃에게 나눠주는, 따뜻한 심성. 이웃에게.

시인은 당신이 부재한 밭에서 잊었던 이웃을 응시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당신이 아닌, 당신의 이웃은, 당신처럼 옷 한 벌 제대로 입지 못한 남루한, 삶에서 방치된 자들이다. 그 이웃에는 ‘수몰민 김시천’(95쪽)도 있고, ‘손가락 몇 개가 달아난, 뽀얀 의수’를 한 남자(98쪽)도 있고, ‘단단히 여며 입을 옷조차 없이 (감옥에) 갇혀’지내는 동생(105쪽)도 있으며, ‘제 손에 칼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111쪽)도 있고, ‘(공장에서) 손목이 잘린’ 현숙이(118쪽)도 있다.

사별한 당신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 흘렸던 시인의 내적 시선은 이제 소외된 이웃들로 확장된다. 여기에 도종환의 다음 시세계가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출전 : 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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