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 『그림 읽는 CEO』(21세기 북스, 2008) 읽다.

 

‘자기개발서’를 읽는 ‘CEO’들의 명화 감상

 

이 책은 일전에 모 경제 사이트의 책 나눔 이벤트에 참여해 얻은 것이다. 이벤트 당첨의 조건은 감명 깊게 본 명화를 소개하고, 소개의 이유를 쓰라는 것. 덧붙여 그것이 경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에 대해 밝히라는 것. 마치 대입 논술 고사의 문항 같은 딱딱한 이 이벤트에 나는 응모했고, 당첨됐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렇다.

 

 

위는 루벤스라는 화가의 <노인과 여인>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붉은 옷감의 여인이 있다. 탐스런 유방이 보인다. 붉은 색채와 여인의 유방이 육감적이다. 노인은 여인의 한쪽 가슴을 빨고(?) 있다. 노인의 머리는 희다. 늙었다. 욕정을 참지 못한 귀부인이 노인을 유혹하는 것인가. 둘은 내연의 관계였던 것일까. 그래서 노인은 옥에 갇힌 것이고 여인은 자신의 정부(情夫)를 못 잊어 찾아온 것인가. 그러고 보니 해진 옷을 입은 노인의 몸매가 예사롭지 않다. 손이 뒤로 결박당한 노인의 어깨 근육은 아직 단단해 보이고, 종아리와 허벅지의 잔근육도 실하다. 노인은 늙었지만(흰 머리), 관능적(근육)이다. 옥은 구속이다. 이 압제의 공간에서 성(性)만이 자유롭다. 노인과 여인은 서로의 육체 안에서 자유롭다. 그래서일까. 오른쪽으로 향한 여인의 시선은 중의적이다. 형리를 감시하는 눈빛 아래 여인의 황홀경이 반쯤 숨겨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추리는 틀렸다. 사실 이 그림 속 주인공은 부녀지간이다.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투사지만 현재 옥에 갇혔다. 독재 정권은 우국지사를 옥에 가둔 것도 모자라 음식물 투입 금지라는 형벌을 내린다. 노인은 옥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면회를 온 딸은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랐다. 딸은 아버지를 위해 옷섶을 푼다. 젖을 물린다. 여인[딸]의 젖(乳)은 노인[아버지]의 입을 통해 몸 구석구석을 촉촉이 적실 것이다. 그림 속 명암의 구도는 그래서 주제와 호응한다. 여인의 가슴을 정점으로 한 빛의 율동은 노인의 몸을 타고 흐르며 점점 엷어진다. 옥[결박]은 자유의 억압이다. 여인의 젖은 생명[생명력]이다.

(이후 ‘고정관념’, ‘사고의 관성’으로 글의 방향 전개. 하략)

 

새삼스레 위 에피소드를 꺼낸 이유는, 음…, 뭐랄까, 말하자면, 새삼스러워서이다. 위는 내가 참여한 첫 도서 이벤트였고(두번째는 지난 포스팅에 소개), 내가 쓴 첫 그림평이기 때문이다. 그림 감상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림평을 쓸 수도, 그림평을 쓸 생각도 못한 것이다. 나는 음악․미술․체육에 젬병이었고, 그래서 미술․조각․고전음악․판소리․오케스트라합주․무용․김연아․월드컵에도 흥미가 없다.

 

이명옥의 『그림 읽는 CEO』는 주제별 그림 읽기다.

‘명화에서 배우는 창조의 조건’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각 꼭지별로 [명화 소개] → [의미 추출] → [현실 적용]으로 구성, 그림 감상을 통해 명화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이를 우리 삶에 적용하자며 사고의 흐름을 유도한다. 마그리트를 예로 들면 이렇다. 먼저 마그리트의 그림, <골콘드>나 <붉은 모델>을 보여준다. 다음 그의 그림들이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경계를 허물고, 구분을 파괴하는 작가의 의식적 작업임을 설파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상식적인 것의 파괴와 의도적으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마그리트의 창작 행위가 ‘창조성’의 정수이며, 또한 이 창조성이 속도의 세계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소임임을 강조한다.

 

딴지.

1~3부로 구분된 얼개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호하며(결국 같은 얘기니, 원ㅡ), 소개된 작품은 오직 ‘창조성’이란 정답으로 귀결하기 위해 줄달음질치는 하급반 아이들 꼴이다. 도식화가 단조롭고 규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과 달리 이 책에는 그림 읽는 ‘CEO'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설픈 생활 경제를 표방한 것도, 독자들의 건조한 생활 태도(그 이름을 경직된 사고의 틀로 바꿔도 상관없다)를 멘토링하겠다는 식의 월권도 죄송하지만 좀 우습다.

 

평범한 독자의 시선으로 보건대 이 책은 명화 소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읽음직하다. 명화를 보니 눈이 즐겁고, 그림이 많으니 책장 넘기는 속도감이 경쾌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나를 비롯한 그림 젬병들에게 딱! 알맞은 책이다. 출판사의 기획의도였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딴지가 불편했던 이유이다.

 

Posted by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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